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누구에게나 겸손한 배우가 되고 싶어요.
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허영진(이하: 허) 허영진이고요. 직업은 배우입니다.
배우라는 직업을 주변에서 흔히 보기는 어려운 것 같아요.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허: 꿈을 찾는 게 사실 쉽지 않잖아요. 저도 학창 시절에는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공부만 했지 뭘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었어요. 어느 날 중학교 음악 선생님이 틀어주신 뮤지컬 영화 <노트르담드 파리>를 보게 되었는데요. 별 기대가 없었는데 첫 소절을 듣고 눈이 번쩍 떠졌어요. 영화를 보고 난 후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아 부모님께 연기가 하고 싶다고 말했죠. 그때가 처음인 것 같아요. 부모님께 뭔가를 하고 싶다고 얘기한 게.
<노트르담드 파리>를 보고 갖게 된 꿈은 뮤지컬 배우였을까요? 부모님이 반응 어땠을 지도 궁금하네요.
허: 당시에는 구체적이지 않았어요. 그저 사람들 앞에서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죠. 어머니는 걱정하기도 하셨지만 제 의견을 지지해 주셨어요. 반면 아버지를 설득하기는 많이 어려웠죠. 흔히 '배우'라고 하면 먹고살기 힘든 직업이라고 생각하잖아요. 아버지도 그래서 걱정이 크셨을 거예요. 다행히 완강한 반대는 아니었던 게, 고등학교에 가서 아버지가 원하는 성적을 맞추면 연기 학원을 보내주신다고 하셨어요. 살면서 가장 열심히 공부한 때가 아닌가 싶어요(웃음).
연기학원을 찾고 대학 입시를 위한 정보의 양과 질에서, 지금과는 차이가 있을 듯해요.
허: 당시에는 스스로의 기준이 있다기보다는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갔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처음 간 학원의 교육 방식은 입시와는 거리가 있었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입시준비를 위해서 다른 학원으로 옮겼어요.
두 학원의 교육방식에는 무슨 차이가 있었나요?
허: 첫 번째 학원은 회사나 작품과 연관되어 있어서, 오디션을 볼 수 있도록 훈련해 주는 곳이었어요. 입시 학원은 말 그대로 대학 진학을 목표로 한 수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요. 두 곳 모두 연기를 가르치지만 목표는 각각 다른 거죠.
누군가가 연극영화과를 지망한다고 하면, 둘 중 어느 곳을 추천하겠어요?
허: 제가 요즘 입시 시스템은 잘 모르지만, 입시생이라면 두 번째의 입시 전문학원을 추천하겠어요. 그러나 배우가 되고 싶다고 하면 조금 다를 것 같아요. 배우라는 직업이 기술만 배운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기술을 밑바탕으로 다양한 경험도 중요하니까요.
물론 기술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좋은 연기를 하려면 한 사람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거든요. 인간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종교, 철학, 인문학 같은 것들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 필요하고요. 그제야 비로소 ‘그 사람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해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연기를 위한 뼈대는 기술이고 그 위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 다양한 경험인 거죠.
한 사람을 연기하기 위한 삶의 태도나 공부가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사는 것'일 수도 있을 텐데요. 이 말에 동의하나요?
허: 다른 사람의 삶을 대신 산다는 건 너무 거창하고 대단한 일처럼 느껴지는데요. 사실 배우도 수많은 직업 중 하나일 뿐이거든요. 연기라는 기술을 사용해서 돈을 버는 직업이기 때문에 제가 연기하는 인물을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정도죠.
작품에서 다양한 인물을 연기하잖아요. 수많은 인물을 표현하다 보면, 자신의 표현 방식을 현장에서는 다르게 받아들일 때도 있을 것 같아요.
허: 시나리오를 받고 가장 먼저 ‘어떻게 연기해야 될까?’를 고민해요. 전체적인 흐름도 고려하고요. 사실 배우는 연출이나 감독이 관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역할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주제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테두리 안에서 다양하게 해석하려고 노력해요.
