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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용 Jan 09. 2019

지용시선 다섯 번째

문학동네 시인선 005. 조인호 시집 <방독면>

독일 나치당원이 유태인에게 채운 표지처럼
한쪽 팔에 완장을 차고서야 알았다
장례식장에서 피어오르는 향이 
아우슈비츠의 독가스 같다는 것을

p.170 '나의 투쟁 - 컨베이어벨트' 中


문학동네시인선 005. 조인호 <방독면>



한줄평
당신은 이미 화생방 상황 속 한가운데 놓여있다.


시인 조인호


1981년 충남 논산 태생. 해병대 출신. 방독면이라는 시집의 제목은 그의 숙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매우 주관적인 시집 소개


어떤 책은 우리를 온전히 다른 세계로 인도하기도 한다.

책 속 이야기가 철저하고 치밀하게 짜여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보통 잘 짜인 이야기들은 우리를 가상 인물들이 살아가는 세계 속으로 초대한다.

우리는 그 안에서 현실을 잊고 그 세계를 마음껏 유영한다.     


그런데 이 책은 뭔가 달랐다.     


시집을 넘기다보면 어느새 조금씩 숨이 막혀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방독면 때문이다.     


방독면을 쓴 채로 시인이 만들어낸 세계를 관찰한다.

조금 답답해도 가상의 세계이니 괜찮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생각을 비웃듯 시인은 말한다.     



여기가 바로 네가 사는 세계야.     


깜짝 놀라 방독면을 벗어던진다. 숨을 몰아쉬고, 트인 시야를 만끽한다.

놀랍게도 아까 본 풍경이 그대로 눈앞에 놓여있다.          



너희들은 어렸을 때부터

영웅들의 가면을 쓰고 놀았고

나만 홀로,

이상한 방독면을 쓰고 있었지     


나는 울지 않는 무서운 아이

너희들이 붉게 충혈된 안구를 굴리며 앵앵앵 경보음을 울려댈 때

나는 수면모자 대신 방독면을 뒤집어 쓴 채 잠들었지     


p.31 '괴뢰회' 中      

    


시집을 덮은 지금, 방독면이 없어도

이 세계의 공기가 한층 더 갑갑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이곳을 제대로 직시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송전탑 꼭대기 위로 덩굴장미처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번쩍, 가시철조망 같은 번개가 송전탑에 내리꽂혔다 고압전류 속에서 그는 자신의 철가면과 함께 흐물거리며 녹아들었다 철가면이 송전탑의 철근 속으로 들러붙고 있었다 송전탑 밑 지상의 사람들이 붉은 뼈를 드러낸 채 해골처럼 웃고 있었다 번개가 번쩍거릴 때 마다      

송전탑은 거대한 한 송이 붉은 장미로 피어났다


p.12 '철가면' 中     


     

막대로 드럼통을 휘젓는 그는 색에 길들여진 가축 같았네. 그의 손끝에서 가축의 마지막 울음처럼 지문들이 사라져갔네. 드럼통에서 피어오르는 유독가스가 비누 같은 눈동자를 착취해갔지. 도살장으로 가축을 끌고 가듯.     

p.40 ‘흑백의 왈츠 – 염색공장의 가축들’ 中    


 

얼룩무늬 군복을 입은 아프리카 소년병들이 얼룩말처럼 평원 위로 우르르, 쏟아져나온다. 소총을 앞세운 아프리카 소년병들이 코뿔소처럼 평원 위를 우르르, 달린다     


야생동물의 살점처럼 질긴 내전     


잘려나간 소년병들의 발목이 푸른 잎사귀로 매달린다 기린은 평화롭게 잎사귀를 날름, 따먹는다 당신은 기린의 목처럼 자꾸만 길어지는 에스컬레이터 위를 달리고 있다     


p.155 ‘세계화장실협회- 검은 테이프 속의 목소리’ 中     




언젠가부터 한국 사회에서 노동은 ‘기능’하거나 ‘작용’하는 것이 되었다. 노동의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무엇을 지향하는지는 말할 것도 없는 일이다. 노동량보다 더 낫다고 판단되는 대가만 있다면 그만이다. 그것의 연장선에서 보면 노동력 즉, 인간 역시 수단이 된지 오래다. 스스로를 목적으로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 자체로 뉴스거리가 될 수 있다.     



