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3. 둘째 날 오후
모든 일정이 다 중요하긴 한데, 오늘은 단연코 가장 중요한 곳을 가는 날이었다. 바로 내 모교, SVA를 방문하는 날.
막상 ‘모교’라는 단어를 적고 나니 어딘지 모르게 생경하다. 동아리 MT나 동기 모임, 선배가 쏘는 술자리처럼 끈끈한 ‘정’으로 뭉친 집단 활동이 전무했기 때문일까? 졸업 앨범을 촬영하는 방식조차도 한국과는 많이 달랐다. 학교 게시판에 붙은 포스터 몇 장으로 언제 어디서 찍는지를 조용히 알리더니, 촬영 당일에도 처음 보는 사진학과 학생이 과제에 찌들어 무표정한 내 얼굴과 옷차림 그대로 툭툭 몇 장 찍는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사진들은 그들의 포트폴리오로 쓰였으니 그야말로 미국스럽다)
대학 생활의 낭만을 논할 공간도 부족했다. 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뉴욕 미드타운에서 푸른 잔디밭이 펼쳐진 너른 캠퍼스 같은 것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교라고 해 봤자 시내 곳곳에 흩어져 있는, 네모난 방들로 빼곡히 채워진 건물 몇 채가 전부다 보니 '대학 생활' 하면 흔히들 떠올리는 가슴 설레는 추억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꿈에 나오는 그 장소를 아빠랑 다시 가보고 싶었다. 수돗물로 배를 채우며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던 고학생이 큰 성공을 거둔 후 정든 교정을 다시 찾아가서 ‘여기가 바로 제가 공부하던 곳이에요’라며 자랑스럽게 인터뷰하는 것과 비슷한 심정이랄까? 비록 큰 성공은 아직 못 했지만서도, 고달픈 기억의 파도가 넘실대는 방에 아끼는 피사체가 문을 열고 등장하는 순간, 모든 것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치유되는 경험을 한 번쯤은 해 보고픈 것이다.
그전에, 배고픈 아빠를 모시고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 있으니 그 유명한 Shake Shack이다. 세계 최고의 햄버거 맛집 중 하나가 학교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Madison Square Park에 있다. 2달러짜리 베이글로 끼니를 때우다가 정말 힘든 날, 위로가 필요한 날, 나에게 주는 보상이 간절한 날 큰 맘먹고 찾던 곳이다.
난생처음 Shack Burger 한 입을 베어 물었던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코를 찌르는 미국 빠다냄새, 입안을 가득 적시던 앵거스 비프의 육즙, 진득하게 혓바닥으로 눌어붙던 치즈, 혀가 마비될 정도로 달달한 밀크셰이크까지..! 그 순간만큼은 '맛있는 음식'에만 온 신경을 집중할 수 있어 행복했다. Shake Shack은 어둠 속에서 밝게 비추는 한 줄기 빛,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았던 나만의 보물섬이자 아지트였다.
그때의 감동이 여전하기를 바라며, 떨리는 마음으로 줄을 섰다. 매장 바로 앞에서 사람들을 안내하는 직원이 흥겹게 몸을 흔들며 농담을 던진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뉴욕에서 일하는 종업원들만이 가진 특유의 유쾌함이 있다. ‘내가 원해서 하는 일이야. 난 즐거워!’라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만 같다. 뉴욕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신날 수 있지. 암, 그렇고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내 차례가 됐다. 내심 어떤 농을 걸어올까 기대했는데, 나를 흘깃 쳐다보더니 아무 말도 건네지 않는다. 그래. 내가 영어를 한마디도 하지 못하는 동양인 관광객인 줄 알았겠지. 괜히 말 걸어봤자 알아듣지도 못하면 괜히 민망할까 봐, 나를 배려한 거야. 애써 좋게 생각하려 해도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불현듯 9년 전에 짐을 싸며 들었던 생각이 밀물처럼 몰려온다. 난 뭘 해도 여기서 ‘인싸’가 될 수 없어. 설령 내가 아무리 젊고 아름답고 유능하고 영어를 원어민처럼 할지라도! (그렇지도 않지만)
Shack Burger 두 개와 Cheese Fries를 앞에 놓고, 이것들이 얼마나 많은 순간 나를 좌절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렸는지에 대해 일장 연설을 마친 후 설레는 마음으로 한 입 베어 물었는데..! 이럴 수가. 황당하리만치 맛이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예전의 감동이 느껴지지 않는다. 옛날에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맛있었는데. 햄버거 맛이 변한 것 같지는 않고, 내 입맛이 변한 것 같다.
