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3. 둘째 날 오전
어제를 망쳤으니 오늘은 완벽해야 하건만, 이건 뭐 시작부터가 혼돈의 카오스다. 먼저, 아빠는 분명히 아침에 소량의 미숫가루밖에 못 드신다고 했다. 원체 장이 안 좋아서 이른 시간에 뭘 먹으면 속이 부대끼는지라 오전에는 늘 굶주린 채로 평생을 살아왔다고 서글픈 표정으로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아침밥은 안 챙겨도 되니 그나마 다행이라며 따뜻한 미소와 함께 내 어깨를 두드리셨는데? 아침 햇살보다도 빠르고 강하게 코를 찌르는 큼큼한 냄새에 홀리듯이 눈을 떠보니, 비상식량으로 가져온 컵라면을 어느 틈엔가 홀라당 끓여 잡숫고 계시는 익숙한 뒤태. 아빠다.
뭐죠..? '소량의 미숫가루'밖에 못 드신다면서요? 아뿔싸. 그러고 보니 아빠는 강한 식탐이 약한 장을 이기는 분이었다..! 엄마가 나를 위해 남겨놓은 음식을 발견 즉시 먹어 치우시는 바람에 서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잠깐 따로 산 사이에 까맣게 잊고 있었네. 깜빡 속을 뻔했어. 앞으로 조심해야지. (=잘 숨겨야지)
아빠가 내 라면을 먹어 치운 것이 그리 큰일은 아니다. 살짝 당황하긴 했지만 그러실 수도 있지 뭐. 어제에 이어 오늘 하루를 또 망치게 된 가장 큰 이유이자 잘못 끼운 첫 단추. 바로 '불통 유심' 사건이다. 실시간으로 스마트폰을 가이드북 삼아 돌아다녀야 하는 21세기 여행자에게, 저렴하게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는 '현지 유심 장착 의식'은 여행의 첫 관문이자 필수 코스다.
대다수의 사람이 인천 공항이나 인터넷에서 여행할 국가의 유심을 미리 구매해 가곤 하는데, 내가 누구냐? 한 손에는 helio 폴더폰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한아름마트에서 스크류바를 사 먹었던 구 뉴요커 아니던가?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유심을 왜 한국에서부터 사 가는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가서 사면 된다고 당당히 외치며 유심을 사 오지 않았는데, 어럽쇼. 믿었던 유심에 발등 제대로 찍혔다.
경건한 마음으로 유심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한인타운 안에 있는 유심 가게로 향했다. 예상 소요 시간은 넉 잡고 30분. 한국인 사장님은 친절하고 신속하게 유심을 뜯어서 핸드폰에 넣어줬다. 여기까진 모든 게 계획대로였는데, 캐리어 파손에 이어 둘째 날의 뉴욕마저 슬슬 까칠하게 굴기 시작했다. 구매한 지 얼마 안 된 최신 폰(자그마치 샘송 갤럭시 노트 9)이고 새로 뜯은 유심이라 개통이 안 될 이유가 없건만 영 신호가 잡히질 않는 것이다.
사장님이 복잡한 매뉴얼에 기재되어 있는 모든 숫자와 글자를 수도 없이 입력했지만, 기지국 아이콘 위의 엑스자 표시는 사라지지 않았고 마침 유심을 납품하러 온 IT 강국의 인도 청년까지 합세해서 이 방법 저 방법 다 써보다가 통신사 직원에게까지 전화를 걸어 한참을 씨름했는데도 신호가 잡히질 않았다. 결국, 두 시간쯤 허비한 끝에 다른 통신사 유심을 끼웠더니 그제야 신호가 잡혔다. 왜 진작 다른 유심을 끼워볼 생각을 안 했던 걸까..?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처음 뜯은 유심은 Lyca고, 두 번째 유심은 H20였다. 인도 청년은 손뼉을 '탁' 치며 진리를 깨달은 듯, T-Mobile 신호를 잡지 못하도록 제조사인 삼성전자 또는 한국의 통신사 SKT가 단말기 출고 때부터 알 수 없는 조처를 해 놓은 것 같다고 했다. (Lyca는 T-Mobile의 통신망을 빌려 쓰는 MVNO 통신사로, 한국으로 치면 알뜰폰같은 일종의 통신망 임대업자쯤 되겠다.)
