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2024년 맥주 시장
4월은 결산의 달이다. 좋든 싫든 모든 법인은 지난해 성적표를 받는다. 맥주 회사들의 실적은 소비 시장을 반영한다. 2023년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시장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시기였다. 특히 시장을 떠들썩하게 했던 수제 맥주와 이에 대응하는 대기업 맥주 회사들의 결론이 드러난 해였다.
(사)한국맥주문화협회가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자료를 통해 분석한 2023년 맥주 시장은 3조 7천억 원으로 추정된다. 전체 시장의 71%는 오비맥주, 하이트진로 같은 대기업 맥주가, 24%는 아사히, 하이네켄, 칭따오 같은 대중 수입 맥주가 차지했다. 2022년 2.2%였던 수제 맥주 점유율은 1.4%로 떨어졌다.
2023년 맥주 시장은 성장하지 못했다. 두 거인 오비맥주와 하이트진로 모두 매출이 정체됐고 영업이익도 떨어졌다. 롯데는 절치부심하며 새로운 브랜드를 선보였지만 아직 영향력이 미미하다. 노재팬으로 일본 맥주를 제치고 수입 맥주 시장 선두에 올랐던 하이네켄은 영업적자를 면치 못했고 칭따오는 본토에서 날아온 강펀치를 맞고 휘청거리고 있다.
한때 편의점 매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수제 맥주는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로 들어섰다. 협업에서 길을 잃은 수제 맥주는 여전히 해답을 못 찾고 있다. 코스닥에 상장한 제주맥주는 자동차 부품 업체에 매각됐고 곰표밀맥주를 놓친 세븐브로이도 추락하고 있다. 카브루, 플래티넘도 모두 적자의 늪에 허덕이고 있다.
시장 부진의 전반적인 요인은 원재료 상승과 소비자 관심 하락에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유가와 물류비 상승은 재료비를 30% 이상 올렸다. 트렌드로 떠오른 칵테일 혼성주, 특히 하이볼은 매대에서 맥주를 대신했다. 국내 경제 하락도 맥주 소비를 위축시켰다. 줄어든 외식수요는 유흥시장을 어렵게 했다. 이 영향으로 수입 맥주와 크래프트 맥주가 작년 하반기부터 타격을 입었다.
유일하게 함박웃음을 지은 나라는 일본이다. 노재팬은 사라졌다. 아사히 성적표에는 400% 매출이라는 숫자가 찍혔다. 삿포로와 기린도 컴백했다. 편의점과 마트 매대에서 어렵지 않게 히라가나를 볼 수 있다.
한국 맥주 시장은 대기업 독과점이다. 오비맥주가 50%, 하이트진로가 20% 이상 차지한다. 하이트진로가 작년에 출시한 켈리는 오비가 앉아있는 왕좌를 겨냥한 창이었다. 맥스의 단종은 2019년 테라에서 얻은 자신감에서 나왔다. 보리맥아 100%로 만들어진 맥스는 마니아층이 두터웠다. 하지만 오비맥주와 전쟁에서 새로운 무기가 필요했던 하이트진로는 맥스와 17년 만에 헤어질 결심을 했다.
켈리에 사활을 걸었던 하이트진로의 성적표는 맥주 업계의 관심사였다. 테라 출시로 출렁거렸던 오비맥주의 모습이 재현됐을까. 작년 하이트진로 맥주부문 매출액은 8200억으로 재작년에 비해 400억 정도 증가했다. 전체 광고선전비가 600억 정도 증가한데 비해 초라한 성적이다. 그 여파는 영업이익으로 번졌다. 작년 하이트진로의 영업이익은 1200억으로 전년에 비해 무려 700억이나 급감했다.
오비맥주도 주춤했다. 시장 일인자 자리를 수성했지만 매출은 하락했다. 수입 맥주를 포함한 작년 매출은 1조 5천5백억으로 전년에 비해 100억 줄었고, 영업이익은 무려 1200억이 하락했다. 광고선전비가 전년 대비 200억 늘어난 요인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매출원가 상승에 있다. 코로나 팬데믹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급격히 상승한 재료비의 영향을 피하기 어려웠다. 공장가동률이 70%를 상회하는 하이트진로도 이 부분에서는 동병상련이다.
