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위하여(For the Story)

제1장 이번 생엔... #1 눈을 감으면 도시는 물에 잠긴다 - 2

by 단영화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유리창 밖에서 부지런히 다니는 사람들을 바라보자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A는 투박한 머그컵을 두 손으로 감싼다. 손끝으로 갓 나온 라테의 따뜻한 온도가 전해졌다. 햇살 좋은 봄날의 오후였지만 은근히 실내 온도가 실외보다 쌀쌀했다. 아니면 A가 워낙 추위에 민감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기다리고 있는 누군가가 약속 시간 3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오른쪽 손목에 찬 짙은 갈색 가죽끈 손목시계에 자꾸 눈이 갔다. 둥근 형태의 시계 알 속 클래식하고 고풍스러운 느낌의 숫자 사이를 차분하게 도는 초침이 무척 바빠 보였다. 서둘러 오는 중이라면 현실의 지각자도 초침처럼 바빠야 마땅한데 연락조차 없는 걸 보니 잊었거나 느긋한 모양이다. 만약 잊었다면 오늘의 자리를 마련한 친구는 내일 세상을 하직할 것이고 느긋해서 연락이 없는 거라면 진상을 낱낱이 밝힌 때부터 멸시의 대상이 될 것이었다. 한껏 느긋해 보이는 표정과 달리 A의 속은 제법 시끄러웠다.

“죄송합니다. 집에 시계가 멈춘 줄 몰라서 시간을 착각했습니다.”


본래 약속 시간이었던 1시에서 1시간 30분이 훌쩍 지난 2시 30분경에야 얼굴을 비춘 지각자는 서둘러 카페로 들어오자마자 숨 돌릴 틈도 없이 정중히 사과했다. 짙은 남색 재킷에 얇고 부드러워 보이는 밝은 회색 폴라 니트가 남자의 하얗고 말간 얼굴빛에 썩 잘 어울렸다. 당황한 기색이 가득한 표정에 서두르느라 당황해서 상기된 낯빛이 불그스름했다. 말투는 정중했지만 숨은 거칠었고 창문 너머 보이던 택시에서 허둥지둥 내리던 모양을 떠올리면 거짓말은 아닌 듯했다. 맞은편 자리에 앉자마자 더운지 재킷을 벗어 옆에 걸어두었다. A는 조용히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냅킨을 곱게 접어 남자에게 주었다. 남자는 손부채질을 연신 하다가 A가 건넨 냅킨으로 이마를 훔쳤다. A는 아무 말 없이 남자가 숨을 고르고 여유를 가질 질 때까지 기다렸다.


“제가 원래 지각을 잘 안 하는데...”

“일단, 알겠어요. 식사는 하셨어요?”

“아, 아직이요.”

“저는 커피를 2잔이나 마셨어요. 땀만 식히고 밥 먹으러 갈까요?”

“아, 예.”


두 사람은 잠시 앉아서 남자가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남자는 연신 머쓱한 표정으로 A의 눈치를 봤고 A는 아무 말 없이 눈으로 남자의 움직임을 좇았다. 평소 친구의 뛰어난 안목을 믿었지만, 이 정도로 뛰어나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비슷한 시기에 솔로가 된 지 벌써 2년 차인 마당에 서로 제 코가 석 자인지라 소개팅을 주선하겠다고 해서 믿음이 흔들린 것이다. 외롭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베프가 자기 앞가림 먼저 할 거라고 여긴 것이 오산이었다. 흔들린 믿음에 대한 사죄는 소개팅 후에 한 턱 크게 내며 석고대죄로 갚을 요량이었다.


“저... 이제 자리를 옮길까요?”


남자는 얼추 몸을 추슬렀는지 똘망똘망한 눈으로 말갛게 쳐다봤다. A는 말없이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페를 나서며 A는 남자의 취향을 물었고 차고 넘치게 남아돌았던 시간 동안에 미리 알아보았던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지각해서 정말 미안해요.”


