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oin Jan 09. 2019

독일 생활에서 만난 예상치 못한 복병


누구에게나 마음속에 품어둔 꿈의 도시가 하나쯤 있다고 믿는다. 빨간 2층 버스와 런던아이만 떠올려도 가슴이 뛴다는 친구가 있었는가 하면, 캘리포니아의 햇살과 여유로움을 찬양하던 친구도 있었다. 굳이 따져보면 나에게는 '원픽'이라고 할 만한 도시가 없었다. 이국적인 유럽과 대도시가 좋았고 유학지로 추려보던 영국, 네덜란드, 독일을 비교해보면 내가 원하는 도시 모습이 비슷해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최종적으로 독일을 선택했고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시작한 불안정한 외국인으로서의 삶은 백 프로 내 의지였다. 관두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회사 생활이 힘들다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어떤 근사한 것이 독일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도 않았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선택한 독일 생활이었기에 크고 작은 굴곡을 마주했을 때도 입 밖으로 불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마음이 괴로워 친한 친구들에게 종종 찡찡거린 적은 있어도 그 때문에 독일 생활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목표는 '내 힘으로 가볼 수 있는 곳까지 가 보기'였고 타의에 의해 밀려나듯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 생각했다. '취업비자가 발급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돌아오기' 라던가 '석사학위를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오기'는 내 옵션에는 없는 말이었다.


그렇게 촘촘하게 계획하고 생활을 꾸려나가고 있다 생각했지만 복병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지긋지긋한 날씨


살아보기 전에는 몰랐다. 이 나라 날씨는 영국과 비교해도 어느 하나 나은 구석이 없구나, 하는 것을. 유일하게 존재하는 난방기구인 라디에이터로는 한겨울 뼈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서울에 비하면 독일 겨울의 평균기온은 오히려 높지만, 추위의 강도가 달랐다. 영하 5도 정도 되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사람이 길을 걸어 다닐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추웠다. 한국에서도 유독 추위를 많이 타서 사시나무라고 친구들이 부르기도 했지만 말이다.


첫 인턴생활을 했던 그 해 프랑크푸르트의 겨울은 이례적인 폭설을 기록했다. 지독히도 추웠지만 호기심 많고 어렸던 (몹시 젊었던) 그 시절에는 모든 게 괜찮았다. 추위를 뚫고 눈길을 헤치고 돌아다닌 적도 많았다.


하지만 어렴풋한 그때의 기억만 안고 다시 시작한 베를린의 겨울은 상상초월이었다. 라디에이터를 켜면 너무 건조했고 끄면 금방 한기가 돌았다. 이상하게 독일 난방기구는 대부분 창문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어서 실제로 침대까지 그 온기가 전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대다수 한국인들은 전기장판이나 하다못해 전기방석이라도 가져오는데 화재나 전기세 걱정 등으로 오랜 시간 이용할 수도 없다. 독일에서 선풍기 하나 없이 여름을 견뎠던 나는 (건조해서 견딜만했다) 당연히 전기장판 없이 모든 겨울을 보냈다.




독일 내에서도 북부지방의 날씨가 유독 좋지 않다. 겨울에는 하루 평균 두 시간 정도 해가 뜬다고 되어 있지만 두 시간은커녕 일주일 내내 햇살 한 점 없던 날들도 많았다. 아침 수업을 들으려 나가면 아직 바깥은 어둡고 저녁 세미나라도 듣고 오면 해는 애초에 지고 없다.


한국에서 나는 흐리고 비 오는 날을 싫어하지 않았고 어떤 때는 좋아하기까지 했었는데 독일 와서 그 생각이 싹 바뀌었다. 일주일 내내 해 한 번 못 보다가 잠깐 몇 시간만이라도 해가 뜨면 신나게 페달을 굴려 공원으로 갔다. 그런 날은 회사 동료들도 조금 '일찍' 퇴근하기도 한다. 날이 좋아해 좀 즐기고 나머지 일은 그 후에 하겠다고 4시 5시에 퇴근하다니. 회사에서 경고받아 마땅할 일이라 생각했는데 독일회사에서는 가능한 일이었다. 탄력근무제가 오랜 시간 시행됐고 또 그만큼 햇살이 귀한 나라다. 독일에서 오래 산 사람들은 필히 비타민D 수치를 확인해봐야 한다. 영양제 잘 챙겨 먹지 않던 나도 최소 비타민D는 챙겨 먹으려 노력했다.




석회수, 이건 정말 예상치 못했다


날씨만큼 내 독일 생활을 괴롭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석회수였다. 칼슘 이온과 마그네슘 이온이 포함된 물이 석회수인제 유럽 대다수 지역의 물은 석회수라고 보면 된다. 영국과 독일은 석회가 물에 많이 포함되어 있고, 상대적으로 이탈리아나 스페인 같은 남부 유럽 지역의 물은 그 정도가 덜하다고 느꼈다.


독일인들은 이 물이 건강하다고 생각해 수돗물을 생수로 쓰기도 하고, 레스토랑에서 요리에 쓰이는 물도 필터에 거르지 않은 석회수다. 심지어 베를린이나 뮌헨 지역의 수돗물은 슈퍼에서 파는 생수보다 더 안전하고 까끗하다고 한다.


하지만 석회 때문에 화장실, 욕실, 주방기구 등을 청소하는 특수한 세제가 존재한다는 사실. 욕실의 샤워부스는 정기적으로 이 세제를 이용해 닦지 않으면 석회가 뿌옇게 끼여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전기포트나 커피머신도 마찬가지다. 설거지를 하고 난 후 싱크대에 다시 돌아가 보면 석회 때문에 군데군데 얼룩진 모습을 볼 수 있다.


석회수를 거르는 필터부터 욕실, 주방에 남아있는 석회수 제거전용 세제들의 종류가 다양하다 (출처: 구글검색)



영어로는 hard water라고 하는데 그만큼 이 물은 부드럽지 않고 거칠다. 독일에서 조금만 살아봐도 한국의 물이 얼마나 부드럽고 깨끗한지 알게 된다.


나는 얼굴에 여드름이 잘 나지 않는 체질인데 석회수에 적응되지 않았던 초반에는 얼굴에 정말 큰 뾰루지들이 났었다. 또 이 물로 씻고 나면 어찌나 건조했는지. 핸드크림과 바디로션을 꼼꼼하게 발라도 건조함이 가시질 않았다. 아무 브랜드나 상관없이 발랐었는데 얼마 지난 후부터는 값을 더 지불하더라도 무조건 '기능' '보습'에 충실한 제품을 구입했다. 독일 핸드크림과 화장품이 괜히 유명한 게 아니다.


가장 견딜 수 없었던 것은 바스러질 것 같은 머릿결이었다. 거친 물에 매일 샤워를 하다 보면 머릿결도 거칠어지고 머리카락도 많이 빠진다. 다시 한국에 돌아온 지 두 달이 다되어 가는 지금. 그때 빠졌던 머리가 다시 자라나서 잔머리 천국이다. 나는 탈모와 석회수가 분명 관계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유럽의 탈모 인구가 많은 것도 다 이 석회수 때문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물론 석회수와 깜깜한 날씨 때문에 한국에 돌아왔다 할 수는 없지만 이 한 끝 차이가 생활의 질을 얼마나 크게 좌우할 수 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다시 돌아온 한국에서 쨍쨍한 날씨와 깨끗한 물을 마음껏 누리고 있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들어야만 하는 길가 상점들의 음악소리가 예상치 못하게 가끔 나를 괴롭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독일 장기체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1) 날씨를 포기하고 2) 정수기와 연수기 필터를 꼭 마련할 것을 권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