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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재 Feb 17. 2020

이것은 여행인가 행군인가. 강행군은 계속된다

2018. 10. 24. 셋째 날

 아빠의 나이를 잊은 무지몽매한 딸과 그런 딸을 둔 죄밖에 없는 아빠의 뉴욕 강행군은 오늘도 계속되었다. 오늘은 한 달 전부터 신청해 두었던, 한국어로 진행되는 UN 투어를 하고 내 인생 최고의 뮤지컬인 라이언킹을 아빠에게도 선보이는 날이다. 그 사이에 Ess A-Bagel에서 식사를 하고 페리 위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감상하는 상당히 효율적이고 빡센 일정. 계획은 완벽했지만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면 다름 아닌 나의 체력이었다.


  예상했던 그림은, 미세먼지도 구릉도 없는 맨해튼에서 아침 산책도 할 겸 여유롭게 도보로 이동한 뒤 커피 한잔에 베이글을 즐기다가 UN에 입성하는 것이었다. 구글맵 님에 의하면 호텔에서 UN까지 도보로 25분. 오전 10시 15분에 투어가 시작이니까, 최소 1시간 전에만 출발하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침 6시에 자버린 덕분에 알람을 듣지 못한 딸은 잠에 빠져들었고, 아빠는 안타까운 마음에 지친 딸이 더 쉴 수 있도록 내버려 두셨고! 결국 9시 반쯤 숙소에서 뛰쳐나오고 말았다. 게다가 25분은 개뿔. 마네킹 같은 표정으로 일터를 향해 빠르게 걷는 뉴요커들을 헤치며 목적지로 향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마치 산란을 위해 강을 거슬러 헤엄치는 연어 떼를 밀어내며 걷는 느낌이랄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의 핸드폰은 GPS를 잡지 못해서 방향감각을 잃고 말았으니.. 이 블록 저 블록을 오가며 바삐 뛰어다니는 나를 열심히 쫓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아빠의 체력을 일찍이 방전시키고 말았다. 나도 죽을 만큼 힘들었으니 아빠는 오죽했을까.


 어디든 그렇겠지만 특히 미국은 어설픈 변명이 통하지 않는 나라인지라, 1분이라도 늦을 경우 투어에 참여하지 못할 것만 같은 불안감에 결국 거의 다 와서 택시를 타고 말았다. 하지만 차라리 걷는 게 나았을 정도로 공사 현장 한가운데에 발이 묶여 옴짝달싹하지 못한 것은 함정. 조급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 택시기사에게 불평을 한마디 던졌는데, 그간 잊고 지내왔던 말을 듣고 말았다.


"너무 막힌다. 큰일 났네."

“여긴 뉴욕이야! 받아들여!”

“아니, 왜 아침에 공사를 하고 그럴까? 사람 없는 밤에 좀 하지.”

“헤이! 여긴 뉴욕이야! 공사하는 일은 매우 흔하잖아? 그리고 저 사람들도 밤엔 쉬어야지!”


 뉴욕이 뭔데! 뉴욕이 뭐 얼마나 대단한 양반이시길래 뉴욕에 살면 다 참아야 하냐고! 가뜩이나 힘들었던 그 시절의 나를 더욱 지치고 답답하게 던 말이다. 무슨 말만 하면 여긴 뉴욕이래. 뉴욕이니까 참고 견뎌야 한대. 그때는 저 말이 '너같이 별것도 아닌 애가 이런 위대한 도시의 일부가 되려면 이 정도의 불편과 고통, 외로움쯤은 견뎌야 한다.'는 말로 들렸다. 마치 무급으로 일하는 인턴사원에게 ‘네가 이런 위대한 회사에서 대단한 사람들과 엄청난 일을 한다는 사실 자체를 감사하게 여겨야지! 어디 감히 돈까지 받길 바래?!’라고 윽박지르는 것처럼.


 그런데 신기하기도 하지. 글쎄, 지금은 여행자 신분이기 때문일까? ‘여긴 뉴욕이야!’라는 말이 그리 나쁘게 들리지 않는다. ‘나는 늘 참고 살지! 너도 견뎌봐. 여긴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니까. 무엇보다도, 이게 바로 뉴욕이라고.’ 와도 같은, 경험에서 우러나는 현지인의 진심 어린 충고로 들리기도 하고. 확실히 예전보다 뉴욕을 여유 있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UN 앞에 도착했다. 입장하려면 건너편에 있는 입국 수속 센터 같은 곳에서 여권을 보여주고 입장권과 스티커를 받아야 한다. 대표자 한 명만 수속을 밟으면 된다고 해서 아빠를 잠시 센터 앞에 세워두고 부리나케 들어가려는데, 입구에 서 있던 경비원이 아빠에게 나를 보며 “She is very beautiful.”이라면서 헤벌쭉 웃어 보였다. 나는 감히 아빠 앞에서 나를 희롱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 기분 나빴는데, 아빠는 딸한테 예쁘다고 하는 것이 듣기 좋으셨나 보다.