식당에 자리 잡고 앉자마자 남자는 연신 반복해서 사과했다. 지각한 일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무려 1시간 30분이나 아무 연락 없이 기다리게 한 남자의 무례는 응당 어떠한 형태이든 보복받아 마땅했지만, 남자의 태도는 앞 전의 무례를 까맣게 잊을 수 있도록 하고도 남았다.

“오늘 맛있는 거 사 드릴 테니까 드시고 실수는 잊어주세요.”


이쯤 되니 오히려 남자가 지각한 사실이 고마울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하는 소개팅에, 낯선 사람 만나서 무슨 이야길 해야 하나 고민이었는데 말실수만 하지 않으면 무난하게 하루 잘 놀다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겠어요. 친구한테 자세한 소개는 못 들었어요. 밥 먹기 전에 이름이나 알 수 있을까요?”

“ooo입니다.”


남자는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단단하고 매끈한 재질의 종이 위에 회사명과 로고, 이름이 정직하게 쓰여 있었다. 이 외에 잡다한 정보가 하나도 없어 뒷장을 보니 연락처와 회사 주소, 이메일이 보였다. 명함을 앞뒤로 돌려보고 나서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눈웃음 짓고 자신의 명함을 꺼내 건네주었다.


“저는 ooo이에요. 31살이고, 친구하고는 소꿉친구예요. 어릴 때부터 한동네에서 자랐어요.”

“저는 30살입니다. ooo하고는 대학 때 동아리 통해서 친해졌어요. 학교는 다른데 동아리 연합 활동이 있어서 축제 때마다 행사를 같이 진행했어요.”

“꽤 오래된 사이인데 처음 뵙네요.”

“아, 저는 ooo한테 이야기 자주 들었어요. 두 분이 같이 놀았던 이야기 들을 때마다 제가 ooo씨 얼굴 한번 보고 싶다고 했었거든요. 매번 알겠다고 대답만 하면서 미루다가 이제야 뵙네요.”

서글서글한 인상에 살짝 애교스러운 대답이 전형적인 귀염상이었다. 여자 경험이 많은 건지 응대가 익숙했다.


“저 위로 누나가 하나 있어요. 5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나서 외동아들처럼 자랐어요. 누나가 연애 잼병이라고 혹독하게 훈련도 시켰고요.”


oo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전광석화처럼 반응했다. A는 머쓱한 표정으로 두 손을 꼭 잡고 만지작거리는 oo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주문하신 파스타 나왔습니다.”


대꾸하려던 찰나 음식점 직원이 주문한 음식과 음료를 가져왔다. A의 시선이 종업원으로 쪽으로 향하자 oo은 자연스럽게 물컵에 물을 따르고 테이블에 올려놓은 파스타와 반찬의 위치를 움직여 가볍게 정리했다. A의 시선이 다시 돌아왔을 때 oo은 살짝 미소 지으며 식기를 건넸다. A 앞에는 식기를 올려놓을 티슈가 한 장 놓였다.


“잘 먹겠습니다.”


식사 전에 짧게 인사를 한 oo은 바로 식사를 시작했다. A는 티슈 위에 식기를 올려놓고 한입 가득 음식을 떠넣는 oo을 보았다. 분위기가 야리야리해서 눈에 띄지 않았지만, 자세히 뜯어보니 까맣고 짙은 눈동자와 흰자의 대비가 강했고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날카로운 편이었다. 깔끔하고 곧게 뻗은 콧날과 살짝 좁은 듯한 느낌의 콧방울 아래 전체적인 인상을 새침하게 만드는 비율상 작은 입매가 음식을 해치우듯이 시원시원하게 집어삼켰다. 뭘 바르는 건지 물어보고 싶은 색상의 통통한 입술이 부지런히 움직이며 제 할 일을 해나갔다.


“생각보다 꽤 잘 드시네요.”

어찌나 먹음직스럽고 복스럽게 먹는지 보고 있으면 저절로 배가 부르다는 기분이 이런 건가 싶은 A였다.

“하하- 맛있네요.”