테두리의 범위나 모양, 색깔을 서로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허: 저는 대본에 적힌 텍스트만 보기 때문에 말이나 행동의 의중으로 A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B라는 얘기를 듣게 되면 그 의견을 받아들이고 방향을 다시 잡죠. 결론적으로는 대본의 큰 흐름에 따라서 해석하고 표현한다고 볼 수 있겠네요.
현장의 많은 분들과는 어떻게 소통하고 있나요? 본인만의 노하우가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허: 노하우는 아니지만(웃음) 항상 모두에게 인사를 해요. 저라는 존재를 인식시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처음으로 참여한 상업 영화 <거미집> 같은 경우, 현장에서는 제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거든요. 갓 데뷔한 신인이고 소속사도 없기 때문에 ‘여기에 연기하러 온 배우’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거죠.
연극, 뮤지컬, 영화. 다양한 현장의 준비 과정은 조금씩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허: 제 경험을 비롯해 순서대로 말씀드릴게요. 먼저 연극은 연습실에 모여서 신별로 연습을 진행해요. 관객과 마주하여 실시간으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연기 연습을 집중적으로 하죠. 뮤지컬은 연기와 더불어 춤과 노래를 함께 해야 하기 때문에 연습기간도 공연기간도 정말 바빠요. 연극처럼 실시간으로 이뤄지지만 아무래도 연기와 더불어 안무와 노래 등 다양한 요소가 더해지다 보니 상대적으로 연극보다는 연기의 비중이 적은 편이고요. 영화는 다 같이 모여 연습하는 시간은 따로 정해지지 않고 현장에서 바로 촬영이 진행돼요. 드라이 리허설 정도 한 번 맞춰보고 바로 촬영에 들어가는 거죠.
다양한 장르를 경험했기 때문에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연극과 뮤지컬 중 본인에게 잘 맞는 장르는 무엇이라과 생각하나요?
허: 사실 입시 준비를 할 때는 좋은 학교가 최우선이었어요. 제가 원하던 학교에 입학한 형들을 보면 모두 노래를 잘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노래를 배워서 뮤지컬을 전공했죠. 그런데 저는 연기에 더 파고들고 싶은데 뮤지컬은 장르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집중도가 분산되잖아요. 이도 저도 안 되는 느낌이 들었어요. 양적으로는 뮤지컬을 훨씬 많이 했지만, 장르적인 특성에서는 저는 연극이 더 잘 맞았던 것 같아요.
본인의 선호도가 높은 연극에서 스스로 느꼈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소개해주세요.
허: 장점부터 말하자면, 연극은 무대에서 관객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하잖아요. 제가 무언가를 선보였을 때 즉각적인 반응을 확인할 수 있죠. 슬픈 장면에서는 관객들이 훌쩍이기도 하고 재미있는 장면에서는 웃음소리를 들을 수 있듯이요. 관객을 다르게 표현하면 소비자이기 때문에, 소비자의 니즈를 바로 파악해서 수정, 보완해 나갈 수 있는 점도 장점과 연결될 수 있겠네요.
단점은 실시간으로 관객들과 소통하다 보니까, 작품의 주제가 흔들릴 때가 있어요. 실제로 제가 경험한 적도 있어요. 관객들의 기호에 맞추다 보니까 본질을 벗어나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당시에는 어쩔 수 없이 다수의 의견을 따라가긴 했지만,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기에 작품의 뿌리인 주제가 흔들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영화, 드라마, 유튜브 그리고 OTT 서비스 같은 영상 매체에서 느꼈던 장점과 단점도 있을까요?
허: 연극처럼 다 같이 모여 연습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현장 분위기, 상대 배우와의 호흡, 의사 등을 반영하다 보면 제 해석이 부족할 때도 있거든요. 결과물을 바로 선보이는 게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죠.