이걸 처음 맛봤던 때가 2007년이니까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이네. 다행히도 뉴욕을 떠나 있는 동안 맛있는 음식을 잘 찾아 먹었나 보다. 이제 웬만한 사건에는 놀라지도 않는 내 심장처럼 혀에 달린 미각 세포도 무뎌진 것이리라. 서글펐다. 안팎으로 순수했던 과거의 내가 그리워서, 두 번 다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이 와중에 아빠는 화장실에 가셨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화장실이 돈을 먹었다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돌아오셨다. 어쩔 수 없이 남은 햄버거를 허겁지겁 입에 구겨 넣고, 조금 남은 음식은 봉투에 싸서 화장실로 향했다. 출입구 앞에 히피족 차림을 한 중년의 언니가 담배를 물고 삐딱하게 서있었다. 조금 무서워 보이는 첫인상과는 달리 친절하게 말을 걸어왔다.
"화장실 쓰려고? 사용법을 알려줄게. 여기 이 문 옆에 파란 불이 들어오면 쿼터 동전을 넣고 나서 안으로 들어가야 돼. 문이 열려있다고 해서 그냥 들어갔다간 곧 사방에서 솟구치는 물에 온몸이 젖게 되니까 조심하라고. 얼마 전에 내 남자 친구가 겪은 일을 말해주지. 글쎄 문이 닫히길래 바지를 반쯤 내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여기저기서 물줄기가 나오더래. 그대로 계속 갇혀 있다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고 나서야 간신히 탈출했어. 아주 낭패를 봤지 뭐야."
알고 보니 그 화장실은 사용자가 나간 뒤에 자동으로 내부를 세척하는 최첨단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는데, 아빠는 빨간 불이 켜져 있는 동안(=내부를 청소하는 동안) 동전을 넣는 바람에 화장실 문은 열리지 않았고 그대로 돈은 증발되어 버린 것이었다. 거 참 불친절한 화장실이로세. 누가 급해 죽겠는데 깨알같이 적힌 매뉴얼을 읽고 앉아 있겠어? 화장실마저도 까칠한 뉴요커 행세를 하는구먼.
잠시 후 히피족 언니의 남자 친구가 밖으로 나오자마자 아빠가 화장실로 들어갔고, 아빠를 기다리는 동안 그들과 몇 마디 더 나누었다. 그들은 미국이 국방비로 너무 많은 돈을 쓰는 것이 불만이라면서, 트럼프가 멍청하게 나라를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참고로 그들은 코카시안이었다) 나는 다 이해한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그래도 국방비를 많이 쓰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아. '우리(Us)'를 안전하게 지켜주니까.’라고 했는데, 오 이런.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나'는 미국인이 아니기에, '그들'에게 속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바로 ‘South Korean’을 뜻하고 말았던 것이다. Us가 아닌 You guys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들은 멋쩍게 웃으며, ‘뭐, 그래. 미군이 너희를 북한의 김정은으로부터 잘 지켜주긴 하지.’라고 대꾸했고 내 얼굴은 달아올랐다. 졸지에 분단국가이자 강대국의 보호를 받는 약소국 국민을 자처한 꼴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나 원 참. 이래서 번역 회로 돌릴 때 조심해야 한다니까. 방심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으며 무심코 하늘을 보았는데, 어라? 누런 빌딩 사이에 쌍무지개가 떠 있었다.
민망함을 포장하기 위해 ‘무지개야! 나 뉴욕에서 무지개 처음 봐! 게다가 쌍무지개라니!’라고 호들갑스럽게 외치며 사진을 찍었고, 그들도 오늘 너는 복권을 사야 한다면서 사진을 찍어댔다. (당시 우리나라 뉴스에도 나올 만큼 파워볼 복권에 어마어마한 당첨금이 모여있었다) 휴, 역시 이방인은 힘들어. 속으로 되뇌며 아빠와 함께 SVA로 향했다.
“대박! 아빠랑 SVA를 가는 날이 올 줄이야! 진짜 대박이야!”
"그러게. 네 엄마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이번에 여행을 준비하며 알게 된 사실. 그 당시 환율도 많이 오르고, 살림살이가 빠듯한 와중에 비행기표 값이 아까워서 부모님은 졸업식날 오지 않으셨단다. 내가 걱정할까 봐 그런 말씀을 안 하신 줄도 모르고 내심 서운함을 안고 살았었는데, 아쉬운 마음이 조금은 가시는 듯하다. 내 평생 아빠랑 여길 다시 오게 될 줄이야. 언젠가는 엄마랑도 올 날이 있겠지.