오비맥주에게 긍정적인 부분은 켈리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았다는 점이다. 하이트진로는 켈리를 출시하며 내심 1조 매출을 노렸지만 실패했다. 오비맥주는 하이트진로의 켈리와 테라의 공세를 카스와 한맥으로 대응했다. 광고마케팅을 강화하고 소비자 경험을 높였던 맥주 팝업 스토어 전략이 켈리의 창끝을 무디게 했다.
국내 생산 맥주로는 세 번째 자리에 있는 롯데도 라인업을 정리했다. 클라우드와 클라우드 생은 소비자에게 혼선을 주는 브랜드였다. 다른 맥주였지만 이름이 비슷했다. 롯데는 클라우드 생을 포기하고 젊은 층을 겨냥한 클라우드 크러시를 작년 연말 출시했다.
롯데칠성음료 맥주 부문 작년 매출은 890억으로 전년대비 350억 정도 떨어졌다. 곰표밀맥주 위탁생산 수요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롯데의 시장 지배력이 강화되기는 힘들 것 같다. 롯데칠성음료에서 맥주 사업에 힘을 실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상품기획과 영업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롯데아사히와 대비되는 모습이다.
수입 맥주 시장이 제자리를 찾았다. 노재팬 이후 사라졌던 일본 맥주가 예상대로 1위를 했다. 2022년 320억 매출을 올렸던 아사히는 무려 1380억, 400% 매출 상승을 기록하며 전체 맥주 시장 3위로 우뚝 섰다. 일본 맥주 인기가 높은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매년 7백만 명이 일본으로 여행을 간다. 식도락 경험은 미각에 남아있기 마련이다. 늘어가는 이자카야도 일본 맥주 판매에 힘이 된다.
1, 2위였던 하이네켄과 칭따오는 힘을 잃었다. 네덜란드에서 수입되는 하이네켄은 일본 맥주에게 뺨을 제대로 맞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운송비와 환율을 높였다. 2022년 1370억에서 작년 111억으로 매출이 떨어졌고 영업이익도 35억 적자 전환했다.
칭따오는 중국 본토에서 폭탄을 맞았다. 관리자가 하역이 완료된 트럭에 소변을 보는 사진이 공개되며 신뢰를 잃었다. 매출은 1000억에서 800억 대로 하락했고 81억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적절한 사과가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식품회사의 위기관리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반전이 없다면 당분간 칭따오를 비롯한 중국 맥주의 인기 회복은 요원해 보인다.
아사히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수입 맥주 시장은 편의점과 마트가 그은 가격 저항선이 존재하는 한 성장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4캔 만원이 만이천 원이 됐지만 몇 캔에 몇 천 원 프로모션은 수시로 이뤄지고 있다. 상대적으로 마진이 높은 유흥시장은 소비침체로 당분간 회복될 것 같지 않다. 나쁜 소식만 있는 건 아니다. 다양한 브랜드로 복잡했던 시장이 단순해졌다, 그만큼 경쟁 리스크가 줄어든 셈이다. 물론 다양한 수입 맥주들의 실종은 소비자들에게는 좋은 소식이 아니다.
빛이 보이지 않는다. 애초에 잘 못된 길이라는 사실을 알았어야 했다. 편의점에 진출했던 수제 맥주들이 깜깜한 터널로 들어섰다. 적자임에도 코스닥 상장을 허락받았던 제주 맥주는 자본 잠식 상태다. 3000원이었던 주가는 1000원 밑으로 내려갔다.
3년 전 280억이었던 매출은 재작년에는 230억, 작년에는 220억으로 계속 줄고 있다. 영업 적자 폭은 70억, 110억, 110억으로 줄어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심각한 상태다. 더구나 제주 맥주는 유니콘 상장을 했기 때문에 수익을 내지 못하면 내년에 상장 철폐가 된다. 결국 올해 최대주주 엠비에이치홀딩스와 대표이사가 보유한 지분을 한 자동차 부품회사에 전량 매각했다.
한때 폭발적인 성장을 했던 세븐브로이도 적자 전환했다. 곰표밀맥주를 제주 맥주에 빼앗기면서 동력을 잃었다. 2021년 400억이었던 매출은 작년 120억으로 급감했다. 영업이익도 61억 적자로 돌아섰다. 코스닥 상장에 빨간 불이 켜지자 리스크가 높은 코넥스에 상장했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드물다.
