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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시내 Feb 07. 2024

운수 좋은 날 (2)

프롤로그


  너무 간편하고 간단해서 헛웃음이 났다.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전화 한 통 없이 메시지 몇 번 주고받은 것만으로 나는 정신과 환자가 되어 있었다. '그럼 그때 뵙겠습니다.^^'라는 친절한 멘트를 끝으로 진료 예약을 마치고 나니 몸에 이상한 꼬리표가 달랑거리며 나를 비웃고 있는 것 같았다. 힘들어서 죽을 것 같아도 그렇게나 잘 살고 싶었던 세상이 마치 한 번도 내 것인 적 없었다는 듯 완전히 등 돌린 기분.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어떻게 했어야 아프지 않을 수 있었을까,에까지 생각이 미치자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별의별 생각이 들며 머리에 쥐가 나는 듯 해 한동안 더 벤치에 앉아있어야 했지만, 아무튼 중요한 건 나는 이제부터 정신과에 다녀야 한다는 사실이었고 모든 궁금증은 의사가 알려줄 것이었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에 자꾸만 흐려지는 정신을 정말 겨우 붙잡고 찾은 병원은 깔끔한 인테리어에 좋은 향을 풍겼다. 유명 화가들의 그림이 벽마다 걸려있었고, 의사의 이력은 그림만큼이나 화려했다. 나고 자라는 동안 운 좋게도 병원 갈 일이 없어 약 냄새만 맡아도 긴장하곤 하는데 장소가 장소인지라 빠르게 뛰는 심장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이름을 묻는 간호사의 목소리조차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다.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진료실에 앉아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면 좋을지, 마치 면접을 앞둔 사람처럼 미리 생각하려 했지만 생각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게다가 진료 전에 해야 할 검사가 많아 결국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의사 앞에 앉았다. 문을 열기 직전. 돈도, 시간도 아까우니 제발 울지만 말자고 거듭 다짐했던 게 기억난다.


좋은 인상만큼 목소리도 인자한 의사였다. 나지막이 들려온 앉으라는 말에 홀린 듯 의자에 앉았고, 첫 번째 질문을 받았다.


"여기 왜 오셨어요?"


이렇게 바로... 본격적이라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힘들어서요..."라고 속삭였더니 뭐가 그렇게 힘드냐는 물음이 돌아왔다. 답답했다. 아니, 그러니까. 그러게요. 난 대체 뭐가 이렇게 힘든 거지. 뭐라도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갔다. 


"아무것도 사랑할 수가 없어요..."


'갑자기? 이거 맞아?' 내가 말해놓고도 너무 갑작스러워 당황스러웠다. 쏟아지는 업무나 피로함, 뺀질거리는 동료와 매일을 신박하고 끔찍하게 괴롭히는 상사가 아니라 사랑할 수 없는 게 가장 힘들다고? 그런데 말하고 나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그게 맞는 것 같았다. 그렇게나 좋아하던 음악, 책, 그림, 영화 뭐 하나 즐거운 게 하나도 없었다. 잘 생각해 보니 살면서 맞닥뜨린 위기의 순간마다 나를 지켜줬던 아름다운 것들은 놀랍게도 더 이상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곁에 머물렀는지도 모르게 잊어버린 게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이러려고 그 오랜 시간 세상 곳곳을 여행하며 사랑했던 게 아니었는데. 없이는 못 살 것 같던 음악마저 소음으로 느껴졌던 건 언제부터였을까. 


어떤 감흥이나 감정조차 피곤해 멀리했던 것 같다. 엉킨 생각을 풀어내고 신선한 문장을 얻어오곤 했던 미술관과 공연장에 발걸음을 끊은 지도 오래였고. 스트레스가 쌓일 땐 부러 슬픈 영화를 보며 펑펑 울어 털어버리곤 했는데 그럴 체력도 남아있지 않았다. 소위 '덕후'로 이름깨나 날렸던 예전의 모습이 전생처럼 아득했다. 밤낮으로 쌓던 커리어도 더 이상 동기부여가 되지 못했다. 아무런 의욕도 여력도 없는 상태. 너무 뜨거웠던 탓일까. 다 타버리고 재만 남아 이렇게 가다간 바람 몇 가락에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삼키고 삼켰으나 소화하지 못한 지난날을, 아무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던 이야기를 오래도록 게워냈다. 오랜 상담 끝에 불안장애,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진단받았다. 그것도 아주 심각한. 우울과 스트레스에서 비롯된 손상은 신경은 물론 뇌에도 영향을 끼쳐 이대로 가다간 지능이 반토막 날 수도, 글 쓰는 일도 점점 어려워질 거라고 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우울하고 아픈 것까진 그렇다 하더라도 글까지 못 쓰게 될 건 없지 않나. 언젠가 퇴사를 하게 되면 꼭 내 이름으로 된 책을 쓰겠노라는 열망이 매일을 버티게 해주는 보험 같은 존재였단 말이다.

 

  감당하기 벅찬 진실을 일시불로 받아내고는 멍한 정신으로 병원을 빠져나왔다. 뱀처럼 미끌거리는 약봉지가 길게 늘여져 가방 안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아름답고 선한 것들, 빛나는 것들, 사랑했으나 사랑할 수 없게 된 모든 것들을 뒤로한 죄로 네모나고 길쭉한 몇 알의 약에 기대어 살게 된 거다. 누가 볼 새라 가방을 여미고 나니 참을 수 없이 외로워졌다. 여름이 한창이었으나 몸 곳곳이 서늘했다. 누구 하나 원치 않는 사실일 테지만 내가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누구 하나라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에 참지 못 하고 친구 L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음 깊이 모난 곳까지 다 내보였지만 오래도록 가까이 머물러준 친구였으므로 외면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한편으론 그렇게나 소중한 이에게 다짜고짜 불행을 전하는 게 얼마나 폭력적인가 싶어 차라리 전화를 받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동시에 일었다. 


몇 번의 수화음이 반복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미안한데 정작 끊지는 못 하고 아무 말 없이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진정되길 기다려준 그녀에게 그간의 일을 털어놓았다. 이만하면 되었다,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가 지금 당장 사라져도 한 명은 알아줄 테니 다행이라는 이기적인 생각이 들 때즈음 수화기 너머에서 장하다는 말이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도 그날의 통화를 녹음해두지 못한 걸 후회할 만큼 따뜻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장담하는데 내가 아는 너 어디 안 갔어. 아직 거기 있어. 그러니까 절대로 걱정하지 마."


  그날 이후 퇴사를 결심하고 병원에 다니며 완전한 휴식에 돌입했다. 조금씩 안정을 되찾았고 일상을 회복해 나갔다. 그러는 동안 친구가 남긴 마지막 말은 머릿속에 부표처럼 떠올라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네가 아는 나는 누구일까. 너는 무엇을 기억하고, 나는 무얼 잊어버린 걸까.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래서 처음으로 돌아가보기로 했다. 나를 좀 돌아보고, 들여다봐주기로 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 쓸 수도 있는 이야기를 남겨보기로 마음먹었다.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운이 좋았다. 이르게 나타나준 증상과, 서둘러 병원을 찾은 결심 덕에 나는 충분히 괜찮아질 수 있었다. 자기 계발이 아니라 '자기 발견'을 위한 여정은 운수가 더럽게도 좋았던 어느 날, 그렇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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