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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한샘 Jul 06. 2024

조선 반도에 맥주공장이 들어서다

경성, 평양, 인천의 맥주 공장 쟁탈기

조선에서 소비된 맥주

일 년에 사십이만삼천 원

...

우리 죠션에는 맥주 제조소가 업고 전부 외국에서 수입되는 것뿐인데 일본으로부터 수입되는 것이 전 수입에 구할 분이나 되며 그 죵류는 기린맥주와 사구라맥주와 삿보로맥주의 삼종이오...

<조선일보> 1924년 5월 7일 


우리 조상은 언제 처음 맥주를 맛보았을까? 정확한 기록은 없다. 1871년 신미양요 때 맥주병을 안고 있는 강화도 하급 관리관 김진성의 사진이 남아있지만, 그가 맥주를 마신 최초의 조선 사람인지는 불명확하다. 1876년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이 된 뒤, 맥주가 조금씩 들어왔다는 설은 확실한 것 같다. 비슷한 시기에 삿포로, 기린, 에비스 같은 맥주들이 일본에 출시됐다. 1993년 8월 7일 동아일보 ‘정도 600년 서울 재발견’에 따르면 19세기말 일본인거주지에 들어온 삿포로가 조선에 첫 선을 보인 맥주라고 한다. 


맥주를 품고 있는 김진성 씨


1882년과 1883년 각각 조선과 수호통상협약을 맺은 미국과 영국도 필경 맥주를 가지고 왔을 것이다. 1884년 한국에 총영사관을 설립한 독일은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물론 서양 맥주들이 일반인들에게 판매되진 않았을 것이다. 고급 요정에서 소비된 대부분 맥주는 일본산이었다. <술자리보다 재미있는 우리 술 이야기> 이대형 박사는 1901년 6월 19일 자 <황성신문> 광고면에 점포 구옥상전에 맥주가 수입됐다는 광고가 실렸고 1905년에 맥주 수입량이 1566킬로 리터(kl)에 달했다고 전했다. 


맥주가 본격적으로 조선 땅에 판매된 시기는 1905년 을사조약 이후다. 삿포로, 기린, 에비스 같은 일본 맥주 회사들이 정식으로 수입됐다. 조선 내 일본인과 상류층이 주요 소비층이었다. 가장 적극적인 회사는 기린 맥주였다. 1908년 명치옥이라는 직영 판매 회사를 설립한 뒤, 적극적으로 영업을 전개했다.   


명치옥 기린 광고
명치옥 기린광고

1920년대를 지나며 많은 조선 사람들은 맥주가 어떤 술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맥주 광고가 심심치 않게 실렸고 연재소설에도 맥주가 등장했다. 시민들의 제보란에도 맥주를 마시고 사고 친 내용들이 올라오곤 했다. 조선에 일본이 맥주 회사를 설립한다는 소문이 난 것도 그즈음이었다. 1925년 11월 4일 자 동아일보를 보면 조선의 맥주 수요가 크게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경성 백화점 상품 박물지>(최지혜 저)에 따르면 조선의 맥주 소비량은 1923년 112만 8천 병에서 1928년 696만 병으로 5배 정도 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 땅에 맥주 회사를 세우기로 한 이유는 단순히 소비가 늘어서만은 아니었다. 


1931년 일본은 만주 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운다. 만주국은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위한 괴뢰국가였다. 조선은 일본의 대륙진출을 위한 병참기지였다. 무기, 직물, 식량, 전기를 보급하는 교두보가 됐다. 일본은 전쟁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할 도시가 필요했다. 주세로 재정을 확보하려고도 했다. 맥주는 전시 물자이자 세금을 늘려주는 중요한 재원이었다. 맥주 공장 후보지도 이런 기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맥주 공장, 우리에게 맡겨주시라니까요!


일본맥주회사

경성에 분공장설치

일본맥주회사장 진월공평씨는...대련에 도착하야....삼일간을 체재한 후...

경성에 향할 터이며 경성에 맥주회사분공장을 설치할 일과...

동아일보, 1924. 9. 22.


기사에 언급된 일본맥주회사는 대일본맥주회사다. 1906년 삿포로, 에비스, 아사히의 합병으로 설립된 대일본맥주회사는 갈수록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1921년부터 대일본맥주회사가 조선에 맥주 회사를 세운다는 소문이 들리기 시작했다. 여러 도시들이 후보지 하마평에 올랐다. 제일 먼저 등장한 곳은 평양과 경성이었다. 


맥주공장신설

방금계획중

일본맥주회사의해 조선분공장신설은 수년이래 현안이엿스나...공장을 신설하라면 장소는 경성이나 평양 인대 평양은 수해의 염려가 잇슴으로 주저...결국 공장 후보지는 영등포나 노량진 양지가 되리라고..

