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1 더 무비와 맥주의 상관 관계에 대해
오랜만에 영화 예매를 위해 어플을 열었다. 친절하게도 마지막 본 영화가 무려 2년 전에 개봉한 노량이라고 알려주고 있었다. 스마트 폰을 터치만 하면 각종 영화가 바로 펼쳐지는 시대라 그런가. 요즘 극장에 가는 게 뜸할 뿐만 아니라, 무슨 영화가 개봉하는지 관심도 예전 같지 않다.
어렸을 때 극장은 단순히 영화를 보기 위한 곳이 아니었다. 영화를 고르고 누군가를 만나 극장에 간다는 자체가 기대였고 설렘이었다. 영화는 매개체일 뿐, 꼭 그 영화 때문에 극장에 가지는 않았다. 지금은 다르다. 영화 자체가 목적이 됐다. 그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에 간다. 스마트 폰이나 TV에서 충족시키지 못하는 장면과 사운드가 있는 영화가 극장의 주인공이 된 듯하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선택하는 또 다른 기준이 있다. 난 혼자 극장에서 영화 보는 것을 싫어한다. 혼밥, 혼술, 혼자 여행 등 뭐든지 할 수 있지만, 혼자 극장에 가는 건, 여전히 망설여진다. 어쩔 수 없이 영화를 보기 위해서는 아내와 아들 중 한 명을 꼬셔야 한다.
성인이 된 아들은 이제 눈치가 보인다. 그렇다면 아내를 꼬셔야 하는데, 조건이 까다롭다. 우선 피가 튀기거나 잔인한 영화는 안 된다. 이야기가 늘어지거나 세계관이 깊어도 곤란하다. 그런 영화는 아내에게 수면제와 다름없다. 대본과 연출이 치밀한 영화가 아니라면, 차라리 2시간 내내 아드레날린이 폭발하는 블록버스터가 낫다.
이번에 보려고 하는 ‘F1 더 무비‘도 그 기준을 벗어나지 않았다. 엄청난 스케일의 장면과 사운드를 갖춘 블록버스터. 예고편으로 트랙을 달리는 F1(포뮬러 1) 자동차를 보는 순간,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보라고 만들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브래드 피트가 주연이라니.
자동차는 남자들의 로망이다. 내 유튜브에도 주기적으로 보는 자동차 콘텐츠가 수두룩하다. 그런데 F1을 아시냐고 물어본다면, 대답은 ‘아니요’다. 영화를 보기 전, 기본은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자동차 경주의 역사를 찾아보니, 무려 130년이나 됐다고 한다.
1894년 프랑스 파리-루앙 경주가 시초였다. 이후 1906년 프랑스 르망에서 세계 최초 서킷 경주 ‘그랑프리’(Grand Prix)가 개최되었고, 1930년대 유럽 그랑프리 챔피언쉽(European Grand Prix Championship)으로 이어지며 벤츠, BMW, 아우디, 알파 로메오 등이 참여하는 대회로 성장했다. 세계대전으로 잠시 중단되었던 자동차 경주는 1950년 영국 실버스톤에서 국제 자동차 연맹(FIA)의 주최로 지금의 FI(포뮬러 1)이 시작되면서 세계적인 모터스포츠로 발돋움했다.
그동안 먹고살기에 바빴던 우리에게 F1이 친숙하지 않은 건, 당연하다. 오히려 이토록 짧은 시기에 대한민국 자동차 회사가 세계 3위라는 사실이, 그들에게 더 놀라울 지도 모른다. 자동차 경주의 역사를 찾다 보니, F1에 대해 더 궁금해졌다. 마침 넷플릭스에 F1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자세한 규칙을 모두 파악하기는 힘들었지만, 참가하는 팀과 선수, 승부를 가르는 핵심요소, 그리고 F1 모터스포츠 안팎에 흐르는 갈등과 정치를 대략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현재 F1은 총 10팀으로(내년에는 11팀이 된다) 팀 당 2명, 총 20명의 레이서가 경쟁한다. 전 세계에 단 20명의 선수만 존재하는 스포츠인 것이다. 우승을 하면 포디움이라는 시상대에 올라가는데, 단지 선수만 뛰어나다고 될 일이 아니다. 팀을 이끄는 감독의 전략과 좋은 차를 만드는 엔지니어들이 삼위일체가 되어야 가능하다.