이유야 어찌 됐든, 30분이면 끝날 줄 알았던 유심 장착 의식을 거의 2시간 동안 거행하는 바람에 오전을 다 날린 꼴이 됐다. 부리나케 다음 장소로 이동하려는 찰나, 1분 1초가 아까운 이 와중에 아빠는 갑자기 화장실이 가고 싶으시단다. 웬 화장실!? 숙소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는데? 타임스퀘어에 있는 Tamice에 가서 뉴욕 빅애플 패스 사야 하는데! 그래야 본격적으로 '관광'을 시작할 수 있는데! 게다가 뉴욕 한복판에 화장실이 어딨어!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은 상상도 못 할 일이긴 한데, 뉴욕 시내에는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공중 화장실이 없다고 보면 된다. 없는 거 빼고 다 있을 것 같은 맨해튼이지만 화장실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다. 지하철 화장실을 가면 되지 않느냐고? 노숙자와 마약 중독자들의 저세상 파티가 열리고 폭탄이 설치되는 등 상상만 해도 끔찍한 범죄의 온상이 될 수 있기에 모두 없애버렸다나.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드는 도시를 안전하게 관리해야 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처사다. 이런 면에서는 단일 민족이 알콩달콩 모여 살면서 곳곳에 널려 있는 깨끗한 화장실도 마음 놓고 쓸 수 있는 한국이 참 좋은 나라다. 여하튼 근처에 갈만한 커피숍도 없어서, 하는 수 없이 숙소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이때부터 조짐이 안 좋았지)
+덧 : 유심 판매소에서 벌어진 일
사실 외국에 나가면 한국인을 더 조심하는 편이다. 안타깝지만 아는 사람이 더 하다고, 경계를 푸는 그 틈을 파고들어 뒤통수를 치는 경우가 많더라. 그리고 타지 생활을 오래 하며 본래의 걸음걸이를 버리고 현지인들 틈바구니에서 발맞춰 걷다 보면 지치고 예민해지기 마련인 것 같다. 나도 그랬고.
다행히도 사장님은 매우 친절한 분이었다. 유심을 개통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자, 연로하신 아빠를 위해 카운터 안쪽으로 들어와 앉아 계시라고 흔쾌히 자리를 내어주셨다. 아빠는 신이 나서(?) 보답을 해 드리겠다며, 어디서 났는지 붓 펜을 꺼내 들고 캘리그래피로 덕담 카드를 쓰고 계셨다.
인도 청년과 나는 핸드폰과 씨름하고 나이 지긋한 두 가장은 서로의 내년 소망을 공유하며 훈훈한 대화를 나누던 그때, 머리카락을 대충 잡아서 집게 핀으로 꽉 동여맨 한국인 여성 한 명이 느닷없이 사무실로 들이닥치더니 아빠를 보자마자 도끼눈을 뜨면서 소리를 빽 지르는 것이 아닌가?
"아저씨! 여기 왜 앉아 계세요? 빨리 나오세요!"
뭐야.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저기요? 여기 사장님이 앉아 계시라고 했거든요?"
"아니, 왜 맘대로 안에 들어오라 말라해요? 여기 안에 지금 이거(아마 돈인 것 같다) 있는 거 몰라요?"
"내가 앉아계시라고 했어요. 계속 서 계시면 힘드시니까.."
"됐고, 나오세요! 빨리 나오시라고요!"
이 여자 뭐야? 사람을 대하는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야만인 같은 모습에 화가 나서 더 크게 쏘아붙이려는 찰나, 아빠가 먼저 고개 숙여 사과하며 상황을 수습했다.
