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이런저런 개인적 욕구가 있다.
이를테면 밥 먹을 때 핸드폰으로 보고 싶은 드라마나 영화를 켜 놓고 먹으면서 보기.
고된 일과를 마치고 늦은 저녁, 쟁반에 과자를 담아 침대로 올라가 한껏 몸을 기대어 쟁반은 이불 위에 대충 올려놓고 시선은 역시 핸드폰 속 예능이나 영화에 고정한 채 눈도 입도 즐거운 세상 가장 늘어짐을 만끽해 보기.
밥 먹고 양치까지 했지만 삼복더위를 못 이기는 에어컨 바람이 아쉬워 갈증이 느껴질 땐 냉장고 속 시원한 맥주를 한 캔 꺼내와 타악-하고 따서 벌컥벌컥 들이켜기. 아, 이땐 부엌 상부장 안의 과자가 다시 한번 나올 수 있다.
나열해 보니 죄다 뭘 보면서 먹고 마시고 늘어지는 것인데 뭐, 이것이 쳇바퀴 같은 삶을 열심히 달리는 현대인에게 있어 가장 접근성이 쉽고 빠른 충전법 아니겠나.
그렇지만 이게 전부인 것은 아니다.
하루 중 어느 때든 글을 쓰고 싶어지면 하고 있던 일이 무엇이었든 다 내려놓고 노트북을 가져와 펼쳐 마구 타이핑해 보기.
불 꺼진 방에 자려고 누웠는데 글감이 떠올랐을 때 머리맡의 핸드폰을 켜 메모장에 기록해 두기.
잠자리에 누워 요즘 듣고 있는 감미로운 노래 하나를 틀어놓고 머릿속 붕붕 떠다니는 상념과 고민들을 축축한 멜로디로 가라앉히며 스르륵 잠에 들기.
사실 나열하자면 또 끝이 없는 것이 인간의 욕구이긴 하나 그만큼 우린 이런저런 소소한 욕구들을 느끼고 적절히 해소해 가며 희미하게나마 만족이라는 내적 충전지가 완전히 방전되지 않도록 관리하며 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아이를 키우고 있고 그 아이가 방학중이고 마침 다니는 학원도 주에 한 두 개뿐이라 그 외의 시간은 엄마와 함께 해야 한다면 그 엄마에게 있어 만족이라는 충전지는 방전이 되고 만다.
왜일까?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먼저 밥 먹으면서 드라마 보기.
아이와 함께 하는 식사 시간에 떡하니 드라마를 틀어 놓는다는 것은 그간 해 오고 있고 앞으로도 쭉 해야 할 아이의 식사 시간 미디어 지도에 치명적 결함을 남기는 것이다.
어쩌다 한 번 볼 수도 있지 않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초등1학년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다 한 번의 예외성이 아니라 일관성이다. 엄마의 흐트러짐 없는 일관성이 아이의 좋은 습관 하나를 겨우 형성할까 말 까다.
아이와의 식사 시간인데 도란도란 대화를 할 생각을 해야지 드라마를 보고 싶냐고?
보고 싶다. 방학은 28일, 아점을 포함 하루 두 끼를 제공해야 하므로 28 곱하기 2는 56이다.
아이와 56번의 식사를 같이 하는데 과연 누가 56번의 식사 내내 근황 토크 또는 교훈과 가르침이 있는 유익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10번쯤 먹고 나면 아이도 눈 내리깔고 밥그릇에 코 박고 밥만 먹는다.
식사 이외에도 모든 시간을 함께 하는 엄마와의 식사시간에 많은 의미를 담아내려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하루의 치열한 업무를 끝내고 퇴근해 집으로 와서 먹고 싶은 배달 음식을 시켜 놓고 뭘 볼까 고르는 그 시간이 주는 폭발적인 행복감. 말하지 않아도 모두 느낄 것이다. 그 행복감은 방학중인 아이와 붙어사는 엄마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다음으로 양치 후 맥주와 과자 먹기.
