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이 들어간 제철 맥주들
4월이다. 나무 위 스며든 연두색이 완연한 녹음이 됐다. 늘어난 햇살과 가벼운 옷차림이 반갑기 그지없다. 하나 더, 4월은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누구보다 설레는 계절이다. 겨우내 조용하던 시장 좌판에서 다채로운 과일들의 향긋한 내음이 풍겨온다.
맥주는 수천 년 동안 인류와 동행했다. 갈증이 날 때, 노동으로 지쳤을 때, 마을 잔치가 있을 때, 오랜만에 친지들을 만났을 때, 맥주는 일상 속에서 함께 했다. 맥주에는 자연스럽게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들이 들어갔다. 로즈메리, 민트, 고수씨앗, 꿀 같은 재료들은 쓴맛과 단맛을 더했고 그 동네만의 맥주가 태어났다.
부재료 중 가장 인기 있는 재료는 과일이었다. 과일의 산미와 단맛은 맥주를 더 맛있게 했다. 제철 과일에 따라 맥주 또한 다른 옷을 입곤 했다. 체리, 라즈베리, 블루베리는 상큼한 신맛과 깊은 향을 입혔고 살구, 자두, 복숭아는 맥주에 없는 색다른 향을 선사했다. 사과와 배처럼 과육이 단단한 과일도 종종 맥주에 첨가되곤 했다. 과일을 만난 맥주는 신데렐라처럼 완전히 새로운 술이 됐다.
오래전부터 신맛 나는 맥주들이 과일과 친했다. 과일 향은 맥주의 산미를 우아하게 다듬었다. 벨기에 전통 맥주 람빅(lambic)이 대표적이다. 젖산 발효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신맛과 야생 효모가 내뿜는 꿈꿈한 향은 과일 향을 만나 섬세하고 부드럽게 변했다.
체리가 들어간 크릭 람빅(kriek lambic)을 비롯해 라즈베리가 들어간 프람보아즈 람빅(Framboise lambic), 복숭아가 들어간 뻬슈 람빅(peche lambic)은 많은 사랑을 받는 프룻 람빅이다. 이밖에 블랙커런트(cassis), 사과(pomme), 살구(abricot), 포도(druif), 자두(plum), 블루베리(myrtille) 등 대부분 과일들을 람빅에서 만날 수 있다.
또 다른 벨기에 맥주, 플란더스 레드 에일(Flanders red ale)도 프룻 비어 세계를 이끄는 쌍두마차다. 푸더라는 거대한 오크통에서 발효 숙성되어 오묘한 매력을 보여준다. 붉은 과일의 독특한 향과 뭉근한 신맛을 가진 이 맥주는. 체리, 자두, 라즈베리와 찰떡궁합이다. 맥주의 과일 향은 배가 되고 신맛은 선명하게 부각된다.
요즘에는 과일 퓌레가 들어간 맥주들도 흔하게 즐길 수 있다. 라즈베리 스타우트가 이 동네의 스타다. 의외라고? 라즈베리 시럽이 들어간 초콜릿을 먹어본 적이 있다면 단번에 이 조합을 이해할 수 있다. 스타우트 속 라즈베리 향은 초콜릿 향과 만나 새콤한 궁합을 만든다. 체리, 라즈베리 퓌레의 뭉근한 단맛이 스타우트의 쓴맛과 이루는 밸런스는 환상적이다.
스타우트 외에도 과일 농축액이나 퓌레가 첨가된 흥미로운 맥주들도 속속 선보이고 있다. 유자 페일 에일, 오미자 에일처럼 고전적인 스타일부터 망고 IPA, 복분자 복, 수박 맥주 등 새로운 아이디어로 창조된 맥주도 있다.
요즘 과일 값이 금값이다. 차라리 이럴 때 과일을 품고 있는 맥주를 마셔보면 어떨까? 좋아하는 과일이 맥주 속에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경험하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다. 둘을 따로 먹었을 때보다 더 참신한 미각 세계를 만날 수도 있다. 재미있는 프룻 비어의 세계, 그 문을 활짝 열어보자.
과일을 넣은 플랜더스 레드 에일의 왕이다. 생 체리를 잔뜩 넣어 숙성시킨 로덴바흐 카락테루주는 과일을 품은 맥주가 얼마나 고급스럽게 변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오크통에서 수개 월 동안 함께 머물며 서로의 체취를 묻힌 결과는 인간이 만들 수 있는 한계를 뛰어넘는다.
잔을 채우는 크림슨 색은 그 어떤 음료보다 투명하고 검붉다. 짙은 체리 향은 마치 향수처럼 알싸하며, 그 뒤를 적시는 산미는 고급 와인처럼 입안을 감싼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비강과 혀 위에 잔잔히 남아있다. 디저트 맥주의 끝판 왕.
화이트 크로우는 강원도 평창의 맑은 공기와 물로 맥주를 빚는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이다. 화이트 크로우는 평창의 옛 이름인 백오현(白烏縣)에서 따왔다. 그 때문인지 이곳에서 탄생한 라즈베리 스타우트, 밝은 밤은 섬세하고 우아하다.
밝은 밤이라는 이름처럼 라즈베리 향은 스타우트의 바닐라와 초콜릿 향을 밝게 비춘다. 라즈베리는 돋보이지 않지만 이 맥주가 가진 다른 매력들을 조용히 받쳐준다. 다행히 7.9% 알코올이 모든 향을 한껏 끌어올린다. 단맛과 쓴맛이 튀지 않아 마시기 편하다. 잠이 오지 않을 때 한 잔 할 수 있는 완벽한 맥주.
문경새재 끝자락 조용한 산속에 있는 태평양조는 일반적인 맥주 양조장과 사뭇 다르다. 지역 농산물과 동네에서 채취한 효모를 이용해 어디에도 없는 한국 맥주를 선보인다. 와일드 가든 청수는 이름에 뜻이 있다. 양조장 마당에 살고 있는 효모와 안동 청수 포도를 조우시켜 탄생시킨 팜 하우스 에일(farm house ale)이다.
포도 향이 가득할 것 같지만, 의외로 백도, 패션프룻, 레몬그라스 향이 코끝을 뒤 흔든다. 양조장에 살고 있는 야생 효모의 마법이다. 혀 뒤를 지그시 누르는 뚜렷한 산미는 이름 모를 미생물이 주는 덤이다. 흥미로운 건,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이 향미들이 기깔나게 조화를 이룬다는 점이다. 세상 어떤 와인보다 진귀하고 맛있다.
전기협회저널 4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