<동아일보> 1924. 10. 10.


평양은 위치적 이점을 내세웠다. 경성에 비해 토지가 넓고 지가가 낮다는 면을 어필했다. 하지만 동아일보 기사처럼 수해의 염려가 있었고 무엇보다 전력 공급이 원활치 않았다. 당시 영등포는 경기도에 속해 있었지만 경성과 가까웠다. 전력을 공급하기 쉬웠으며 수질이 좋고 수량이 풍부한 한강이 곁에 있었다. 누가 봐도 경성이 가장 유력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자신들이 제일 적합한 후보지라고 주장하는 지역이 나타났다. 인천이었다. 


맥주사분공장

일설은 인천에 설치

일본맥주회사 분공장을 조선에 설치할 의사가 잇슴으로...답사하든 중 재등총독은 인천방면으로 함이 조흘 뜻을 말하야...인천...덕생원 부근이 선택된 모양이라는 말도 잇다고

<동아일보> 1924. 11. 12.


기사라고 하기에 어딘가 어색하다. 정보가 아니라 희망을 담고 있다. 들은 말을 흘리는 모습이 요즘 언론과 비슷하다. 인천에서는 지역 유지들이 ‘맥주 공장 유치 협의회‘를 설립해 본격적인 로비에 들어갔다. 인천이 맥주 공장에 최적지라는 기사도 연일 이어졌다. 


일맥주분공장

인천서 설치하게 되여 유지가 모혀 선후협의

일본맥주주식회사의 분공장을...후보디로 인천, 평양, 영등포 등디를 선택중인데...인천 유지들은...어느 방면으로 보든지 인천에 설치하는 것이 온당하다...인천유지협의회를 열고...동 회사와 직접 교섭을 하리라더라

<조선일보> 1924. 11. 20.


아예 일본 회사와 직접 담판을 짓겠다는 인천의 열기가 놀랍다. 기업 유치를 위해 전력투구하는 요즘 지자체들과 별 다를 바 없다. 이틀 뒤 동아일보는 인천에서 맥주 공장 유치 협의회가 구성됐다는 소식을 알리며 실행 위원회와 위원장을 선출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이런 열망에도 불구하고 같은 날 조선일보는 ‘맥주공장 부지 경성요업 토지 유망’이라는 기사로 인천의 억장을 무너뜨렸다. 그럼에도 인천은 끈질겼다. 23일 동아일보는 ‘맥주분공장 운동맹렬’이라는 제목을 통해 인천에 맥주 공장이 들어서면 지역 기업 사장들이 후원을 보장하겠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24일 조선일보는 인천에서 직접 일본 맥주 회사로 이런 뜻을 전보로 통지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심지어 동아일보는 1924년 12월 2일 인천상업회의소장이 일본 동경으로 건너가 대일본맥주회사 관계자와 담판을 지었다는 기사를 내보내며 맥주 공장 부지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희망을 건네기도 했다. 이 정도 지성이면 인천이 맥주 공장을 가져가는 게 맞지 않을까. 맥주 공장을 향한 치열한 경쟁의 승자는 누가 될까? 


결과는 채 하루도 싱겁게 끝났다. 12월 3일과 5일 조선일보는 연이어 ‘맥주공장결정 영등포조선요업매수성립’이라는 기사를 게재하며 영등포가 이겼음을 알렸다. 그리고 12월 24일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모두 쐐기를 박는 속보를 전했다. 


맥주공장은 영등포

일본맥주회사공장 문제에 취하야...신미시흥군수의 전보에 의하면 맥주공장기지는 영등포로 결정 되엿다더라

<동아일보> 1924. 12. 24.


결국 대일본맥주회사가 영등포 요업회사 부지를 인수했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조선 내 맥주 공장이 가시화되었다. 인천은 패배한 원인을 수질에서 찾았다. 하지만 애초에 일본의 관심은 병참기지에 유리한 지역에 있었다. 인천은 맥주 재료 수입에 유리했지만 병참기지로는 불리했다. 위치와 수질, 모두 영등포가 우세했다. 맥주 재료는 국내산을 사용할 계획이었다. 1920년 대 후반 영등포에는 맥주 공장뿐만 아니라 여러 중공업 공장들이 속속 들어섰다. 


조선에 맥주 공장이 들어서다.