저녁 양치 시간, 아이들에게 양치 교육을 시키는 중이라 이때 나도 함께 양치를 한다. 잠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9시부터 잘 준비를 시작해도 아이들은 대부분 10시를 훌쩍 넘겨 잠에 든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잘 준비를 시작하고 잠에 들기까지의 한 시간 사이에 나의 맥주 욕구가 발동된다는 것이다. 이걸 참지 못하고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내보았더니 아이들은 신이 나서 자기도 뭔가를 먹겠다며 부엌 찬장을 열어 기어이 과자를 꺼내온다. "너네 양치 또 해야 되잖아!"라는 나의 외침은 "엄마도 양치했는데 먹잖아!"라는 반박할 수 없는 논리 앞에 허공으로 부서져간다.
'근데 나는 스스로 양치하는데 니들은 내가 해줘야 되잖아..'
잔뜩 먹고 떠난 자리의 무수한 과자 가루들은 보너스, 하루가 새로 시작된 냥 장난감 서랍에서 변신 로봇들을 죄다 꺼내와 우주월드세계관 속으로 빠진 아이들을 현실로 돌려놓는 것까지 빽빽한 잔업이 추가되었다.
한 여름밤, 먹고 싶을 때 바로 꺼내 마시는 맥주 한 캔. 엄마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역시 자는 시간,
불 꺼진 방에 누워 계속 꼼지락 거리는 아이들을 무거운 음성으로 눌러놓고 함께 누워 눈을 지그시 감고 자는 척에 들어가는데 갑자기 너무나 쓰고 싶은 글감이 떠오른다. 아, 이걸 놓치면 안 되는데 하고 핸드폰 화면을 켰더니 깜깜한 방에 선명히 새어 나오는 불빛을 향해 아이들의 동그란 얼굴 두 개가 순식간에 붙어 화면을 가려댄다.
"엄마 뭐야? 뭐 해?" "힝, 나도 핸드폰 사고 싶다"
오금이 저려오는 아득함에 급히 화면을 끄고 핸드폰을 저 멀리 치운다. 글감은 무슨. 나 때문에 애가 핸드폰이 사고 싶단다. 어떻게든 늦게 사주려고 아이 속에 도사리고 있는 핸드폰에 대한 욕망을 다른 재미난 것들로 눌러오고 있는 중인데 그걸 내가 불 지피는 형국이라니.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글감 잡아두기. 늦게 자는 아이들을 둔 엄마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그날도 나는 아이들보다 먼저 뻗었다. 글감 날아가 코딱지만큼도 생각 안나는 다음날의 허망한 아침은 덤이다.
내가 아이를 가졌을 때 가장 먼저 다진 결심은 아이와 나를 한 몸처럼 여기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내게서 태어났지만 개별적인 인격체이므로 자라면서 시기에 맞는 독립심을 길러주고 종국엔 스스로 살아갈 줄 아는 한 사람으로 자라도록 돕겠다고 결심했더랬다.
그러려면 필요한 것이 나는 나대로, 아이는 아이대로라는 큰 틀이었다.
이 틀 안에서 나는 조력자로, 아이는 자신의 삶의 주체자로 한 집에서 지내야 한다.
그러나 이런 틀 안에서도 배제되어선 안될 것이 바로 생활 습관과 교육이었다.
부모의 모든 행동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아이 앞에서 나는 내 욕구를 그 즉시 해소해서는 안되었다.
아이의 건강과 균형 잡힌 생활 습관, 교육을 위해서 나는 아이와 한 몸처럼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이가 밥을 먹을 땐 굳이 배가 고프지 않아도 곁에서 함께 먹으며 낯선 식재료도 한 번쯤 권해보고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식사 예절도 먼저 본을 보이며 가르쳐야 했다.
아이가 공부를 할 때에는 방에 누워 핸드폰만 만지작 거리고 싶더라도 근거리에 위치해 책 한 권을 들고서라도 핸드폰이 아닌 다른 것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러면서 아이가 모르는 것을 물어오면 아이의 수준으로 나를 끌어 내려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함께 문제를 들여다보고 풀어가야 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속상한 일을 겪었다고 이야기해 주면 나는 무진장 애를 써 아이의 마음과 내 마음을 일치시켜야 했으며 아이가 느낀 것을 오롯이 느껴야 했다.