독일 나치당원이 유태인에게 채운 표지처럼

한쪽 팔에 완장을 차고서야 알았다

장례식장에서 피어오르는 향이

아우슈비츠의 독가스 같다는 것을     


새벽녘 장례식방 밖 세상의 모든 공장들이 전자레인지 불꽃만큼 소리 소문 없이 뜨거워지네 삼교대 돌아가며 야근하는 공원들의 어깨가 롤러만큼 자꾸만 둥글어지네 검은 밤이 컨베이어벨트같이 흐르네     


p.170 ‘나의 투쟁 – 컨베이어벨트’ 中     



지향점 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벨트에서 각자는 나름의 사명감을 부여받는다. 컨베이어 벨트 끝에 어떤 것이 완성되는 지는 중요치 않다. 컨베이어 벨트를 돌리면 그에 응당하는 대가를 받고, 그 대가를 받아야하는 명분이면 충분하다. 그게 지금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권력을 손에 쥔 이들이 바라는 지향점이다.     



나는 아버지와 축구를 합니다 슛이 날아올 때마다 쾅쾅쾅 사정없이 번개가 칩니다 공사판 목수였던 아버지, 나무 속에 박히다 만 못처럼 병원 침대에 구부러져 있습니다 복수찬 배를 품은 아버지의 모습은 둥근 축구공을 끌어안은 골키퍼 같았습니다 나이스 캐치입니다


p. 168 ‘축구’ 中     



하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왜냐 그것이 바로 진실이기 때문이다. 진실이자 24시간 돌아가는 이 세계의 동력. 그래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      


시인은 그 금기를 마주하기 위해 방독면을 쓴다. 그리고 이 시집을 읽는 우리에게 방독면을 씌워준다. 숨이 막히지만, 적어도 오염되지는 않게 해주는 도구.      


출처를 알 수 없는 영웅의 가면을 쓰고 오염된 채로 이 세계를 살아갈 것인가. 갑갑한 방독면을 쓰고서라도, 온 세상의 따가운 시선을 마주하더라도 이 세계와 싸울 것인가.     


이제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시집 하이라이트


이 참혹하고 그 어떤 동정심도 없는 세상 속에서 더 이상 시인이란 나에게 없었다. 그러므로 세상에 시란 존재하지 않는 어떤 불가능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시를 쓰는 것은 오직 강해지기 위해서였다. 그 기다림을, 그 어둠을, 나는 차마 용서할 수 없었다.

     

p.5 시인의 말 中





한줄평


당신은 이미 화생방 상황 속 한가운데 놓여있다.


평점 이유


어렵다. 시집을 읽어나가는 것이 세상을 직시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이것이 그의 의도라면 이 시집은 더할 나위없이 잘 짜인 각본일 것이다. 어렵지만 해내야하는 일들이 있다. 그 일에 뛰어들지에 대한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이 시집을 읽는 일도 그러하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역시 너무 어렵다.)


독서 소요 기간


3주 이상


어렵고, 난해하다. 그런데 빠져든다. 장시간 빠져들면 다소 위험할 수 있으니 시간을 두고 조금씩 읽을 것.(*세로쓰기 주의 / 2부 전체가 세로쓰기로 되어있다 + 244p)


추천대상


숨이 막혀오는 것을 견뎌낼 자신이 없으면 이 시집을 펼치지 말길 권한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더 나아가고 싶다면, 그럴 충분한 힘이 지금 있다면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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