"저 사람이 방금 너한테 예쁘다고 했지? 네가 미국에서 그런 말을 많이 듣는 것 같다."

"맞아요. 근데 기분 나쁘지 않아요? 흠,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 사람은 정말 순수하고 좋은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칭찬한답시고 그런 말을 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아빠, 내가 만일 백인 여자였다면 그 스페인계 경비원이 같은 표정으로 똑같이 말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동양인이라 만만해서 쉽게 말한 것일 수도 있어."

"그래, 어떤 느낌인지 알 것도 같다. 근데 네가 그런 말을 많이 듣는 걸 보니 여기 사람들이 보기에도 네가 참 예쁜가 보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런 말 잘 안 하던데."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긴 한데, 맞아요. 하하! 난 동양인인데 키 크고 쌍꺼풀도 있고 입도 크고 코도 크고 엉덩이도 커서 여기 사는 사람들이 봤을 때 매력적이라고 느낄 수 있지. 미국에서 여러모로 인정받는데, 더 있을 걸 그랬나?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버린 점은 아쉬워."

"네가 엄마 닮아서 다행인 줄 알아라. 나 닮았으면 키 작고 똥똥했을 텐데."


(좌) 정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건너편 건물에서 체크인을 해야 한다. (우) 투어가 시작하는 곳. 근처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면 된다.

 

 UN 투어는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좋았다. 우리는 신나게 질문하면서 적극적으로 투어에 임했고, 오랜만에 한국인 무리 안에 있으니 괜스레 마음이 놓였다. 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인지 타지에서 눈동자가 파란 사람들 주위에만 계속 둘러싸여 있다 보면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든다.


 아빠는 예상대로 학구열에 불타올랐다. 가이드님의 설명이 끝나면 꼭 한 가지 이상 질문하며 열심히 받아 적는 모습에 모두가 감탄하는 듯했다. 아빠의 학구열 시리즈는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긴 했다. 학교 다닐 때도 남들은 대충 학점을 따고 넘겨버리던 지루하기 짝이 없는 미술 해부학을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공부해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이야기, 컴퍼스와 눈금 없는 자만 갖고 작도를 하여 전지를 잘라서 구(球)를 만드는 과제를 대부분 실패했지만 아빠는 완벽하게 해낸 일, 남들이 다 놀 때에도 혼자 열심히 공부해서 4년 장학금을 받은 일화 등은 584,597번쯤 들은 아빠의 무용담 시리즈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아빠가 학구파인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도 한결같이 활활 타는 열정을 보이시다니, 역시 존경스럽다.


 아빠의 질문 속에서도 아빠가 살아온 긴 세월이 드러났다. 가이드님이 한국 전쟁 시절 UN에서 한국을 지원한 이야기를 들려주자,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받아본 교과서 뒤에 '유네스코'와 '운크라'에서 기증을 받아 만든 책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혹시 '운크라'는 어떤 단체였나요?"라고 질문하시며 뛰어난 기억력과 함께 역사의 산 증인다운 면모를 내비친 것이다. ('운크라'의 정체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는데, 투어가 끝나기 전까지 열심히 알아보고 답해 준 가이드님도 멋졌다)


 한창 국위선양 중인 BTS가 연설한 회의실에서 사진도 찍고, 실제 회의 중인 곳을 숨죽여 지나가기도 하고, 핵폭탄을 뒤로 맞은 섬뜩한 모습의 동상을 보며 전쟁의 무서움도 느끼고, 마지막으로 지하 기념품샵에서 엄마와 남편에게 줄 열쇠고리를 구입하고 엽서를 보내는 것으로 UN 투어는 마무리됐다.


놓칠 뻔 한 UN 투어 성공.


 아빠는 12시에서 1시 사이에 반드시 점심을 드셔야 하기 때문에, 인터넷을 열심히 뒤져서 찾은 UN 근처 맛집 <Ess A-Bagel>로 향했다. 가장 유명한 연어 베이글과 고기 러버 아빠를 위한 터키 샌드위치, 비타민 씨를 충전하기 위한 레모네이드를 맛있게 먹어치우고 나니 1시 30분. 좋아. 모든 것이 완벽해.