선수들과 소속 팀 간 경쟁구도도 흥미 요소였다. 20개 팀 중 실제 우승을 다투는 팀은 4~5개에 불과했다. 현재 최고의 선수는 레드불 레이싱의 막스 베르스타펜이며 맥라렌의 랜도 노리스와 오스카 피아스트리, 페라리의 루이스 해밀턴과 샤를 르클라르, 메르세데스의 조지 러셀 등이 상위권에서 경쟁을 하고 있었다.
심장을 두드리는 사운드와 엄청난 속도감으로 트랙을 질주하는 오프닝으로 이미 팝콘을 쥔 손에는 살짝 땀이 차기 시작했다. 그래서 영화는 재미있냐고? 네 재미있습니다.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영화는 소니 헤이즈를 연기한 브래드 피트의 원맨쇼였다.
트라우마를 가지고 F1에서 은퇴한 베테랑 드라이버 소니 헤이즈가 야생마 같은 루키와 갈등을 겪지만 결국 존경을 받고, 냉철하던 여성 엔지니어와는 사랑에 빠지고, 패배감에 절어있던 팀에는 승리의 에너지를 안기고, 그래서 마침내 루이스 헤밀턴을 제치고 우승하며 매각 위기에 있던 팀을 구해내는 결말. 솔직히 스토리는 영화를 안 보고도 맞출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선사하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스펙터클한 장면과 사운드는 모든 약점을 덮고도 남았다.
F1은 프랑스 르망 24시와 미국 플로리다 데이토나와 달리 전 세계 21개국, 24개 도시에서 펼쳐진다. 영화는 도시마다 이어지는 화려한 풍경과 그 속을 300km가 넘는 속도로 달리는 레이싱 머신들을 가뿐 호흡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늙었지만 여전히 멋진 브래드 피트의 모습은 스토리 따위는 변방으로 보내버린다.
이렇게 영화에 빠져 현실을 망각하려던 찰나, 갑자기 이성이 돌아왔다. 빠르게 전개되던 영화는 소니 헤이즈와 여성 엔지니어 케이트가 팀에 대한 소통을 하기 위해 만나는 장면에서 갑자기 고요해졌다. 둘은 영국 외곽 어딘가에 있는 펍에서 논쟁을 하고 있었다. 그 순간, 테이블에 놓인 맥주가 나를 현실 세계로 데려다 놓았다.
다른 사람이라면 그냥 넘길 장면이겠지만 나는 어김없이 맥주 촉이 발동했다. 영국 펍, 거기에 노닉 글라스에 담긴 맥주는 앰버 색이니 잉글리시 비터(English bitter)일 것이다. 거품이 없는 모습을 보니 분명 영국 전통 카스크 에일(Cask ale)이 분명했다.
카스크 에일은 영국 전통 방식으로 서빙되는 에일을 말한다. 이 맥주는 양조장에서 1차 발효를 마친 뒤, 카스크라는 통에 옮겨, 펍에서 2차 발효를 거친 후 고객에게 제공된다. 이산화탄소 가스를 이용하는 일반 맥주와 달리 핸드 펌프를 사용하는데, 이때 산소와 접촉이 일어나 산화의 위험성이 높다. 그래서 카스크 에일은 보관과 서빙, 모두 전문가가 필요하며 동일한 카스크 에일이라도 펍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경우가 생긴다.
영화에서 영국 펍이 등장하는 이유는 우연이 아니다. 많은 F1팀의 본사들이 영국 실버스톤 근처에 있다. 첫 F1 경기가 시작된 영국은 비록 지금은 자동차 산업이 후퇴했지만, 여전히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특히 첫 경주가 열린 실버스톤은 F1의 성지다.