"네, 나갑니다~ 여기에 들어오면 안 되는 줄을 미처 몰랐네요. 이것만 그리면 되는데.. 어쩔 수 없죠. 지금 나갈 테니 화 풀어요. 빠르게 짐만 좀 쌀게요. 미안해요."
뭐야! 아빠가 왜 사과하는 건데!
"아이고, 이것 참.. 저쪽에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아직도 신호가 안 잡히나요..? 이게 왜 이러지.."
사장님도 계면쩍게 얼버무리며 말을 돌렸고 상황은 일단락됐다. 가게 밖에 나와서, 아빠는 예의 그 차분한 말투로 말씀하신다.
"희재야, 아까 그 여자 봐라. 타지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 건지.. 삶의 여유가 없어 뵈는 게 안 됐더라. 넌 참 다행이다. 여유가 있으니 이렇게 나랑 여행도 오고."
우여곡절 끝에 예상보다 한 세 시간은 늦게 타임스퀘어로 출발. 역으로 가는 길에 빅토리아 시크릿이 있길래 아빠의 문화 체험을 위해 커다란 문을 온몸으로 밀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좀 늦긴 했지만 볼 건 다 봐야지. 여긴 속옷 매장이라기보단 뭐랄까, 미국의 문화를 단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관광명소랄까!? 여성의 성 상품화로 말이 많긴 하지만, 속옷을 이런 식으로 거창하게 판매하는 곳이 지구 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었다. 아빠한테 엔젤들도 보여드려야지.
음? 내 키보다 훨씬 큰 전광판에서 거인처럼 걸어 나오던 그녀들의 모습에 엄청나게 압도당하곤 했었는데 전광판이 없어졌네. 외벽 공사 중이라 그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예전의 나처럼 눈이 휘둥그레졌을 아빠의 얼굴을 상상하면서 고개를 돌린 순간, 이럴 수가! 아빠는 문 앞에 서서 심드렁한 표정과 함께 눈으로만 슬쩍 둘러보시더니 "너 살 거 사라. 나는 저쪽 구석에 가 있겠다" 하신다.
아.. 맞다. 아빠 쇼핑 진짜 싫어하지.. 돌이켜 생각해 보니 아빠가 백화점이나 마트 같은 쇼핑센터에 가시는 걸 본 적이 없다. 적절한 사회 활동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옷은 늘 엄마가 대신 사 왔다. 정작 집으로 가져온 새 옷을 아빠에게 입혀보니 소매가 기네 목이 짧네 하며 티격태격하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럴 거면 같이 가서 사라고 했더니, 아빠는 '그런 데' 안 가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아빠는 쇼핑 기피자, 쇼핑 무용론자, 아나키스트 뺨치는 무 쇼핑 주의자 등이었는데, 이 또한 잊고 있었다. 무슨 낙으로 사시는지 모르겠군. 아빠랑 오랜만에 같이 시간을 보내려니 처음 보는 아저씨처럼 낯설게 느껴진다. 아빠의 취향을 회사 본부장님 취향보다도 모르고 있었음에 반성하며, 괜스레 기운이 빠져서 그냥 나가자고 했다. 아빠 성향을 미리 파악해서 배려하지 못한 것이 민망하기도 했고. 어렵구먼, 어려워.
그나저나 이거 뉴욕에서 쇼핑은 고사하고 윈도쇼핑도 제대로 못 하게 생겼다. 아쉬워서 이걸 어째. 예나 지금이나 윈도쇼핑이 내 유일한 낙인데. 앞날이 막막해지며 갑자기 숨이 턱 막힌다. 아빠와의 여행이 힘들 거라는 건 충분히 각오했지만, 윈도쇼핑마저 못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역시, 사람은 뭐든지 겪어봐야 안다.