맛집 인정


 다음 목적지인 페리 승강장으로 가기 위해 우버를 불렀다. 뉴욕은 워낙에 지하철이 잘 되어 있어서 우버를 탈 일이 얼마나 있을까 싶었지만, 신나게 뛰어다니면서 지하철을 탔던 그 시절의 나는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고, 아빠는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조차 큰 노동이 되어버린 나이였기 때문에 우버는 그야말로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돈이 더 들더라도 아빠가 건강하셔야 하니까. 체력이 유지되어야 계속 여행을 해나갈 수 있으니 앞으로 우버를 자주 타게 될 것 같다. 택시는 비싸고 불친절해서 매번 이용하기는 부담스러웠는데, 누가 '우버'라는 것을 발명했는지 참 고맙다.


 빠르고 편안하게 페리 선착장에 도착. 바람이 생각보다 차다고 느끼며, 사진 찍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셀카봉을 손에 감아쥐었다. 아빠가 한국에서부터 꼭 보고 싶어 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유의 여신상’이다. 가장 미국스러운 것을 보고 싶어 하셨으니까. 막상 보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안 볼 수도 없는 게 바로 '랜드마크' 아니던가. 설레는 마음을 안고 배가 출발하자마자, 숙소에서 옷가지를 더 챙겨 나오지 않은 것을 무진장 후회했다. 그리고 아빠! 아빠의 건강이 걱정되었다. 선글라스를 날려버릴 만한 강풍이 우리의 전신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오래된 기억에 의지하여 날씨를 예측한 것이 실수였다. 설령 날이 추워져도 근처에서 아무거나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스케줄이 너무 빡빡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얼어 죽을 것 같다. 스케줄을 하나 빼서 뭐라도 사야겠다고 다짐한 순간이다.


 아빠도, 나도, 그리고 배에 탄 수많은 사람들 모두 배에 오르자마자 사진을 찍어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 때문에 머리는 앞을 볼 수 없을 만큼 휘날리고 서있기도 힘들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셔터를 눌러댔다. 마침내 저 멀리 자유의 여신상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너도 나도 앞다투어 사람들을 헤쳐가면서 기념사진을 찍느라 선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리고 정작 배가 자유의 여신상 근처에 도착해서 한참 동안 맴돌 때는 이미 찍을 사진 다 찍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추위를 이기지 못했는지, 흥미가 떨어져서인지 배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참 재밌다. 따뜻한 배 안에서 쉬다가 나중에 나와서 사진을 찍었더라면 더 잘 나왔을 텐데. 프레임에 들어오는 방해꾼도 없고. 끈기가 부족했던 걸까? 처음 봤을 때의 설렘이 한 2분 만에 사라지는 것은 전 세계 공통적인 감정인가? 아니면 자유의 여신상이 오랫동안 감상할 만한 작품이 아니어서?


(좌) 아수라장 (우) 아수라장을 지나 간신히 건진 나름의 베스트샷

 

 날은 쌀쌀했지만 미세먼지 하나 없는 맑은 공기와 파란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과 투명한 바람이 참 좋았다. 대체 언제부터 맘 놓고 숨 쉴 수 있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을까. 추위를 견디며 신나게 심호흡을 하고 있는데 아빠가 너무 춥다면서 들어가잔다. 언제 또 오겠나며, 가급적 모든 액티비티를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아빠도 버티기 힘들 만큼 추웠나 보다. 


 잠시 배 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녹이다가 아쉬운 마음에 다시 나와서 바람을 피할 수 있는 기둥 뒤에 기대어 마지막 경치를 감상하고 있자니, 어린 남자아이가 다가와서 배 타기 전 그린 스크린 앞에서 촬영한 이미지에 자유의 여신상을 합성한 사진을 보여주며 사겠냐고 묻는다. $20로 그리 싸진 않지만, 사진이 워낙 잘 나와서 구매했다. 평생의 추억이 될 테니까. 그리고 내가 찍은 사진은 다 못쓰겠더라.


 배에서 내려 화장실부터 찾았다. (이젠 2시간에 한 번씩 해야 하는 화장실 방문 행사가 익숙해졌다) 선착장 바로 앞에 있는 큰 빌딩에 공공 화장실이 있다길래 함께 들어갔다. 1층 로비를 개방해서 시민들이 자유롭게 카페처럼 이용할 수 있도록 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벽에는 신진 작가들의 작품이 걸려있었고, 곳곳에서 과외를 하고 있는 듯한 모습도 보였다. 건축 허가를 받기 위한 의무사항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곳곳에 시민들을 위한 공공장소가 많이 마련되어 있는 것도 뉴욕의 좋은 점 중 하나다. 1인당 도시공원면적이 많을수록 살기 좋은 나라라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다는 기사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한 켠에는 '허리케인 Sandy에서 살아남은 피아노'가 놓여있었다. 어려운 곡을 연습해 놨다가 여행지에서 멋들어지게 연주해 보는 것도 좋겠다. 언제 꺼내서 실행할지 모르는 나만의 버킷 리스트에 넣어 두어야지.