1950년부터 지금까지 F1의 흔적을 새기고 있는 실버스톤 서킷은 깊고 오랜 전통을 넘어 문화적, 역사적, 상징적 가치를 담고 있는 장소다. 서킷은 Maggots–Becketts–Chapel (메거츠-베켓츠-채플) 같은 유서 깊은 코스를 유지하고 있으며 변덕스러운 날씨로 인해 언제나 우승 변수를 동반한다.
실버스톤의 또 다른 재미는 팬 문화다. 관람객들은 가족 단위로 놀러 와 캠핑을 하며 경기를 즐긴다. 물론 맥주도 빠질 수 없다. 실버스톤 맥주 부스는 현지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공간이다. 단순히 관람을 하는 다른 국가와 달리 이곳 실버스톤 F1은 축제 그 자체다.
그러고 보면 카스크 에일과 실버스톤은 전통과 상징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것을 공유한다. 영국을 떠올릴 때, 따라다니는 이미지들이다. 오래된 것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보존하려는 모습들, 그리고 그런 전통을 불편해하지 않고 즐기려는 태도는 맥주와 자동차 경주, 서로 다른 영역임에도 찾을 수 있는 보편적인 즐거움이다.
한 편 영화를 보면서, ‘이 맥주가 보일 때가 됐는데 ‘라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F1 공식 스폰 맥주, 하이네켄이다. 하이네켄은 영국의 전설적인 F1 드라이버, 재키 스튜어트를 모델로 내세워, ‘운전 중이라면, 절대 술 드시지 마세요.’(If you drive, Never drink)라는 광고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아니나 다를까, 영화 막바지에 하이네켄 로고가 스치듯 지나갔다. 루키 드라이버, 조슈아가 라스베이거스 경기를 앞두고 클럽에 있는 장면이었다. ‘하이네켄 0.0‘ 무알콜 맥주 로고였다. 순간 웃음이 나오며 이해가 갔다. 드라이버가 경기를 앞두고 클럽에서 알코올이 들어있는 맥주를 마신다고 할 수는 없었겠지. 조슈아 또한 경기를 앞두고 클럽에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그곳을 떠난다.
라스베이거스와 하이네켄 그리고 조슈아, 화려하고 세련되며 젊은 조합을 보며 앞서 등장한 실버스톤, 카스크 에일, 소니 헤이즈가 떠올랐다. 영국 에일은 그 깊이와 전통성으로 F1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실버스톤과 연결되며, 긴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깊은 맛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반면, 하이네켄은 현대의 F1이 가진 글로벌한 트렌드와 대중성을 상징하며, 청량하고 가벼운 맛으로 서킷의 뜨거운 열기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소니 헤이즈와 혈기 왕성한 루키 조슈아가 갈등과 반목을 하지만 결국 하나의 팀으로 승리를 하는 것처럼, F1과 맥주도 전통과 혁신의 조화를 통해 가치를 지키며 발전하는 것 아닐까. 그 속에서 모터스포츠도, 맥주도 문화로 수렴할 수 있을 테지. 영화 속에서 이 두 맥주는 F1의 정신과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난지 얼마 되지 않아, 의미 있는 뉴스를 볼 수 있었다. 2025년 영국 실버스톤 그랑프리에서 니코 휠켄베르크라는 선수가 생애 최초로 포디움에 섰다는 소식이었다. 우승도 아닌, 3위였지만, 그에게는 무려 239번째 도전 만에 이뤄낸 성과였다. 그의 팀, 자우버도 2012년 이후 13년 만에 달성한 포디움이었다.
19번째로 출발했지만 실버스톤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그의 첫 포디움을 도왔다. 그럼에도 우승자를 포함한 모든 F1 참가자와 관객들 모두 진심으로 그의 포디움을 축하했다.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달려온 휠켄베르크의 성실성과 도전 정신에 박수를 보낸 것이다. 소니 헤이즈가 영화 속 허구의 인물이 아닐 수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영국 실버스톤에서 3위 메달을 건 니코 휠켄베르크가 어떤 맥주를 마셨을지 궁금하다. 하이네켄? 카스크 에일? 경기장에서 하이네켄으로 시원하게 목을 축인 뒤, 펍에서 카스크 에일을 마시며 자축을 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두 맥주는 실버스톤이 선사하는 최고의 선물이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