1933년 조선 맥주 공장

대일본맥주회사는 영등포에 13만 평의 땅을 매입한 뒤 자회사 설립에 들어갔다. 그러나 공장은 금방 추진되지는 않았다. 자본금과 주주참여 등 풀어야 할 현안이 만만치 않았다. 1932년 10월에서야 새로운 맥주 회사 이름을 조선맥주라 하고 신설을 구체화하고 있다는 기사가 떴다. 그런데 조용하던 시장에 갑자기 불이 붙었다. 숨죽여 있던 경쟁사가 갑자기 이빨을 드러낸 것이다. 1933년 2월 22일 조선일보는 ‘기린 맥주공장’이라는 기사를 올리며 영등포에 또 다른 맥주 공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알렸다. 


기린맥주공장

영등포에 신설

기린맥주회사에서는 일본맥주회사와의 대항...영등포에 맥주제조공장을 건설하고자 

부지로서 약 이 만평을 매수하얏는데...

<조선일보> 1933. 2. 22.

기린맥주의 영등포 공장 설립 소식은 지지부진했던 시장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조선맥주는 진행 중인 공장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기린맥주도 일사천리로 소하기린맥주라는 자회사를 세우고 공장 완공에 최선을 다했다. 4개월 뒤 동아일보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가 실린다. 


양대맥주회사 명년초개업

지난 삼월이래 영등포에 건설공사 중인 이대 맥주회사로부터 공사진행상태에 대하야...조선맥주회사공장은 금년 중 전부 완성하고 명년일월로부터 양조에 착수하며 소화기린맥주회사는 다소 늦어서 명년 초 준공하야 삼월로부터 양조에 착수할 예정이라고 한다

<동아일보> 1933. 6. 17.

1933년 소화기린맥주

조선맥주는 1933년 8월 9일 총회를 열고 공식적으로 창립을 알렸다. 자본금 6백만 원에 발행주식 수는 12만 5백 주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주주에 민대식, 박영철, 한상룡 같은 조선인도 있었다는 것이다. 소화기린맥주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해 12월 8일 창립한 소화기린맥주의 자본금은 3백만 원이었고 총 발행 주식 5만 7천 8백 주 중 박승직과 김연수에게 일부 주식을 허용했다. 


이는 총독부의 유화 정책 때문이었다. 내선일체가 주요 목표였던 총독부는 회유정책의 하나로 조선인을 주주로 참여시킨 주식회사 형태를 승인했다. 자칫 일본 독점 자본으로 맥주 공장이 설립되었을 경우, 조선인의 외면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조선인 주주들은 당시 일본의 신망이 두텁거나 사회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기업가들이었다. 참고로 박승직은 해방 이후 소화기린맥주를 불하받아 오비맥주 전신, 동양맥주를 설립한 인물이고, 민대식은 조선맥주를 불하받아 하이트진로의 전신, 조선맥주를 이어간 인물이다. 


조선맥주는 1933년 12월, 소화기린맥주는 이듬해 4월 공장을 완공한 후, 본격적으로 맥주 생산에 들어갔다. 조선의 첫 맥주 공장이 들어선 이후, 맥주 소비는 줄곧 증가했다. 더불어 세금도 늘었다. 맥주는 조선 사람들의 삶에 더 가까워졌다. 

조선맥주에서 생산한 맥주들

조선 사람들은 조선맥주와 소화기린맥주가 양조한 삿포로, 기린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국산품으로 받아들였을까? 조선맥주는 1937년 조선일보 광고에서 자신들의 맥주를 국산품으로 포장했지만 대중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듯하다. 1934년 8월 조선일보 연재 기사 ‘서울 상공계 타령5’를 보면 두 맥주 회사가 우리 기업은 아니라고 못 박고 있다. 맛도 별로였나 보다. 생산 초기이니 그건 이해하자.


서울상공계 타령5

...

맥주

....맥주를 한 곱부쯤은 생각이나는 법. 이 맥주란 이입품뿐이던 것이 영등포에 인접해생긴 양대공장에서 조선산품이라고 떠들고 맨드러 내노코잇지만 이입품보다 승거워서 맥주당은 불평만만. 영등포의 두 공장은 물론 우리네의 기업은 아니다

<조선일보> 1934.8.18.

맥주공장 풍경


맥주공장 풍경

한국 맥주는 20세기 제국 열강 시대의 산물이다. 그것 또한 역사의 한 자락이다. 아시아의 많은 맥주들이 그렇게 터를 잡았다. 중국 칭따오는 독일 자본으로, 일본 기린은 영국 자본으로 필리핀 산미구엘은 스페인 자본으로 시작했다. 영등포에 있던 공장 부지는 아파트가 됐지만 다행히 그 흔적은 남아있다. 이번 주말 시간 나면 산책을 나가보면 어떨까? 한국 맥주의 성지였던, 영등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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