 

 뉴요커들 사이에서 잠시 쉬다가, 다음 장소로 가기 위해 Ground Zero까지 우버를 타고 가기로 했다. 뮤지컬을 졸지 않고 보기 위해 체력을 최대한 비축하기로 한 것이다. 돈을 절약하기 위해 합승으로 불렀는데 살짝 긴장됐다. 역시나 이리 뛰고 저리 뛰긴 했지만 다행히 생각했던 것보다 무난하게 우버에 탑승했다. 여행 첫날의 서툴렀던 내 모습과는 달리, '이제 조금 적응했네. 역시 나야. 예전에 살았던 가닥이 있는데.'라고 혼자 으쓱하면서, 앞으로는 더 편해지겠다며 스스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침 지하철 타러 가는 김에 9.11 현장에 들를 수 있어 다행이었다. 맨해튼은 작은 섬이지만 세계의 수도답게 사연도 이야기도 많고 볼거리도 풍부하고 갈 곳이 참 많기도 하다. 아빠는 역사적으로 아픈 상처를 남긴 현장에 이렇게 멋있는 구조물을 지어 놓고, 추모 박물관을 지어서 후세에도 잊지 않도록 기억하게 하는 이 모든 것들이 미국의 저력을 느끼게 하는 것 같다고 했다. 내 생각도 그래요 아빠. 지금 생각해보면 구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해 버리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나 싶어요. 다른 데로 옮기기라도 하지. 역사를 잊어버린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고 하잖아요? 빌딩에 반사된 하늘이 시리도록 멋져 보인다.



 지하철을 타고 앉아있는데, 다음 역을 안내하는 역장의 목소리가 반갑다. "Next stop, 28 street. Stand clear of the closing doors. Stand clear." 처음에 뉴욕에 왔을 때는 대체 뭐라고 하는 건가 싶어서 귀를 쫑긋 세워 무진장 긴장하고 들었는데. (사실 지금도 뭐가 어떻게 바뀌고 버스를 어디서 타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운행하고 이런 말들은 못 알아듣겠다) 툭툭 내뱉는 듯한 목소리가 왠지 츤데레 부장님의 퉁명스럽지만 애정 어린 조언 같다. 그리고 9년이 지났는데도 어쩜 안내 방송을 녹음하지 않았을까? 난 반갑고 좋긴 한데 운전수 아저씨 목 아프고 귀찮겠다. 근데 뉴욕 지하철은 워낙 노선이 자주 바뀌니까 녹음파일이 별 소용없을지도 모르겠네. 그러고 보니 몇몇 노선들은 녹음해 놓은 방송이 나오는 것 같은데. 무슨 기준일까? 별 시답잖은 생각들을 하면서, 예전에 화통에 과제를 담아서 소중히 품에 안고 지하철을 타던 추억,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며 과제를 하느라 잠을 못 자서 너무 피곤했던 나머지 환승하는 역 벤치에서 오후 4시쯤 살짝 졸았는데 나도 모르게 몇 시간 동안 자버렸고, 밤 11시쯤 공익요원 같은 사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어깨를 흔들어 깨웠던 기억 같은 것들을 떠올리며 앉아있다 보니 어느새 브로드웨이 역을 알리는 역장의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아빠, 어서 와. 한밤의 브로드웨이는 처음이지? 멋있지? 난리 나지? 장난 아니지? 이게 미국이야! 전광판 엄청 크지! 이게 바로 천조국의 위엄이야!"

"그래, 광고판이 참 크다. 낮보다는 밤이 더 화려하네. "


 오만 호들갑을 다 떠는 나에 비해 아빠는 민망할 정도로 덤덤히 대답하셨다. 이게 바로 연륜에서 오는 멋인가? 레스토랑에서 저녁 먹을 정도의 시간이 없어서, 낮부터 소중히 갖고 다녔던 Essa-Bagle 반쪽을 큰 맘먹고 아빠한테 양보했다. 입구 한편에서 허겁지겁 드셔야 하는 게 맘에 걸리긴 했지만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여행 중이니까! 근데 잠깐 긴 줄의 끝을 확인하고 온 사이에 한입도 남기지 않고 다 드시다니 나도 배고픈데 나도 연어 좋아하는데…. 역시 맛있는 음식 앞에서는 사랑스러운 딸의 존재도 잠시 잊으시는 우리 아빠답군.



