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이번 생엔... #1 눈을 감으면 도시는 물에 잠긴다 -15
“안 되긴 뭘 안 돼~”
친구는 벅차오르는 뿌듯함을 만끽하며 핸드폰을 A에 돌려주었다. 그녀 뒤로 친구보다 훨씬 행복해 보이는 C가 웃다가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핸드폰을 돌려받은 A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악-!!!!”
[좋아요! 2시?]
“다, 답장이 왔다...!”
“뭘 망설여~ 얼른 알겠다고 해!”
“그러니까! 언제까지 답답하게 굴 거야!!”
A는 메신저 창을 들여다보았다.
후- 하- 후- 하-!
심호흡하고 자판 창에 손을 올렸다. 엄지 손가락으로 ‘ㅇ’자를 눌렀다. 다음 자판으로 옮겨가려던 찰나 A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아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이번 주 토요일에 일정이 있었는지,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생각을 해보려 했지만 멍할 뿐이었다.
“악-!!! 어떡해!!!! 아무 생각 안 나!!!”
“아유, 뭘 어떡해! 그냥 알겠다고 해, 바보야~”
“애가 영 시원찮구먼!”
A는 곁에 따닥따닥 붙어서 이래라저래라 관리하는 친구와 C를 번갈아 노려보았다.
“나 토요일에 아무 일도 없겠지?! 뭐지?! 일도 없겠지?!”
“스케줄 노트 어딨어? 빨리 내놔 봐.”
닦달하는 통에 A는 책장 가장 아래에서 두 번째 칸에 꽂힌 다이어리 중 가장 오른쪽에 꽂아놓은 진녹색 커버를 잡았다. 친구는 느적느적한 A를 기다리지 못하고 후다닥 달려와 다이어리를 뺏었다.
“속 터져서 못 살겠네!”
다이어리를 펼치고 빠르게 8월 달력 페이지를 찾아 스케줄을 확인했다.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뒷장으로 옮겼다. 검지 손가락으로 한줄한줄 짚어가며 확인했다. C는 빼꼼 고개를 내밀어 친구 뒤에서 그녀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몇 번 낄낄대고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대어 앉았다.
“좋아! 하나가 걸리긴 하는데 그건 내가 해줄게! 그날은 무조건 데이트다!”
“뭐?! 무슨 일인데?! 왜 나한테 안 알려줘?!”
“남의 집 개 산책인데 그거 내가 갈 수 있을 거 같아. 못 가면 다른 알바라도 구해줄 테니까 꼭 나가, 알겠지?”
“... 약점이라도 잡혔어? 뭘 이렇게까지..?”
“... 아니야. 걔가 너무 애잔해서 그래. 빨리 답장해.”
A는 기분이 찝찝해서 무언가 께름칙했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서두르는 일에 항상 무언가 숨겨진 내막이 있기 마련이다.
“... 수상한데?”
친구는 얼른 메신저 답장이나 하라고 눈치를 줬다.
“그냥 얼른 답장해~ 데이트 한 번 더 한다고 세상이 무너지냐?”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고, C는 흥미진진한지 얼굴 위치에 자리한 허공이 위아래로 빠르게 통통 튀었다.
“그래. 데이트 한 번 더 한다고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지.”
[2시에 00 앞에서 봐요.]
[네-]
온 신경을 집중해서 메신저에 답을 하고 나니 A는 진이 쭉 빠졌다.
“보냈다...!”
“잘했어, 잘했어!”
“누가 보면 장문의 편지라도 쓴 줄 알겠어. 켈켈켈-”
소파에서 낮게 울리는 웃음소리에 A는 시선을 돌려 흘겨보았다.
“이렇게 갑자기 약속 잡은 거 처음이야!”
정신이 들고 나니 상황이 더욱 혼란했다. 밥 산다고 했는데 어디서 사며 옷은 뭐 입고 나가나 싶은 A였다. 되돌리기엔 이미 늦은 엎질러진 물이었다. 핸드폰 화면을 몇 번이나 껐다 켰다 반복하며 현실을 부정했다. A가 계속 초점 나간 눈으로 액정을 보니 친구는 얼른 핸드폰을 치웠다.
“자자, 어차피 데이트 약속은 잡았으니 뭐 입을지 뭐 먹을지나 천천히 정해보자고, 응?”
친구는 핸드폰을 소파 쿠션 아래로 쓱 넣었다. A 어깨에 친근하게 팔을 두르고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씩 지었다. 까만 피부에 진하고 통통한 눈썹이 어우러져 참 순박해 보였다.
화창한 날이다. 일주일 내내 맑았으면 토요일 하루쯤은 비가 올 법도 한데 구름 한 조각 없다. 눈이 부셔서 손으로 가리지 않으면 눈이 타들어 갈 듯 햇살이 부서지게 찬란하다. 날씨를 확인하려고 거실 창 앞에 선 A 얼굴에 손 그늘이 졌다.