드디어 뉴욕 지하철을 타보자며 의기양양하게 역 안으로 들어섰다. 오줌 지린내가 진동하는 승강기 문 앞에서 실력보다 열정이 더 넘치는 듯한 흑인 오빠가 허공에 손을 신나게 휘저으며 남들이 듣든지 말든지 신나게 인생사를 늘어놓는 중이다. 진짜 뉴욕에 왔구나. 새삼 느끼면서, 지하철을 타고 자그마치 한 정거장이나 이동 후 드디어! 타임스퀘어에 도착했다. 여기서도 낯익은 거리의 예술가들이 각자 자신들만의 판을 벌여 놨다.
역을 빠져나와서 그토록 해보고 싶었던 관광객 놀이를 했다. LG 로고 앞에서 한 장, NASDAQ 실시간 주가지수 앞에서 한 장, 여행 소감 인터뷰 동영상도 잊지 않고 찍고, 타임스퀘어 전체를 배경으로 또 한 장, 나랑도 다시 한 장. 밥이나 먹자면서 조금 귀찮아하시는 듯한 아빠에게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며 강요하다시피 인증샷 잔치를 벌인 후 드디어 대망의 Tamice로 향했다.
Tamice는 뉴욕의 주요 관광지 입장권을 한꺼번에 모은 투어 패스를 파는 곳으로, 부지런히 돌아다닐 수만 있다면 꽤 괜찮은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순간의 감정과 판단에 의지하는 자유여행을 선호하는지라 평소에 투어 패스를 사는 편은 아니지만, 아빠와 돌아다니는 이상 시간과 동선은 제한되어 있고 봐야 할 것은 수만 가지였기에 큰 맘먹고 구매해 보기로 했다.
중요한 것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이라 편하다. 왕년 뉴요커네 유학생이네 하면서 잘난 척하더니 왜 자꾸 한국인만 찾아다니냐고? 사기꾼만 조심하면 편하고 깔끔하고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최고야. 근면 성실하고 착해. 판매 제품 가성비 좋고 말도 잘 통하고.
안타깝게도 허탕 질은 계속됐다. Tamice 홈페이지에 빌딩이며 입구 사진까지 친절하게 나와 있건만, 들어가는 문을 찾지 못해서 또다시 인간 나침반이 되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헤매다가 30분을 허비했다. 이놈의 구글맵 나침반은 바늘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데다 인터넷 강국 대한민국에서처럼 빠릿빠릿하지가 못하다.
내 폰만 그런 건 아니었나 보다. 외국인들도 종종 나한테 구글맵이 이상하다면서 길을 묻곤 했으니까. 그리고 이때쯤, 아빠는 눈에 띄게 지치기 시작했다. 이 때라도 눈치챘어야 했다. 뉴욕에 온 지 이틀 만에, 아빠가 골병이 들고 있다는 것을.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입구를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가서, "코리안? 타미스? 쉽 층"이라고 심드렁하게 알려주는 도어맨의 안내에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으로 올라갔다. 작은 하늘색 문을 열고 들어가니 꽤 널찍한 사무실과 앳된 직원들이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미리 구매하셨어요? 안 하셨으면......" 무표정한 얼굴로 대본을 읽듯 구매 절차를 알려주는 한국인 직원이 괜히 반갑다.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동포애 인지. 고심 끝에 Big 5 ticket두 장을 샀다. 1인당 $120짜리로, 엠파이어 빌딩 전망대, 탑 오브 더 락 전망대, 자유의 여신상 데이크루즈, 마담투소, 탑뷰 24시간 2층 버스를 탑승할 수 있는 티켓이다.
빌딩 밖으로 나오니 오후 2시 30분. 사실 아빠는 한 시간쯤 전부터 계속 '밥 타령'을 하셨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아빠의 근거 없는 고집과 식탐인 줄만 알았다. 밥을 제시간에 먹고자 하는 개인의 욕심과 욕망!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은 고집이 아닌 아빠의 생존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생존 조건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아! 나는 정말이지 아빠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무지한 딸은, 노쇠한 아빠를 굶긴 채 등을 떠밀며 다음 행선지로 향하는 불효를 저지르고 마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