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현 Jan 11. 2023

평소와 다른 점심을 먹었다.

평범하지만 분명 다른 오늘

몸이 힘들 때보다 마음이 힘들 때 나는 곧잘 넘어진다. 12월부터 쏟아지는 주문양에 정신없이 제품을 만들다보니 어느 순간 모든 일상이 멈춰버렸다. 일단 긴급한 일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니 1순위는 일이었다. 그덕에 이현이는 겨울방학기간 1주일동안 할머니 집에 가 있었다. 일주일에 2~3번 봐주시기에 이현이는 잘 지냈지만 엄마가 꽤나 고생하셨다. A형 독감까지 걸리는 바람에 더더욱 컨디션도 좋지 않으신 데, 바쁜 딸을 위해 언제나 그렇듯 희생하셨다.


그런 일상들이 지나가고 조금은 여유가 생긴 오늘, 느닷없이 힘이 쭉 빠졌다. 여유가 생겼으면 힘이 날 만도 한데 모든 것이 너무 엉망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힘이 쭉 빠져버렸다. 지난 주부터 내내 고생한 구내염 때문에 입맛도 없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누군가는 라멘집으로, 누군가는 카레집으로 점심을 먹으러 간다는데 아무 것도 먹고 싶지가 않았다. 알아서 먹겠다고 말했지만 한없이 구렁텅이 속으로 빠지면서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 하고 있을 때 초연님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무 것도 안 드시려고 하는 건 아니죠? 저희도 그냥 때우는 거예요."


내색을 안하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다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허를 찔렸다. 밥을 먹고 커피를 사다준다고 했는데 내가 밥 먹고 사오겠다고 하니 "설마, 커피로 대신 하려는 건 아니죠?" 와- 어떻게 알았지? 순간 이 모든 것이 간파 당했다는 생각. 진짜 대충 김밥으로 때울까, 아님 그냥 카페모카 같은 열량 높고 배부른 음료를 마실까 생각했는데 다 들켜버렸다. 말은 계속 아니라고 했지만 실상 나는 그냥 나를 챙기지 않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게 되자 갑자기 스스로를 너무 함부로 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 되겠다. 나를 좀 챙겨야겠다. 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비건 식당에 가서 '두유들깨크림파스타'를 시켰다. 누군가 주문한 토마토스튜향이 너무 좋았지만 구내염이 다 낫으면 먹어야지, 생각했다. 자극적이지 않고 건강한 맛, 힘이 조금 나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커피를 사러 '히트커피 로스터리'에 가서 처음으로 '카페모카'를 시켰다. 달달한 음료가 즐거운 기운을 줄 것 같았다. 주문을 하고 음료를 기다리는데 문자가 왔다. 


- 마음산책 북클럽에 가입되었습니다.


갑자기 울컥 눈물이 나왔다. 나는 아무 것도 뜻대로 되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나은 방향으로 흐르는 무언가가 분명 내 곁에 있었다. 스스로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해서 좋은 것들이 주변에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 순간 번뜩 '이토록 평범한 세계'가 떠올랐다.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일어났고, 그 덕에 일어났어야 할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 


그렇게 나는 오늘 점심을 먹었다. 평소라면 먹지 않았을 그런 점심.

매거진의 이전글 타인의 삶을 볼 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