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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완 Nov 14. 2022

방송마케팅, 재미도 없고 보람도 없습니다.

내 일을 내가 무시하는 건, 나를 좀먹는 일이다.  

주말에 양평 친구 집에 다녀왔다. 친구는 양평 깊숙한 곳에 땅을 사고, 집을 지어서 산지 1년 반 정도 되었다. 서울에서는 도저히 꿈꿀 수 없는 넓은 평수의 집과, 내가 먹을 것을 키우는 작은 텃밭,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만나는 운무로 가득한 산에 둘러쌓인 삶. 나 역시도 꿈꾸는 모든 것이 들어있는 집이라 그 곳에 가면 나는 언제쯤 이렇게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지금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생각이 깊어진다. 이 일 계속 하는 게 맞는걸까, 나도 친구처럼 조금이라도 어릴 때 준비해서 지방으로 내려가는 건 어떨까. 


본래도 나도 언젠가는 지방에서 자급자족의 삶을 살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을 소소하게 하며 많은 돈을 벌지 않더라도 조용히 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요즘 그런 생각이 더 많이 든다. 그냥 나도 이제 30대 후반이 되어가니 나이가 그럴 때가 되었나,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구와 와인 한 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하다보니 내 입에서 문득 답이 나왔다. 


일이 의미가 없어. 내가 내 일을 무시해.


나는 지금 방송 마케팅 일을 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영화 마케팅을, 그 이전에는 광고대행사에서 제품 마케팅을 진행했다. 제품 마케팅에 비해 컨텐츠 마케팅은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 포스터, 예고편 뭐 중요한가 본편이 재밌으면 되지, 라는 생각이 아직도 컨텐츠 업계에는 만연해있고 그것이 가장 심한 것이 바로 방송계이다. 방송계에 마케팅팀이 생긴지가 10년도 되지 않았고, 여전히 방송을 트는 것 자체가 광고라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산이 너무 적다. 


제품 마케팅을 하던 때에서 영화 마케팅으로 오며 예산이 1/5 토막이 났고, 영화 마케팅에서 방송 마케팅으로 오며 예산이 1/30 로 줄었다. 광고 물량공세를 쏟아붓는 OTT와 비교하면 30배가 무슨 말인가, 100배까지도 아마 차이날 것이다. 가뜩이나 적은 예산인데 포스터, 예고편, 메이킹, 유튜브, SNS 담당하는 팀이 다 달라서 통일된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힘들고, 더 눈에 띄지 않는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워낙 많으니 OTT 처럼 예산을 쓰면 채널이 파산하니 쓸 수도 없다. 


내가 하는 일의 스트레스와 고민은 분명 그 이전의 제품 마케팅, 영화 마케팅을 할 때와 똑같은데 보람이 없고 반응이 없다. 이 전에는 '마케팅적으로 봤을 때 이렇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라며 나도 내 의견을 내세우던 것이 지금은 '보이지도 않고, 메시지 통일성도 없는데, 이게 마케팅적으로 라는 말을 붙일 수가 있나? 그냥 대충 맞춰주지 뭐' 라는 생각을 한다. 내가 내 일을 무시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좀먹는 이 생각이 좀 바뀌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바꾸기가 쉽지가 않다. 나는 이래도 내 후배들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고 좀 더 보람을 느꼈으면 해서, 앞길을 좀 닦아놓고 싶은데, 


'내가 잘 안보이니 포스터를 바꿔라, 드롭해라, 다른 걸로 다시 찍어라' 등등의 마케팅과 상관없이 배우 본인의 예쁨만 중요한 피드백을 받으면 다시금 기계적으로 대답한다. 네네, 해달라는 대로 해드리죠. 카피 메시지가 뭐 중요한가, 내 고민이 뭐 필요한가. 


그래, 내가 할 고민은 언제 이 일을 그만두고, 돈을 모아서 지방으로 내려가느냐 하는 것이다. 물론 그 돈과 시간을 따져보면 결국 회사를 좀 더 다녀야 한다는 결론과 로또만이 답으로 나오긴 하지만. 적어도 소품 촬영한 사진의 끈이 30도 돌아가있는 것과, 10도 돌아가있는 것 중 뭐가 더 나은지를 생각하는 것 보단 고민인 것 같다. 





오늘 말도 안되는 포스터 피드백을 받으며 빡쳐서 썼는데, 쓰다보니 지난번에 쓴 사십춘기 글과 비슷한 것 같다. 역시 난 지금 사십춘기가 맞나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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