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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현 Mar 01. 2024

될 거예요, 가 아니라 돼요

나주에 대하여, 김화진


솔직하다는 건 굉장히 용기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솔직함'을 표방했지만 오롯이 마음을 드러내며 살진 못했다. 언제나 적당한 '선'이 존재했다. 그래서 더 좋아하지도, 더 슬퍼하지도 못한 채 도무지 알 수 없는 표정과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 지금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받아들였지만, 이삼 십 대의 나는 오랫동안 스스로 각색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뭐든 더 오래 좋아했고, 좀 오래 슬퍼했다(혼자서).


저는 아무도 상처 주지 않아도 알아서 상처를 받는 능력이 있어요. 그리고 그 상처를 무시하거나 덮어놓지 않고 내내 뚫어져라 바라보는 습관도 있고요. 아주 최악이죠?

나주에 대하여 '정체기' p.192


나주에 대하여, 김화진 (문학동네)



총 여덟 편의 단편 소설로 이루어진 '나주에 대하여'는 이전에 읽었던 어떤 소설들보다 '솔직한' 사람들의 마음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이별 소식을 한 달 뒤에 친구들에게 고지(?) 하는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자존심'이 상했다. '걔와 헤어지는 거 하나도 안 슬펐어. 어차피 걘 나한테 그렇게 대단한 존재 아니었잖아.' 누가 보면 세상 쿨한 사람이었지만 사실 난, 진짜 이별을 할 줄 몰랐다. 아니지, 진짜 사랑을 할 줄 몰랐던 거지. 


울면 진짜 이상한 거야. 나중에 떠올리면 너무 억울할 거야. 천희는 별생각도 없는데 혼자 운다는 건 진짜 자존심 상하는 일이야. (중간 생략) 천희는 안 그랬을 거야. 내가 울어도 우스워하거나...... 뻐기지 않았을 거야. 그리고 그저 천희가 떠난다는 사실에만 집중했다. 천희가 떠나서 나는 슬프다. 그 문장만을 생각하며 단순하게 슬퍼할 수 있었다. 단순하게 슬퍼할 수 있다는 게 그렇게 후련한 일이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나주에 대하여 '새 이야기' p.19


진짜 부러워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솔직하지 못했다. 역시 '자존심'이 상해서. 부러워하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더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생각이나 행동들이 나에게는 어떤 의미도, 영향도 없다는 듯이 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이. 내 안에 꿈틀거리는 못난 마음을 모른 척했다. 더 태연한 척, 더 담담한 척하다 보니 어느새 내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때, 오히려 네가 너무 부럽다고, 배우고 싶다고 말했으면 뭔가 좀 달라졌을까.


너를 좋아하고 싶었다. 그 마음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너를 좋아하고 싶다는 강렬한 마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었다. 위선인지 위악인지 가릴 수 없었다. 다만 이것은 이상한가?라고 물었다. 아닐 거라고, 똑같은 상황에 데려다 놓으면 나와 똑같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나주에 대하여 '나주에 대하여' p.51


야, 너는 그러지 좀 마. 예전부터 그랬어. 우리가 멋지다고 생각하는 거 혼자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그럼 보는 사람 얼마나 기분 복잡해지는 줄 아니? 그러지 좀 마. 신나면 신난다고 하고 기쁘면 기쁘다고 말해. 

나주에 대하여 '꿈과 요리' p.103


너한테 드러내는 거, 너한테 보여주는 게 사람 다가 아니야. 나는, 너한테는 쑥스러워서 그냥 별거 아니야 하고 말해도 집에 돌아가서 나 혼자 잠자리에 누워서 네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벅차할 거야. 네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지 마. 

나주에 대하여 '꿈과 요리' p.104


서로 아픈 부분을 보여줘야만 친구가 된다는 것? 내가 너무 건강한 사람처럼 보일 때는 오히려 나를 조금 배척한다는 것? 아픈 사람들이 자기 말고 다른 사람들은 아파본 적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을 때?

나주에 대하여 '척출기' p.163


...... 지영아, 자기가 하는 짓, 떠벌리는 말, 그게 다 질투라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사람은 없어.

나주에 대하여 '침묵의 사자' p.271


나에겐 너그러우면서 타인에겐 냉정한 마음. 나도 타인에 대해 모르면서 타인이 나에 대해 안다고 하면 그걸 또 걸고넘어져서 '너는 절대 몰라.' 하는 치졸한 마음. 초라하고 치사한 그 마음이, 사실은 누구에게나 있다는 걸 알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일까. 여전히 나는 나의 마음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축하하는 것도, 누군가를 진정으로 위로하는 것도 잘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마음이 좋아진 건지,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건지.



대충 다녀요, 은영 씨. 너무 마음에 들려고 하지 말고. 힘들이지 말고.
예은은 그렇게 덧붙였다. 그 순간 은영은 무너지는 것 같기도 했고 다시 살아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때는 그 느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는데, 필라테스 강사인 지금은 알고 있었다. 긴장했던 몸이 이완되는 느낌. 예은은 은영이 아는 사람 중 가장 서브텍스트가 없는 사람이었다. 있는 그대로 말했고 말하지 않은 것을 알아달라고 하지 않았다. (중간 생략) 예은은 행간을 읽어내는 데 지쳐 있던 은영에게 유일한 숨 쉴 곳이었다.

나주에 대하여 '근육의 모양' p.135 


선배, 저는요...... 사실 사람들이 좋아요.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저를 좋아한다는 게 좋아요. 이런 걸 좋아한다는 사실이 너무 촌스럽고 의존적이고 속이 빈 것 같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서 그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도 가끔 이렇게 털어놓고 싶어 져요. 저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가 저를 좋아하는 일이, 몹시 중요해요.

나주에 대하여 '쉬운 마음' p.240 


하지만 나 역시 사람들이 좋다.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아가고 싶다. 어쩌면 계속 실패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될 거예요.'가 아니라 '돼요.'라는 말(나주에 대하여 '근육의 모양' p.145) 그 명료하고 정확한 말이 마음에 깊이 박힌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좋아하는 마음, 부러워하는 마음을 솔직하게 전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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