쿠바, 비냘레스: 인디오 동굴, 비냘레스 계곡 외- 15/08/13(화)
새벽닭이 울고 온갖 가축들이 부스럭대는 소리에 잠이 깼다. 이 집 저 집에 불이 켜지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소리도 들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마을 주민들이 농사를 생업으로 하기 때문에 비냘레스의 하루는 이른 새벽에 시작되나 보다. 우리 숙소의 할아버지도 일찌감치 아침 채비를 마치고 일터로 나가셨다. 아이들은 아직도 곤히 자고 있다. 나는 시골마을이 잠에서 깨어나는 소리를 들으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곧이어 아침 햇살이 판자로 만들어진 작은 창으로 비쳐 들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하루도 근사하다.
아침식사를 하고 숙소에서 나와 어제 예약해둔 택시를 타고 길을 나섰다. 붉은 황톳길과 짙푸른 열대림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는 아름다운 들녘이 눈앞에 펼쳐졌다. 왕복 2차선의 좁은 길을 따라가다 보면 넓은 밀짚모자를 눌러쓴 마을 사람들이 소가 끄는 마차에 앉아 느릿느릿 여유로운 걸음으로 길을 가고 있다. 마치 바람결을 따라 햇살이 흐르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하다.
우리의 첫 번째 행선지는 인디아 동굴이다. 입구에서 좁은 동굴로 들어가 5분 정도 걷다 보면 동굴 안에 흐르는 작은 강을 만나는데 작은 배를 타고 자연이 만들어낸 동굴의 다양한 모양을 둘러본 후 배를 탄 채로 동굴 밖으로 나왔다. 톰 소여의 모험에 나오는 인디언 조를 만날 것만 같은 동굴이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산 미겔 동굴이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도망친 흑인 노예들이 숨어 지냈던 곳으로 좁은 동굴 내부 곳곳에 그곳에서 죽은 흑인들의 무덤들이 작은 나뭇가지로 만든 십자가로 표시되어 있다. 제나에게 핍박을 피해 도망친 흑인 노예들에 대해 설명해주니 아무리 쉽게 설명을 해도 ‘노예’라는 개념에 대해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노예제도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산 미겔 동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짙은 하늘색 바탕에 붉은 피부의 원시 수렵인들을 그린 벽화가 있다. 길이 180m에 높이 120m인 이 거대한 벽화는 피델 까스트로가 혁명을 기리기 위해 인근의 농부들을 동원해 그렸다고 하는데 완성하는데 4년이 걸렸다고 한다. 입장료만 비쌀 뿐 볼 가치도 없다는 택시 기사 말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부조리에 지친 이네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비냘레스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라스 자스미네스 호텔 전망대(Mirador de Hotel las Jasmines)이다. 이 곳은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비냘레스 계곡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약한 석회암 지반은 바람과 빗물에 씻겨 녹아내리고 단단한 곳만 살아남아 동글동글한 산이 된 이 독특한 지형은 백만 년에 걸쳐 자연이 빚어낸 예술작품이다. 짙푸른 야자수와 붉은 황토 빛의 강렬한 조화와 밥공기를 엎어 놓은 듯 봉긋봉긋하게 솟아오른 산들은 원시 영화를 찍기 위해 만들어낸 영화 세트장 같아 보일 만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오전 내내 돌아다녔던 인디언 조의 동굴과 흑인 노예들의 동굴과 벽화가 그려진 절벽이 모두 다 이 풍경 안에 담겨있으니 숨은 그림 찾기 하는 마음으로 풍경을 둘러보았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전체적인 전망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머물었던 2층 숙소에서 가깝게 바라다 보이는 동그란 산들과 붉은 흙길이 더 아름다웠다. 비냘레스 주민들은 늘 집 앞 발코니에 의자를 내놓고 시원한 차림으로 흔들의자에 앉아 집 앞에 펼쳐진 풍광의 내다보곤 했는데, 부산스레 전망대다 뭐다 돌아다니지 않아도 그렇게 느긋하게 대자연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즐기는 그들의 모습이 부럽고 참 보기 좋았다.
투어를 마치고 읍내로 돌아왔다. 길가의 작은 식당에서 파는 피자와 코코넛으로 점심을 때우고 여행자 거리에서 파는 공예품들을 구경하고 숙소로 돌아오니 오후 세 시가 되었다. 내가 숙소에서 밀린 빨래와 짐 정리를 하는 사이에 형주는 동네 개, 고양이들과 놀았고, 오빠와 함께 나갔던 제나는 동네의 또래 아이들과 친구가 돼서 한참을 놀다가 땀범벅이 돼서 들어왔다. 친구들이 불러서 다시 나갔다가 들어온 제나는 내게 보여줄 것이 있다며 연두색 도마뱀을 거꾸로 잡아들고 들어왔다. 집에 데려갈 수 없으니 이제 놓아주자고 하니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창 밖에 도마뱀을 놓아줬다. 제가 놓아준 도마뱀이 꼬리를 끊고 도망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아이의 얼굴에 장난기가 잔뜩 배어있다. 쿠바의 시골마을에서도 이렇게 잘 지내는 걸 보니 우리 아이들은 이제 세상 어디에 데려다 놔도 문제없이 잘 살 수 있겠구나 싶다.
내일이면 우리는 비냘레스를 떠나 뜨리니다드로 간다.
저녁을 먹고 시원한 저녁 공기를 맞으러 광장으로 나갔다. 높은 건물이 없는 시골마을의 광장에서는 하늘이 붉게 물드는 고즈넉한 풍경이 막힘없이 펼쳐진다. 아이들과 광장 구석에 앉아 시골마을의 풍경을 지켜보고 있자니 광장 한가운데에 대형 스피커가 세팅되고 쿠바의 살사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형주는 콜롬비아 깔리에서 배운 살사 스텝을 밟자며 내 손과 제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몸을 흔들기 시작했고 제나는 엉망진창 춤을 추며 까르르 웃어댔다.
아이들이 함께여서 비냘레스의 밤이 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