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여지도 주지 않는 여름을 기다렸다. 볕으로 가득 차 밭은 숨을 내쉬는 녹음이, 그 폭력적인 생기가 잠시라도 나를 내버려두지 않기를. 그래서 돌이키지 않아야 할 것들을 되감거나 보낸 것들을 그리워하지 않기를. 날씨의 예감은 인생의 그것과 닮아서 자주 기대와 어긋난다. 도쿄의 7월은 귀퉁이 무른 과일처럼 음울하다. 백랍색 하늘은 금방이라도 주르륵 울음을 쏟아낼 것 같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기 좋은 날이다.
숙소 근처에 도쿄타워가 있다. 도쿄에 함께 있었던 어느 겨울, 도시의 색감은 지금과 달랐다. 롯폰기는 일루미네이션을 보러 온 인파로 북적였다. 너나 할 것 없이 달뜬 목소리였다. 푸른빛 전구로 수놓은 가로수들 사이에서 감탄을 연발할 때마다 흰 숨이 공기를 채색했다. 너무 아름다워서 이대로 추위에 갇혀도 좋겠다고 생각한 밤이었다. 도쿄타워 앞까지는 가지 못했다. 또 오면 되지. 다음에는 바로 앞에서 보자. 계절은 무심한 공처럼 굴러갔고 서로를 봄으로, 여름으로 부르던 시절을 지나 지키지 못한 약속만 남았다. 에펠탑의 표절인, 밤에만 아름다운 철근 탑을 바라보지 않으려 애쓴다. 흘러간 것들의 속성은 늘 불심검문이라 피할 길이 없다. 아스팔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빠르게 동네를 벗어난다.
에비스에서 다이칸야마를 거쳐 메구로까지 걷는 산책은 도쿄에서 가장 좋아하는 코스다. 옴폭 들어간 등줄기를 따라 땀방울이 솟아나기 시작한다. 이쯤에서 더위를 식혀야겠다. 츠타야 다이칸야마 점의 사진집 코너는 책장과 책장 사이에서 현실과 상상 사이를 탐구하는데 적격이다. 가와우치 린코의 작품은 이름을 확인하지 않고 표지만 봐도 그라는 걸 알 수 있다. 빛을 아름답고 무심하게, 때로는 처참하게 활용하는 그는 대가리가 깨진 채 죽은 비둘기와 사슴 위로 갓 세탁한 시트처럼 새하얀 햇살이 쏟아지는 순간을 포착한 장면들로 나를 사로잡았다. 하이쿠와 사진이 교차하는 얇은 사진집 한 권과 파파이스 매거진 8월호를 샀다. 표지에 걸린 방콕의 무지개에서 한여름 냄새가 난다.
저녁 약속이 있는 시부야까지 걸어가기로 한다. 녹음이 드리운 골목에는 몇 걸음 앞서 걷는 남학생 둘 뿐이다. 주저 없는 걸음에 맞춰 들썩이는 책가방에서 이제 나와는 어떤 관련도 없는 유년의 열기가 넘쳐흐르고, 외로움은 순식간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처럼 덮쳐온다. 질량만큼의 외로움이다. 서울에서의 외로움이 너절한 빨래처럼 속해 있는 세계에서 묻어나온다면 이국에서 맞닥뜨리는 외로움은 영원히 속할 수 없는 세계를 맨몸으로 마주하는 일에 가깝다. 시부야의 마천루 사이에서 내 몸은 더없이 작고 덧없이 느껴진다. 맹렬한 데시벨과 부주의한 어휘로 이어지는 모국어가 그리워질 지경이다. 속한 세계를 등지고 싶어서 도망 온 주제에. 사람 마음은 어디까지 요망해질 수 있을까.
스크램블 근처 약속 장소 앞을 서성이는데 다케시가 손을 흔들며 다가온다. 다케시는 제약 회사의 알고리즘 개발자로, 직업에 대한 편견에 맞서듯 스타일리시하다. 가벼운 남색 프렌치 워크 재킷에 톨토이즈 뿔테 안경. 여름에 어울리는 눈부신 은발이다. 우리는 서로 아는 한국인 지인이 있어 내가 몇 년 전 도쿄를 여행하는 동안 함께 어울리며 친구가 됐다. 헤이, 안녕. 머리색 바꿨네. 잘 어울린다. 예상보다 빨리 다시 만나서 기뻐. 시시콜콜한 얘기가 오고 간다.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인 내 일본어가 막히면 영어로 전환한다. 다행히 다케시의 영어는 유창하다. 이따금 그가 생각하는 단어를 정확히 대체할 영어를 찾지 못하면 성가신 표정으로 한참을 고민한다. 회사 나왔어. 에, 정말? 응. 재미없어서. 재미로 회사 다녀? 한국인답지 않은걸. 그러게. 평생 큰 돈은 못 벌 것 같아. 요즘 일본은 뭐가 재밌어? 글쎄, 뉴진스? 우리는 동시에 큭큭 웃는다. 오고 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가 그를 비추고, 남색의 일부는 상상 속 밤하늘 같은 코발트 블루를 띤다. 서울도, 도쿄도 여름밤 공기는 잘 익은 참외의 단내를 품고 있다. 어쩌면 계절의 소음과 명도를 최대한으로 증폭시키는 건 함께 걷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집어삼킬 듯 펼쳐진 마천루와 세계의 횡포와 지난 날과 다가올 날 사이에 갇힌 외로움에 맞설 수 있을 것만 착각은 여름밤이 두 사람에게 거는 아름다운 술수일지도. 우리는 돌아오지 않는 시절의 한 복판을 건너간다. 지금 이 장면 있잖아. 응. 오래 기억할 것 같아. 그러게, 정말 여름이네. 다케시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읊조린다. 상념은 가시지 않는 열기처럼 이어진다. 이대로 걸어 또 다른 세계에 닿을 때까지 헤매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