학교 앞에 도착하니,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은 한국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세상 모든 근심 걱정과 고난을 짊어진 얼굴들이다. 나는 저 표정이 뭔지 알지. 타지에서 겪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태생에 대한 설움과 천애고아가 된 것만 같은 외로움, 과제에 대한 부담과 괴로움, 그리고 어찌 됐든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는 자부심, 더 나아가 자만심까지 들기 마련이다. 타향살이를 하며 갖게 되는 과도하고 쓸모없는 감정 들일지도 모른다. 그저 살아있을 뿐인데,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어서 몸서리치는 날도 종종 있을 것이다.
사실은, 내가 그랬다. 그땐 정말이지 물거품이 되어 증발해 버리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떠나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기에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아픔이었다고. 오지랖 가득한 옆집 아줌마처럼 '나도 니들 마음 다 안다'고 속으로 외치며 아빠와 학교 정문에서 신나게 기념사진을 남긴 후, 마침내 이를 갈고 피눈물을 흘리며 다녔던 학교에 재입성했다.
학교 안 1층 로비에는 보안을 유지하는 가드가 상주한다. 나는 그들을 문지기라고 불렀는데, 이 문지기가 나와 아빠의 입장을 막을 것이 두려워 10년 전의 학생증을 간신히 찾아서 소중히 품에 안고 갔다. 학생증을 보여주며 자초지종을 설명하니 문지기는 의외로 쿨하게 우리를 들여보내 주었다.
“아빠! 여기가 바로 제가 스무 살 초반에 영혼을 갈아 넣은 곳이에요.”
"고생했다. 학교가 참 실용적이고 소박해 보인다."
아빠 덕분에 나도 뉴욕의 이미지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뉴욕은 소박한 곳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뭐가 없긴 하다. 썰렁한 흰색 벽면에 붙어있는 교내 행사 안내 포스터, 졸업 사진 촬영 안내문, 커다란 시간표…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게시판에 붙어있는 학생들의 과제작도, 한국어로 되어 있어서 ‘한국인 Only’를 대놓고 표방하는 각종 전단들까지.
연신 '대박'을 외치며 감격에 젖어 여기저기 배회하다가, 빈 강의실을 하나 찾아 들어갔다. 교수님 자리에 앉아 사진을 찍고, 아빠도 찍어드리며 신나게 과거로의 여행을 즐기다 보니 10년 전 이 공간에서 함께했던 교수님과 친구들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지금 다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그때의 우리는 눈을 빛내며 졸업 후 이루고 싶은 꿈들을 바삐 주워섬겼는데. 언제 또 오게 될까 싶어 눈에 담기는 모든 이미지를 카메라에 쓸어 넣고, 함께 하지 못한 엄마에게 사진을 왕창 보내드렸다.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미리 짜 둔 저녁 일정이 있었지만, 아빠 컨디션이 영 아니올시다라서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학창 시절 괜히 들르곤 했던 Second hand shop을 아쉽게 지나쳐서 유니온 스퀘어로 향하는데, 아빠가 지나는 길에 있던 Saving Bank의 건축 양식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저 건물은 고대 그리스 신전처럼 지어졌구나. 그리스의 3대 건축 양식이 있는데, 저게 뭐 같냐?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 양식이 있거든? 기둥 위에 잎사귀들이 있는 걸로 봐서 저건 코린트 양식인 것 같은데... 너도 다 학교에서 배웠지?"
아뇨. 즌혀 기억 안 나는디요. 이럴 때 보면 아빠는 걸어 다니는 미술 교과서 같다. 물론 미술 선생님으로 평생을 살았고 직업이 화가라지만, 누구나 아빠처럼 교과서 내용을 꿰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닌가? 글쎄, 디자이너라고 해서 전부 다 디자인론을 외우고 다니는 건 아니니까. 사업가가 전부 다 경영학을 줄줄 읊는 거 아니고, 정치인이 정치 외교학 다 아는 거 아니고, 그런 거지 뭐. 결론은 아빠는 대단하다고.
유니온스퀘어 역 근처에 다다르니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이 거리의 예술가들이 득실득실했다. 오늘은 부두 의식 같은 것을 거행하는 대학생 무리와 오페라 아리아를 기똥차게 불러 젖히는 남성 듀오, 재즈로 대동 단결한 친구들 등이 있었다.