잘못 끼운 첫 만남치고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비록 1시간 30분이라는 무연락 지각자로 천인공노할 분노를 살만했지만, 잘 꺼낸 한마디 말의 위력은 대단했다. 더불어 oo의 귀여움도 분명 한몫했으리라. 귀여움이 세상을 구한다고 했던가.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식사 한 끼 하고 산책하면서 대화한 게 전부인데 벌써 날이 저물고 있었다. 멀리 동쪽 하늘에서부터 어둑어둑한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특출난 집순이인 A는 외출하면 반드시 해가 지기 전에 귀가하곤 했다. 오늘도 여지없이 칼 같은 귀가 본능이 발동했다.


“오늘 재밌었어요.”

“아, 저도요. 근데 벌써 가세요?”


A는 오른쪽에 찬 손목시곗바늘을 말없이 응시했다. 일찍 헤어지기 아쉬운 oo은 아랑곳하지 않고 아쉬움이 가득한 눈으로 A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집에 누가 기다려서요.”

“누가요?”

“... 빌리가요.”

“빌리요?”

“네, 걔는 저 없으면 밥도 못 먹어요.”

oo은 무척 혼란스러워 보였다.

“응석이 많아 매번 손이 많이 가는 아이죠.”

눈빛이 아득히 멀어지면서 낯빛이 하얗게 변하자 어쩐지 A는 신이 났다.


“저 하나만 바라보는 아이라, 지금도 저만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곧 하얀 낯빛은 붉으락푸르락 한껏 격앙되었다가 급작스럽게 풀이 죽은 듯 어두워졌다. A는 얼른 핸드폰에서 사진을 한 장 찾았다.


“다음에 우리 애 구경하러 놀러 와요.”


생긋 웃으며 내민 핸드폰 화면에는 앙상한 가지에 애처롭게 가느다란 잎이 간신히 붙어있는 로즈메리(허브, 식물) 화분이 보였다.


“해 지면 집에 들어가야 마음에 편해서요. 다음에 또 봐요.”


A는 당황한 듯 황망한 표정으로 동작에 오류라도 난 듯 멀뚱하니 서 있는 oo에게 인사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마음 같아서는 거울에 비춘 듯 훤히 보이는 oo의 표정을 좀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좋은 타이밍에 얼른 집에 들어가서 좋은 기분을 더 오래 간직하고 싶었다. 일 년에 몇 안 되는 외출인데도 낯설지만 좋은 사람 만나서 첫 소개팅에 기분 좋게 맛있는 밥 먹고 재밌는 대화하고 산뜻하게 귀가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오랜만에 한 소개팅 상대가 아주 깔끔하게 마음에 드는 사람이라니, 나중에 ooo 만나면 비명 지를 만큼 맛있는 술을 사야겠다고 다짐하는 A였다.

뚜르르- 뚜르르-

기분 좋은 김에 당장 ooo에게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으로 수화기 너머 통화 연결음이 들렸다.


“어, 어떻게 됐어?”


전화받자마자 헐레벌떡 소개팅 여부부터 묻는다.


“야, 오늘 진짜 재밌었어!”

“어때, 어때? 괜찮지?! 내가 막 만나보라고 해서 다행이지?!”

“와, 나 솔직히 아무 기대도 안 했거든? 근데 진짜 역대급...!”

“거봐- 이번엔 장난 아니라니까. 걔가 대학 때부터 진짜 유명했어.”

“들어보니까 안 지 꽤 된 사이던데 여태 아무 일도 없었다?”

“걔가 얼굴값을 해.”

“역시... 여자 문제가 좀...?”

“아니. 얼굴값을 철벽으로 해. 왕좌의 게임 얼음장벽 급이야.”

“그게 뭐야. 아하하-!! 철벽치곤 매너 좋고 애교스럽고 솔직 담백해서 나쁘지 않던데?”

“다 이유가 있다. 나중에 한잔해. 그때 이 언니가 썰 풀어주마.”

“그래. 무튼 고맙다- 이번에 프로젝트 끝나고 연락해. 내가 살게.”