단점은 잘 모르겠어요. 다른 선배님들이 방송에서 하는 말씀을 빌리자면, 대본을 보고 촬영할 때는 좋은 작품이 나오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결과물로써는 그에 미치지 못할 때가 있다고 하더라고요. 왜냐하면 촬영이 모두 끝나고 편집된 상태로 관객들을 만나기 때문인 것 같아요. 연기가 정말 좋아도 편집에서 모두 표현되지 않을 수 있고, 연기도 편집도 좋았지만 관객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는 거죠.
많은 배우들이 영감을 얻는다는 표현을 사용하잖아요. 영진님은 보통 어디서 영감을 얻고 있나요?
허: 연기를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을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어요. 한 사람을 쭉 쳐다보면서 그 사람의 성격을 예상해보기도 하고요. 사람마다 각자의 말투와 행동이 있거든요. ‘나중에 비슷한 역할을 맡으면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모든 사람을 관찰하지는 않고 뭔가 달라 보이는 사람들을 관찰해요. 예를 들면 한 남자분이 여자분께 말을 걸까 말까 망설이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마침내 번호를 물어봤지만 거절당할 때의 눈빛과 공기를 관찰하는 거죠. 또 지하철을 타면 핸드폰 보는 척하면서 여자분을 쳐다보는 남자들이 거의 매번 있거든요.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저랑 눈 마주치면 다시 핸드폰 하는 척하고. 이러한 상황들이 저는 재미있더라고요(웃음). 그리고 작품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들으며 영감을 받기도 해요. 하지만 사람들에게 얻는 영감이 대부분인 것 같아요.
작품과 인물에 맞는 음악을 찾아보는 걸까요?
허: 그렇죠. 제가 작년에 블랙코미디 작품을 했는데 문득 서커스가 떠오르더라고요. 서커스가 즐겁고 행복해 보이는데 이상하게 피에로를 보면 무서운 느낌도 들잖아요. 블랙코미디가 서커스와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유튜브에 서커스를 검색해서 관련 음악을 계속 들었어요. 실제로 비슷한 느낌의 음악이 영화 예고편에 사용되기도 했고요. 모든 촬영 현장에 가보진 못했지만 ‘내가 생각한 것과 비슷하구나’ 생각했죠.
연기를 하며 얻게 된 직업적 철학도 있나요?
허: ‘배우는 신비로워야 하고, 아무나 할 수 없는 직업이다’라는 말도 있는데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연예인, 스태프 갑질 사건이 화재가 되기도 하잖아요. 이런 이유 중 하나가 당사자는 본인이 특별한 사람이고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비롯됐다고 생각해요. 수만 가지 직업이 그렇듯이, 배우도 연기라는 기술을 이용하여 돈을 버는 직업일 뿐이거든요. 다 똑같은 사람이고요. 그래서 좋은 사람이 되어야 좋은 배우가 된다는 말이, 상투적이지만 가장 정확한 말이라고 생각해요.
상업 영화를 처음 작업했을 당시, 모든 스태프분들이 제가 누군지 모르셨을 텐데도 정말 잘 챙겨주셨어요. 너무 감사했지만 ‘내가 여기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면, 나도 그런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동시에 들어서 무섭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스스로 이런 생각을 더 많이 해요. ‘영진아 너 지금 대단한 일 하는 거 아니야’라고요.
‘좋은 사람이 좋은 배우다’라는 표현을 했는데요. 좋은 배우에는 겸손함이라는 마음가짐을 포함해 가져야 할 기술적 태도도 있을 것 같아요.
허: 겸손함이라는 마음가짐과 더불어 자기가 해야 할 바를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해내는 배우가 좋은 배우라고 생각해요. 연기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과 호흡을 맞추는 작업이거든요. 주어진 상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강약을 조절하며 주고받는 거죠. 예를 들자면 나보다 상대 배우가 돋보여야 하는 장면에서는, 내가 더 잘 보이려고 넘치는 연기를 하면 신 전체를 망치게 되는 것처럼요. 영화나 드라마라면 편집하거나 다시 촬영하면 되는데, 연극과 같은 무대에서는 아니거든요. 생각보다 이런 사람들이 많아요. 강한 인상으로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싶은 욕심이 과하면 작품 전체를 망치게 되기 때문에 지양해야 할 태도죠.