 라이언킹은 지금껏 감상한 뮤지컬 중에 딱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추천할만한 작품이다. 아날로그적인 기계 장치로 재현한 동물들, 예술 작품 같은 소품과 특수 분장, 작은 무대에서 펼쳐지는 광활한 사막과 물소 떼의 달리기 등을 어쩜 이렇게 완벽하게 표현해 냈는지 혀를 내두를 정도다. 예술적인 영감으로 가득한 작품이고 내용도 이해하기 쉽기 때문에 아빠랑 꼭 다시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강행군으로 인해 지쳐버린 아빠가 중간에 깜빡깜빡 조는 것이 아닌가! 난 아빠의 어깨와 손을 열심히 꼬집고 주물러 드리면서 뮤지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지만, 아빠는 중간중간 어쩔 수 없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눈꺼풀과의 사투를 벌였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한마디.


“너는 이렇게 안마를 해 주는데, 엄마는 글쎄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아프게 쿡 쿡 찌른단다. 에휴, 나니까 살지.”


 뉴욕에서 보기로 한 4개의 뮤지컬 중 첫 번째 작품을 드디어 보았다. 학생 때 5~6개쯤 보긴 했지만 그땐 학교에서 나온 저렴한 표였기 때문에 거의 맨 끝자리에서 벽에 등 붙이고 봤었는데, 아빠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나도 함께 좋은 자리에서 보았더니 예전에는 보지 못한 배우들의 표정과 움직임, 각종 장치들이 더 가까이 보여서 좋았다. 돈은 웬만하면 거짓말을 하지 않는데, 자본주의의 꽃이 활짝 핀 미국 뉴욕에서는 더더욱 돈이 명확하게 행복의 척도가 된다. 


 아빠도 이건 진짜 예술 작품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우니 뿌듯했다. 뮤지컬을 보고 나오니 인력거꾼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는데, 아빠는 이 모습이 참 재밌으셨나 보다. 중국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미국에도 이런 게 있네, 하며 사진을 찍으셨다. 야경을 배경으로 아빠와 사진을 몇 장 찍고, 삼각대와 엄청난 카메라를 준비해 올걸 살짝 후회도 하며, 이 와중에 디자이너로서 벤치마킹을 하겠다고 핑크색 페인트를 쏟아부은듯한 T-mobile 매장 사진도 열심히 찍고 나서야 호텔로 향했다.


 아빠와는 달리 쌀 한 톨도 먹지 못해서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에, 사람들이 꽤 줄을 서있는 피자집에 들러서 White Pizza를 한 조각 샀다. 아빠는 냉큼 화장실에 다녀오셨으니 1석 2조다. 숙소로 돌아와서 피자를 먹으려고 꺼내니, 역시나 아빠가 한 입만 달라고 하신다. (이젠 아빠의 식탐에 꽤나 익숙해졌다) 아빠가 센스 있게 챙겨 온 맥가이버칼로 3분의 1쯤 잘라서 아빠를 드리고, 나는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숙소 앞의 Duane reade로 갔다. 미국 맥주가 이렇게 싸다니 좋구나! 맥주 파티다! 앞으로 매일 밤 한 병씩 홀짝일 Brooklyn lager를 한 묶음 사고, 아빠가 식사를 제 때 못 드실 경우를 대비하여 작은 초콜릿 바와 땅콩 믹스, 스니커즈 같은 간식거리와 아침에 드실 시리얼과 우유, 내일 먹을 참치 샌드위치를 장바구니에 담았다. 계산대의 흑인 종업원이 예의 그 ‘You are beautiful.’ 눈빛을 보냈다. 나는 ‘I know.’ 눈빛으로 가볍게 응수했다.


 숙소로 돌아오니 11시 30분, 일기장에 오늘 쓴 영수증과 사진을 붙이니 12시. 앞으로의 스케줄을 이것저것 정리하니 아직 씻지도 못했는데 또다시 새벽이다. 긴 하루였다. 그래도 오늘은 괜찮았어. 계획했던 것들도 전부 다 했고, 이제 아빠 스타일도 파악한 것 같으니 앞으로는 편해지겠지.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냈다는 안도감과 자신감에 도취되어 다음날 맞닥뜨리게 될 큰 사건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쥐도 새도 모르게 곯아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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