이러한 자유로운 분위기와 길거리 예술 문화는 '즉시 한국으로 옮겨오고 싶은 뉴욕의 것들' 중 하나다. 일상 속에서 수준 높은 라이브 공연을 생생하게 즐길 수 있을뿐더러, 거리에 활력을 불어넣고, 지친 하루를 위로받기도 한다. 홍대 앞이나 일부 특정 지역을 제외하면 한국의 길거리는 다소 심심하게 느껴진다. 종종 ‘수요 예술 무대’ 등의 현수막을 붙여 놓은 것을 보곤 하는데, 작위적이라 그런지 선뜻 즐길 마음이 들질 않는다.
저 멀리 Whole Food가 눈에 들어왔다. 오전 수업이 끝난 후 오후 수업이 시작하기까지 잠깐의 여유가 있는 날이면 시간도 때우고 주린 배도 채울 겸 종종 들렀던 곳이다. 먹고 싶은 음식을 주섬주섬 담아 얼마나 나올까 마음 졸이며 계산한 뒤, 2층에 올라가서 사람들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한 끼를 해결하곤 했다.
그러고 보니 학생 때는 먹는 음식의 종류가 심히 단조로웠다. 베이글, 홀푸드 도시락, 맥도널드 스낵랩, 라면이 주식이었으니 말이다. 가끔은 학교 앞 중국 음식점에서 만두나 롤을 먹곤 했는데, 이나마도 나름 특식이었다. 식당에 들어가서 팁을 내고 정식으로 식사를 한 기억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일상 속에서 먹는 즐거움을 제대로 누리지 못해서였을까? 한 달에 한번, 아니 한 학기에 한 번만이라도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나를 위한 선물을 제대로 줬더라면 뉴욕에 더 머물렀을까? 뉴욕을 일찍 떠나온 것이 아쉬울 때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찾곤 한다.
숙소로 돌아오니 뭔가 아쉬웠다. 호텔 옥상에서 보는 야경이 근사하다는 평이 떠올라서, 피곤한 아빠를 졸라 위로 향했다. 그리 높지 않은 건물이라 우뚝 솟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전신이 동공에 꽉 찼다. 마치 출세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맨해튼 한복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한눈에 담을 수 있는 호텔에서 숙박이라니.. 아빠는 춥다며 먼저 방으로 내려가셨지만, 나는 바람과 추위에 꿋꿋이 맞서며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를 미드타운 중심지의 야경을 최대한 눈에 담았다.
방으로 내려오니 아빠는 주무시고 계셨는데, 나는 아직 잘 수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아빠의 습성(?) 때문에 꼭 사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아빠는 분명히 아침에 미숫가루만 한 컵만 간단히 드신다고 했는데, 잘못된 정보였으므로 아침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
둘째, 종합 비타민. 새삼 느낀 사실인데, 아빠의 나이가 꽤 많았다. 하긴, 73세면 할아버지라고 할 만한 연세인데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여행을 지속하려면 영양제가 필요해 보였다.
셋째, 간식. 아빠는 끼니를 드셔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고, 이 시간을 놓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기력이 쇠하고 속이 급격히 안 좋아져서 하루 일정을 망치게 되기 때문이다. 당뇨병을 악화시키지 않도록 설탕이 적고 달지 않은 간식이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국!! 뜨거운 국!!!! 여기는 미국이지만 아빠는 매 끼마다 뜨거운 국물을 찾으셨다!!!! 다행히도 호텔에 커피머신이 있어서 뜨거운 물을 받을 수 있으니, 여기에 타 먹을 국 가루와 국을 담을 보온병이 필요했다.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구할 수 있는 곳은 바로 한국인이 운영하는 한아름마트. 아빠를 보필하는 효녀 가이드답게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한인타운으로 휘적휘적 가서 필요한 물품들을 만족스럽게 구입했다.
하루가 몹시 길었지만, 아직도 잘 수가 없었다. 아빠의 식사시간이 정해져 있다 보니, 한국에서 짜 온 일정이 전부 틀어져서 여행 계획을 다시 짜야만 했다. 또 다른 변수는 화장실이다. 2시간에 한 번씩은 반드시 가셔야 하는 데다가 소변을 참는 것을 매우 힘들어하셔서 화장실 가는 시간과 장소도 미리 계산해 놔야 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인데, 엄청난 변수다. (결국 어설픈 완벽주의인 나는 아침 6시가 되어서야 잠을 잘 수 있었고, 다음날부터 너무 피곤한 나머지 최악의 컨디션으로 지내다가 결국 사고를 치고 만다)
온 지 둘째 날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러다간 내가 죽겠다 싶다. 그리고 아빠랑 다니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없다. 실시간으로 아빠를 챙기는 것과 동시에 다음 장소 탐색, 내일 갈 장소와 동선을 정하고 후기 검색 및 예약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해마를 비우기 위해 주기적으로 해 줘야 하는 인스타그램 짤방 보기, 네이버 웹툰 보기, 유튜브 보기는 물론이고 지나다가 보이는 예쁜 샵에도 전혀 들어가 볼 수가 없었다. (아빠는 쇼핑만 시작되면 모든 기력이 전신으로 빠져나가기 때문) 파타고니아라든지, 애플스토어라든지, 유명한 카페, 북스토어 등 가고 싶었던 곳들을 찾아갈 여유도 없다.