처음 자기소개로 ‘연기하는 허영진입니다.’라고 해주셨는데요. 배우라는 직업에 초점을 맞춰 새롭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허: 도화지 같은 배우라고 표현할 수 있겠네요. 사람들이 어떤 역할을 해도 다 잘 어울린다고 해요. 저도 한 가지 이미지보다 다양한 모습을 선보이길 원하고요. 앞에서 사람들을 관찰한다고 했잖아요. 이로 인해 스스로 쌓인 빅데이터가 정말 많은데, 이 데이터를 다양한 모습으로 연기에 녹여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웃음).
보통 연기를 시작하면 주인공을 하고 싶어 하는데요. 반대로 저는 주인공에 흥미가 적었어요. 뭔가 역할이 정해진 것 같더라고요.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습, 멋진 모습만 보여줘야 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재미를 줄 수 있는 다양한 역할을 주로 맡았어요. 재미를 주는 역할을 조금 더 설명하자면, 제 해석을 더 많이 녹여낼 수 있는 역할을 의미해요. 여러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점에서 흥미를 느꼈어요. 이렇게 다양한 역할을 맡다 보니 반대로 주인공을 연기하는 건 쉽더라고요. 반대로 주인공만 주로 했던 친구들은 제가 했던 연기를 어려워하더라고요.
다양한 역할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허: 대학교에서 선보였던 창작 뮤지컬이 기억나는데요. 실존 인물인 아프리카 르완다 부족의 이야기예요. 부족장님이 한국에 오셔서 직접 만나기도 했어요. 르완다라는 나라도 저에게는 생소한데, 살아있는 실존인물을 연기한다는 특별한 경험이 큰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텍스트로 작품을 받아들이는 것과 실존인물에게 듣는 이야기는 정말 다르더라고요. 내용도 더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고 당사자가 느꼈던 감정을 느낄 수도 있었죠. 물론 이때도 관찰을 하며 그분의 습관 같은 것들을 연기로 가져오기도 했고요(웃음).
좋아하는 작품이나 장르는 무엇인가요?
허: 주제 의식이 명확한 작품보다 생각에 잠기게 하는 작품을 좋아해요. 이창동 감독님의 영화 <버닝>이 좋은 예가 되겠네요. 처음에 영화를 보고 ‘그래서 뭐? 이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이 원작인 것을 알고 난 후 책도 읽었는데, 더 많은 물음표만 남기더라고요. 그래서 영화관에서 다섯 번 관람했어요. 스스로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의 해석을 찾아보기도 했는데요. 모두가 다르더라고요. 각자의 시선과 가치관, 처한 환경이나 감정에 따라서 작품이 다양하게 해석되는 게 재밌더라고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님의 영화도 좋아해요. 영화를 보고 난 후 스토리가 이해되지 않거나 많은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캐릭터의 행동이나 화면에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할 정도로 감독님만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담아놨거든요. 원인과 결과를 따라가면서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감독님의 의도를 유추하는 게 재밌더라고요.
10년 넘게 배우의 길을 걷고 있잖아요. 본인이 좋아서 하는 일에도 장점만 있진 않을 것 같은데요. 오히려 장점과 단점을 더 명확히 구분하고 있을 것 같아요.
허: 시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어떤 마음으로 임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저는 10년 넘게 진심으로 공부했기 때문에 연기에 대한 전문성이 생긴 게 장점일 것 같아요.
반대로 단점은 노력에 따른 보상을 확신할 수 없다는 거예요. 주변에 잘 풀리지 않아서 ‘이걸 그만두면 뭘 해야 하지? 내가 할 줄 아는 건 이것뿐인데.’라는 막막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이 있거든요. 한 우물만 파다 보니까 사고의 흐름이 연기에만 멈춰 있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일부러 다양한 사람을 만나려고 해요.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분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어요.
