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여름, 소설쓰기 수업이 내게 남긴 것
내게 2021년의 여름은 소설쓰기 수업으로 향하던 매주 일요일의 풍경으로 남아있다. 집을 나서자마자 얼굴로 쏟아지던 한 움큼의 햇살과 합정으로 가는 길에 우거진 녹음, 세상의 잡음을 잠 재우 듯 요란한 매미 울음소리. 네 달 동안 합정의 작은 독립서점 겸 아카데미에서 소설쓰기 수업을 수강했다. 뭐라도 좀 알고 읽자 싶어 문학 관련 강의를 뒤적이던 마음에 욕심이 슬며시 자라나더니, 이왕 이렇게 된 거(?) 뭐라도 끄적여보자는 다짐으로 진화했고 늘 그렇듯 앞만 보는 행동력을 발휘해 덜컥 수업을 신청해버렸다. 작디 작은 내 케파의 그릇도 좀 봤으면 좋았을걸.
거진 두 달 동안 플롯을 붙잡고 엎치락뒤치락 하다 보면 작가라는 직업에 대한 경외심이 샘솟는다. 선망에 가까운 존경심이야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어떻게 창작이 인간의 영역일 수 있는지 의문을 품는 수준에 이르렀다. 왜 사랑하는 작가들의 머리말에 ‘한계’라는 단어가 그렇게 자주 등장했는지, 자격도 없이 깨닫게 된 후로는 한때 내가 흘려 읽었던 그 문장들이 담담하고도 애틋한 음성으로 들려와 눈물겨워진다.
이야기는 내가 그동안 오해했던 것처럼 창작의 신이 인간의 몸에 잠시 빙의 한 마냥 일필휘지로 쓰여지지 않았다. 플롯 상에서 철저한 논리 체계를 갖춰야만 그 위에 살을 붙였을 때 내용이 산으로 가지 않는다는 걸, 산 속에서 몇 번 쯤 길을 잃고 나서야 깨달았다. 문학의 논리란 결국 핍진성에 있는데, 핍진성은 인간에 대한 철저한 이해에 기반하기 때문에 아는 체나 미봉책이 통하지 않는다. 김연수 소설가의 말처럼 핍진성을 이해한다는 건 곧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은 허구로 남을 뿐이나, 소설의 목적은 허구로 설득하는 진실에 있기에 한 문장, 한 문장이 진실을 위한 고군분투다. 내가 탄생시킨 인물들의 생각과 선택이 내 안에서 체화될 때 그들은 비로소 이야기 밖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탈고의 순간까지 나는 내가 만든 인물들로 수없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 내가 만든 인물이 된다는 건 결국 남이 된다는 것, 독자가 된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내 이야기에도 주인공과 대립하는 반가치적 인물이 등장한다. ‘주란’이라는, 이름부터 화려한 그녀는 대학시절 내내 세간이 주목하는 연애를 하다 이별 후 잠적을 택한다. 한참 후 나타난 그녀는 돈 많은 남자와의 사랑 없는 결혼을 택했고, 이름처럼 화려한 환경을 영위하기 위해 스스로의 자유 의지를 반납한 삶을 사는 인물이다. 작가인 나는 내가 지향하는 바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그녀에게 동의는 못할지라도 그녀를 이해하려 애쓴다. 간절히 바라던 이상을 붙잡고 신물이 날 때까지 스스로를 소진시킨 경험이 있다면, 이후에 완전히 반대편으로 스스로 돌이킬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기에 나 또한 내가 알고 믿었던 자신을 저버린 순간을 곱씹으며 가까스로 그녀가 되어보는 것이다. 때로는 자기혐오가 선택의 원동력이 될 수 있으니까.
누군가 내게 왜 문학을 읽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조금은 남이 되어보기 위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세상이 주구장창 ‘나로 살라’고 목소리를 높일 때, 문학은 온 힘을 그러모아 쉬어 버린 음성으로 남이 되어 보기를 청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좁혀질 수 없는 간극에도 불구하고 문학의 밑바닥에는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려 애써도 흉내 낼 수 없는 기질, 거기서 파생된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마음과 이해한다는 말을 감히 꺼낼 수조차 없는 슬픔이 당신과 내 사이에 굳건히 버티고 있어 도저히 당신이 될 수 없다면, 가까스로 당신 옆에 서서 주위를 맴돌아 보기라도 하는 그런 마음. 김애란 작가의 말처럼 문학에서의 이해란 “비슷한 크기의 경험과 감정을 포개는 게 아니라 치수 다른 옷을 입은 뒤 자기 몸의 크기를 다시 확인해보는 과정”에 가깝다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p.252).
수업을 마치고 돌아가던 어느 날, 2호선 열차에서 바지춤에 걸린 열쇠들을 시종일관 짤랑거리던 불안하고 거친 행색의 사내를 보았다. 며칠은 감지 않은 듯 뒤엉킨 머리칼 밑으로 드러낸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검게 그을린 투박한 손으로는 단 일초도 쉬지 않고 열쇠꾸러미를 부딪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소머즈 급으로 예민한 청각을 거스르는 현상에 눈살을 찌푸리는 대신 그의 속사정이 궁금해졌을 때, 나는 소설쓰기 수업이 내게 남긴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매 순간 차이를 실감하면서도 남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 태도가 이야기의 시작이라는 걸. 그렇게 “조금씩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작가의 소명이자 숙명일 것이다 (『잊기 좋은 이름』, p.269).
매미 울음 소리에 뒤섞인 세상의 모든 잡음이 아름답게 들리던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