게다가 아빠는 계속 나에게 흥미로운 주제 거리가 생길 때마다, 지나가다가 재밌는 것을 보면, 또는 왕년의 아빠+아빠 친구들의 무용담이 떠오르면 신나게 말을 걸었다. 그 얘기가 정말 재밌고 충실하게 대꾸해 드리고 싶지만, '아빠! 저는 지금 우리가 다음에 갈 곳 검색 중이에요! 택시도 부르고 있고요! 죄송하지만 너무 정신이 없네요!'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또래가 아닌 70이 넘은 아빠와 하루 종일 대화를 나누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었고 재미가 없었다. 아빠 미안..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만 세대 차이는 극복할 수가 없네요..
친구이자 참모총장들이 모여있는 단톡 방에 하소연을 하니, 아빠랑 19박 내내 붙어 지내려면 간디나 테레사 수녀 이상의 어마어마한 인내심과 사랑이 필요할 것이며 너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빠 역시 맘과 몸이 편하시지 않을 것이니 현명하게 대처하라는 위로 섞인 조언을 해 주었다. 외국에 나가는 순간 부모님은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다고. 그러니 한국인 투어 등을 신청해서, 아빠만 듣게 해 드리고 나는 그 사이에 숨을 좀 돌리란다.
괜찮은 생각이다. 곧바로 실행하여 <마이 리얼 트립>에서 MoMA 한국인 투어를 찾아 오전 5시 37분에 예약을 완료했다. 아침에 아빠를 바래다 드리고 나서 Soho에 가야지. 물론 나도 함께 가고 싶지만, 예전에 많이 가 보기도 했고(물론 9년이 지난 지금 더 엄청난 작품들이 걸려있을 테지만) 내게는 당장 혼자만의 시간이 간절히 필요하다.
엄마에게도 카톡으로 하소연 폭탄을 쏟아부었다.
"아빠 아침 안 드신다며! 내 샌드위치랑 라면 다 먹어치우시잖아! 코는 왜 이렇게 고셔!? 밥을 하루에 세 번 딱딱딱 제시간에 드셔야 하는 거 알고 있었어!? 뜨거운 국물이 꼭 필요하다고 하셔서 보온병이랑 된장국 가루도 샀어! 그리고 화장실을 너무 자주 가시네;;? 먼 거리에 있는 관광지를 갈 수가 없는데 앞으로 어떡하지!?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고 거 참 앞으로 3주를 어찌 지내나.. 아휴 힘들어 힘들어! 지친다 지쳐 정말! 식사 시간이 이 정도로 중요하면 미리 말 좀 해주지!! 내 휴가가 이렇게 날아가는군.. 전혀 휴가 같지가 않네!! 난 아무것도 못해! 생각보다 더욱더 효도 관광이야! 지나면 아쉽고 후회도 남겠지만 왜 이렇게 힘들고 흥이 안 나는지 모르겠구먼!!"
모든 게 당황스럽고, 이렇게나 아빠를 몰랐나 싶다. 가장 가깝기 때문에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아는 게 하나도 없다. 생각해 보니, 어느 정도 크고 나서는 남자 친구와 밤새 통화하고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기 바빴지 아빠와 함께 외출하거나 10분 이상 길게 대화한 적도 없는 것 같다.
더 큰 문제는, 아빠도 아빠를 몰랐다는 것. 본인의 약해진 체력에 스스로 놀라신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만? 다 할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이럴 줄 알았으면 한국에서 몇 달 동안 밤새면서 하루에 스케줄 세 개씩 소화하는 일정으로 힘들게 계획을 짜지는 않았을 텐데. 억울한 건 둘째치고 실시간으로 계획을 변경하면서 여행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마음이 조급하다.
앞이 막막하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를 보내고 나니 내심 뿌듯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아빠에 대해 아주 조금 알겠다는 것. 한국에서는 굳이 말하지 않았을 일들도, 평생 몰랐을 사실들도 알아버렸다.
뉴욕 여행 이틀 차, 얼어붙은 30년의 세월에도 오늘 봤던 무지개가 뜨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