배우라는 직업을 지속할 수 있겠다는 결심을 갖게 된 계기는요?
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처음부터 배우라는 직업이 저와 잘 맞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직업을 지속하느냐 마느냐는 다른 문제더라고요. 지금도 경제활동을 위해 배우와 다른 일을 겸하고 있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배우로서 돈을 벌며 지속해 나가는 걸 보면 ‘내가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좌절의 순간이나 슬럼프가 찾아왔을 때, 이런 만족이나 성과 없이 포기해야 할 이유만 찾다 보면 정말 포기하게 되거든요.
연기를 제외한 다른 방법으로 본인의 감정이나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기도 하나요?
허: 한 번은 그림을 그린 적이 있어요. ‘글처럼 명확한 형태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내 감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는 갤러리나 미술관에 가도 일부러 작품 해석을 읽지 않거든요. 연기처럼 저의 그림을 통해 사람들이 생각하게 하고 싶다는 마음도 가져봤어요.
스스로 사고하며 작품을 해석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허: 그렇죠. 저는 모든 것의 이유를 끝없이 파고들었어요. 1+1=2라는 간단한 식도 ‘왜?’를 붙여가며 끝까지 파고드는 연습을 많이 했어요. 연습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저에게는 놀이였어요. 이해가 안 되고 말이 안 돼도, 계속 답을 찾다 보니까 어떤 문제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보통 책에 답이 있었어요.
어떤 책을 주로 읽는지 궁금한데요. 최근에 읽은 책은 무엇인가요?
허: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수사학>이라는 책인데요. 너무 어렵더라고요(웃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는 데다가 책도 두껍더라고요. 꾸역꾸역 페이지를 넘기면서 기원전 사람들이 보고 느꼈던 점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게 신기했어요.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요.
앞에서 잠시 경제활동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현재 배우활동 외 어떤 경제활동을 하고 있나요?
허: 다행히 학교에서 뮤지컬을 전공하며 배운 노래로 결혼식 축가를 부르고 있어요. 평일에는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요. 오늘도 아침에 잠깐 하고 왔어요.
사실 앞의 질문은 오디션에 대해 묻고 싶어서 인데요. 오디션 날짜가 정기적으로 정해진 것도 아니고 급작스럽게 공고가 나기도 할 것 같거든요.
허: 오디션 날짜가 확정되면 일하는 곳에 먼저 양해를 구해요. 너무 감사하게도 오디션이 먼저니까, 잘하고 오라는 말씀을 해주세요. 지금까지 모든 분들이 이렇게 응원해 주셨어요. 사실 민폐가 될 수 있는데 제 입장을 이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연기 수업을 하기도 하잖아요. 연기를 가르치다 보면 다양한 상황이 있을 것 같은데요.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하나 소개해주세요.
허: 연기를 공부한 게 아닌 동아리나 취미활동을 통해 무대에 서야 하거나, 자신감을 기르고 싶다는 이유로 저에게 의뢰를 주세요. 그런 분들께는 이론적인 부분보다는 연기에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수업을 진행했어요.
그중에서 기억에 남는 한 분이 있는데요.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를 읽고 감동받았다는 여자친구를 위해서, 작품 속 장면을 연기를 통해 보여주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작품 속 주인공의 대사를 함께 찾고 고르면서 연기를 지도했죠. 잘하셨는지 모르겠어요. 여건이 되면 영상을 찍어서 보내달라고 했는데 이후에 연락이 오지 않아서요(웃음).
마지막 질문입니다. 배우라는 직업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길 바라나요?
허: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배우라는 직업에 대해 가진 편견이 있잖아요. 가십거리로 다루는 부정적인 부분이 커서 안 좋은 인식이 큰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모든 직업에 있어서 이런 사람 저런 사람 있듯이, 배우라는 직업 안에서도 진심으로 공부하고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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