그렇게 해야만 질책 대신 공감을, 타박 대신 다독임을 건넬 수 있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든다. 감정과 에너지도 많이 소모된다.
사람은 자신의 시간, 감정, 에너지를 쏟는 곳에 사랑과 애착도 함께 쏟는다.
그것이 일이든 사람이든 구분 없이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많은 경우 애착을 갖게 되면 나와 애착 대상 간의 바람직했던 균형의 저울은 이내 기울어지고 만다.
하물며 사람이라면 흔히 느끼는 소소한 욕구들도 잠재워가며 아이의 사람됨에 자신을 쏟아부은 엄마는 아이를 교육하되 자신의 삶의 주체자로 두어야 한다는 고난도의 외줄 타기 위에서 균형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렵겠는가.
나와 너의 경계가 이때 허물어지는 것이다.
어린아이와 한 몸처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갔던 엄마는 어느새 아이의 마음뿐 아니라 아이의 삶 곳곳에 자신을 조각내 녹여내고 만다. 아이가 느끼는 슬픔이나 경험해야 하는 실패가 점점 버거워지고 할 수만 있다면 대신 다 가져오고 싶어 진다. 아이의 감정을 공감하기 위해 수시로 맞췄던 마음의 높이는 조금씩 자라는 아이의 마음과 달리 제자리로 돌아올 줄 모르고 아이가 앞으로 직면해야 할 세상이 갑자기 무시무시해지면서 뭔가 단단한 대비책을 세워 아이를 지키지 않으면 이 연약한 마음이 버텨내지 못할 거라는 걱정에 휩싸인다.
이미 많은 매체를 통해 우리는 부모가 자신과 아이를 일체화시켜 아이를 위한 선택이라는 명목하에 자신의 꿈을 이루려 하거나 자신의 뜻대로 아이의 삶을 결정하려 할 때 어떤 비극을 맞게 되는지 지겹도록 보아 왔다.
또는 자신의 삶은 다 집어던진 채 오로지 아이를 위해서 모든 일과를 맞추어 살아온 엄마가 후에 느끼는 공허함과 외로움도 우리에겐 익숙한 소재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의 삶에 자신을 투영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엄마에 대해 쉽게 비판하고 판단하곤 한다.
하지만 내가 아이를 키우며 배운 것은 누구라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거다.
내가 부모가 아니고, 그 대상이 자녀가 아닌 것일 뿐 내가 마음을 쏟는 곳에 내가 있는 것 아니겠나.
모든 엄마가 처음부터 아이의 삶에 자신을 완전히 겹치려고 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처음엔 그저 당당한 한 사람으로 일어서도록 필요한 것들을 가르치는 것일 뿐이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시간을, 일상을, 감정과 에너지를 차례로 쏟다 보니 자기 자신마저 쏟아져 아이의 삶 속으로 엎어져 버린 것일지 모르겠다.
소소한 욕구와 해소에 따른 소소한 만족이 없는, 다 닳아버린 내적 충전지를 품은 엄마에게 어떤 비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균형감을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아닐까.
내 안의 내적 충전지는 대부분 방전 상태다. 아이가 사회에서 1인분의 역할을 해내는 사람으로 자라나게 하기 위해 앞으로 몇 년간은 하고 싶은 것(별 것도 아닌 것)을 하면 안 되는 삶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이의 삶에 내 삶을 다 겹치지 않도록 계속 스스로를 살피고 관리해야 하겠지만 이것이 고통스럽지만은 않은 이유는 그 시간 동안 아이가 자신만의 색을 입으며 자라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가 제 손에 붓을 들고 삶이라는 도화지에 다채롭고 입체적이고 때론 생각지 못한 의외의 조합으로 새로운 색을 창조해 그려내는 것을 보는 일은 분명 즐거움과 기쁨이다.
물론 그런 기쁨이 내 속에 웅크리고 있는 먹고 마시고 퍼지고자 하는 욕구들을 상쇄시키는 것은 아니므로,
'욕구불만 조력자'
개학날까지 나의 부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