“오- 기대하겠어. 프로젝트 끝나면 연락할게.”


전화를 끊고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던 A는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퇴근 시간과 맞물렸지만, A가 사는 동네로 가는 버스 노선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창가에 빈자리가 있어 착석했다. 여러 사람이 오간 듯한 오만가지 냄새가 뒤섞여 멀미가 날 듯 속이 더부룩했다. 창문을 살짝 밀어서 열자, 틈으로 봄바람이 살살 불었다. 코 끝에 살랑이는 바람결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햇살을 받아 따뜻하고 포근한 낮의 바람과는 다른, 어딘가 물기를 머금어 습하고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봄밤의 바람이었다. 집까지 버스로 20분 정도 시간이 걸렸다. A는 oo의 모습을 떠올렸다. 데이트하면서 보았던 풍경과 그 안에 함께 시간을 보낸 oo이 파노라마처럼 스쳤다. 봄밤의 분위기만큼 묘하고 살짝 붕 뜬 듯한 기분이 이상했다. 즐거운 하루를 보낸 후의 만족감, 풍요로움으로 가득한 이상향을 맛본 듯한 환상적인 시간이었다. 남겨두고 온 oo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긍금했다. 다음번 A의 초대에 응할지도 궁금했다.


치이익- 끼이익-!


어느새 버스는 집 근처 버스정류장에 멈췄다. 버스에서 내려 큰 도로를 따라 걸으니 블록 안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이었다. 골목길로 들어가면 오른편에 편의점이 보였다. 편의점과 건물 사이에 몇 개의 골목을 지나면 A가 사는 집이었다.


치이익-


늘 지나던 골목길의 어둡고 좁은 틈 사이에서 빨갛게 작은 불이 타올랐다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매캐한 냄새와 동물의 털이 타는 것 같은 비릿한 내음이 코를 세게 때리듯이 밀려왔다.


“읍...!”


A는 순간 역함을 이겨내지 못하고 코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콜록-! 콜록-!


역한 냄새는 비강과 목구멍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냄새를 몰아내려는 듯 게워내려고 점액질이 신맛을 풍기며 밀려 올라왔다. 명치끝에서 꾹 조이는 통에,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기침과 점액질의 체액이 한데 뭉쳐서 갈비뼈가 들썩일 때마다 목구멍과 콧구멍을 틀어막았다. 다급한 A는 입 속에 손을 넣어 끈적한 액체를 싹싹 긁어내 바닥에 내팽개쳤다. 목구멍에서 아스팔트 바닥까지 길게 늘어진 액체는 끝을 모르고 솟구쳤다. 이내 기침은 토악질로 변했다.

우욱-!


낮에 먹은 음식들이 소화되지 못한 채 도로 위를 나뒹굴었다. 점액질 위에 음식물, 음식물 위에 점액질, 번갈아 가며 켜켜이 쌓였다.


케케케-


골목의 어둠 속에 숨은 존재는 낮고 탁한 목소리로 옅게 비웃었다. 토사물과 점액질투성이가 된 A의 몰골을 뚫어져라 쏘아보며 응시했고, 간간이 작은 불이 순식간에 빨갛게 타올랐다 사라지며 자욱한 연기를 뿜었다. A는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질식해서 죽을 것 같다는 공포에 질렸다. 어떻게든 숨을 쉬려고 버둥대며 토사물 사이를 허우적댔다. 소개팅을 위해 애써 골라 입은 쉬폰 원피스가 A가 뱉어낸 것들로 범벅이 됐다.


허억...! 허억...!


산소가 부족해 시야가 흐려졌다. 퇴근 시간이고 행인이 많은 거리인데도 야속하게 지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핸드폰을 찾아 전화를 걸려고 했지만 점액질 범벅인 핸드폰의 터치 기능은 작동하지 않았고 목구멍을 틀어막은 끈적한 점액질 때문에 목소리조차 내기 힘들었다. 인간의 언어를 잊은 듯 동물에 가까운 괴성을 꺽꺽거리며 내뱉던 A는 순식간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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