10년 전 수제 맥주 리더였던 카브루와 플래티넘도 상태가 안 좋기는 매한가지다. 공장을 매각하며 반전을 노린 카브루의 매출은 60억으로 제자리다. 그나마 당기순손실이 23억에서 10억으로 줄었다는 게 희소식이다. 예산에 신축 양조장을 세운 플래티넘은 32억 매출에 7.7억 당기순손실을 보고 있다.
수제 맥주 회사들의 미래가 암울한 이유는 답을 찾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채널의 한계로 매출 확장이 어렵고 비용 구조가 높다는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수제 맥주는 라거, 페일 에일, 스타우트, IPA처럼 다양한 라인업을 갖고 있다. 공정이 수시로 바뀌고 다양한 맥아와 홉이 사용된다. 생산 단가가 높을 수밖에 없다. 라거 맥주 한 종류만 생산하며 규모의 경제를 누리는 대기업과 단가 경쟁이 불가능하다.
비용이 높으면 브랜드 가치를 높여 판매 가격을 높이거나 매출을 늘리면 된다. 하지만 편의점과 마트라는 대중 채널로 들어서면 가격에 저항을 받는다. 프리미엄과 대중성을 동시에 잡으려 했던 전략의 패착이다. 장밋빛 미래를 그리며 너무 쉬운 길을 가려고 했다.
거의 모든 수제 맥주 회사들이 맥주뿐만 아니라 막걸리, 하이볼 등 다른 술을 출시하고 있다. 맥주라는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생존을 위한 발버둥을 치고 있다. 10년 동안 펼쳐졌던 수제 맥주 사가의 종말이다. 한 시대가 이렇게 끝났다.
2024년 경제 상황으로 볼 때, 맥주 시장의 성장은 요원하다. 고물가, 고환율로 소비가 위축됐고 내수가 위험하다. 큰 기업부터 작은 기업까지 적극적인 투자를 꺼리고 있다. 대기업 맥주는 외연확장보다 한 템포 쉬어갈 것이다. 오비맥주는 편의점 위탁생산 맥주를 만들던 KCB를 없앴다. 구스아일랜드 브루펍에 대한 마케팅 예산도 줄였다. 하이트진로와 롯데 또한 공격적 마케팅 대신 팝업 스토어나 캠페인 같이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수입 맥주 시장은 각자 입은 상처 치료에 주력할 듯하다. 일본 맥주들은 노재팬 운동으로 무너졌던 조직을 회복하는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유럽 맥주들은 중동 전쟁으로 또다시 긴장하고 있다. 치솟는 환율도 걱정거리다. 내실을 다지며 차후 기회를 엿볼 것이다. 이는 아직 피를 흘리고 있는 칭따오도 마찬가지다.
제주 맥주를 비롯해 세븐브로이, 카브루 등 시장을 주도했던 회사들은 이제 리더십을 잃었다. 맥주 정체성을 버린 순간 문화를 이끌 능력도 사라졌다. 수제 맥주 회사들은 결정을 해야 한다. 대중 맥주의 길과 프리미엄의 길, 둘 다 잡을 수 없다. 특단의 대책은 없다. 결국 버티는 회사가 남아있는 ‘수제 맥주’ 카테고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다. 라거 일변도였던 시장에 문화는 남았다. 소비자들은 이전보다 다채로운 맥주를 즐기고 있다. IPA, 포터, 사우어 에일처럼 10년 전만 해도 생소했던 용어들도 종종 눈에 띈다. 펍에서 IPA를 마시는 중년의 모습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치킨에 생맥주만 마셨던 문화를 벗어나 취향에 따라 맥주를 즐기는 시대가 도래한 건 확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크래프트 맥주들이 프리미엄 시장에 안착할 가능성이 있다. 시장은 대기업 맥주들이 주도하겠지만 짧게는 3년 안에 한국 크래프트 맥주가 문화 리더십을 잡을 것이다. 2024년은 대기업 맥주를 위시한 대중 시장부터 크래프트 맥주가 중심인 프리미엄 시장까지 새로운 질서로 재편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