맴- 맴-
여름 막판이라고 집 근처 나무에 매달린 매미가 죽을 것처럼 울었다. 총 3일 받은 휴가 기간 중 친구가 A 집에 머물렀던 건 첫날 하루였다. 일을 저질러놓고 남은 휴가를 즐겨야 한다며 서둘러 새벽같이 떠났다. 새벽녘에 어두컴컴한 가운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놀라 깬 A는 친구를 도둑으로 오해해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그 와중에 C는 어디 가지도 않고 대꾸를 할 수 없는 A를 살살 염장 질렀다. 친구가 떠나기만 기다렸더니 C도 친구가 사라진 새벽에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다. 허망한 새벽, A는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것이다. 허망한 마음에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았다. 엉덩이에 딱딱하게 배기는 물건이 있어 쿠션 밑으로 손을 넣었다. 더듬거려 손가락에 매끈하고 네모난 물건이 잡혔다. 꺼내보니 사라진 핸드폰이었다. 문득 친구와 C가 떠나기 전 저지른 일이 떠올랐다. 그때, A는 물밀듯이 후회가 밀려왔다.
하아-
신발을 고르려고 신발장 앞에 선 A는 일단 심호흡했다. 오늘은 밝은색 여름 원단 청바지에 느슨한 분위기의 흰 셔츠였다. 맨 위에서 아래로 두 번째 칸까지 쭈욱 둘러보았다. 계절별 신발 중에 어울릴 만한 구두는 없었다. 갈색 바탕에 짙은 밤색 얼룩무늬의 얇은 스트랩을 겹겹이 두른 샌들과 발목이 드러나도록 목이 낮은 아이보리색 컨버스 운동화, 검은색 패브릭에 반짝이는 펄사를 섞은 로퍼 세 가지 신발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명색이 두 번째 데이트인데 신경을 쓰는 게 좋을지 아니면 편하게 놀다 오는 게 좋을지 고민이었다. A는 고심하며 신발에 발을 끼웠다 뺐다 반복하며 현관 신발장 거울에 비춰보았다. 시원해 보이는 짙은 밤색 미니 백에 맞추려니 샌들이 괜찮은 듯 보였지만 밋밋한 발톱이 영 신경 쓰였다. A는 옷장에서 덧신을 꺼내와 신고 아이보리색 컨버스 운동화에 발을 끼웠다. 나머지 샌들과 로퍼는 신발장에 도로 넣었다.
“자, 기운을 내자!”
신발을 단정하게 고쳐 신고 씩씩하게 현관문을 열었다. 양손으로 어깨를 툭툭 치고 기운을 북돋웠다. 아무리 갑자기 잡힌 약속이고 자의는 아니지만 그걸 상대방이 알 수 있을 리가 만무하니 최선을 다해서 데이트하고 오는 거라며 마음속으로 백 번쯤 되뇌었다.
“아자, 아자-!”
가는 길 내내 중얼중얼 주문을 외는 덕에 온갖 관심을 끌었지만, A는 알 턱이 없다.
까르르- 와아-!
맴-! 맴-!
8월 중순 오후 2시의 여름 더위란 대단했다. A는 나무 그늘 밑 벤치에 앉아 근처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한 엄마들을 구경했다. 더운 날씨에 애들 데리고 외출한 엄마들도 대단했지만 날 더운 줄 모르고 열과 성을 다해 노는 아이들이 더 대단했다. 다 자라기 전의 작은 인간이란 지칠 줄 모르는 존재라더니 틀림없었다. A는 몇 번째인지 모를 일행이 바뀌는 장면을 바라보며 아이스티만 세 컵째 비웠다.
쪼로록- 쪼옥-!
바닥을 드러낸 투명한 컵은 얼음만 한가득 담겼다. 얼음이 녹으면서 투명한 플라스틱 컵 밖에 송글송글 맺힌 물방울이 손가락을 타고 팔뚝으로 미끄러졌다. 평소라면 금방 닦았을 테지만 죽을 만큼 더운 날씨에 그마저 시원해 방치했다. 물이 증발하며 팔뚝 온도가 쥐똥만큼 떨어지길 바랐다. 더위에 끈적끈적한 건 컵만이 아니었다. A의 이마도 땀이 송글송글 맺혀 흘렀다. 머리카락을 따라 흘러내려 목선을 타고 등줄기를 미끄러져 내렸다. 불쾌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벤치 옆자리에 대충 플라스틱 컵을 놓고 손으로 땀을 훔쳐냈다. 하필 손수건 챙기는 걸 잊는 바람에 땀을 손으로 훔쳐 일회용 티슈로 닦아내길 반복했다. 사우나가 따로 없는 날씨에 하릴없이 반복했다. A는 짜증스럽게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저 도착했어요. 어디쯤이세요?]
[늦으시나요?]
[어디쯤이에요?]
[저 어디라도 가 있고 싶은데... 바쁘세요?]
[오는 중이세요?]
평소보다 30분 정도 늦게 도착한 터라 정각을 기준으로 30분에 한 번씩 A가 보낸 메시지만 눈에 들어왔다. 무척 짜증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도착하기만 하면 바로 집에 가도 할 말이 없을 테니 나쁘지 않았다. A는 친구 입장을 봐서 다음에 봐도 뒷말이 없도록 마무리는 정확히 하고 갈 참이었다. 시계 작은 바늘은 벌써 4에 가까웠다. 물배만 채웠더니 배도 고팠다. 분침은 58분, 초침이 바쁘게 움직였다. A는 벤치에 기대앉아 초침이 더 빨리 가기를 기다렸다. 틱, 탁, 틱, 탁! 손목시계의 작은 기계음이 천 배쯤 확대된 듯 귓가에서 울렸다.
“오십오.. 오십육.. 오십칠..”
“저, 정말 죄송해요!!!!!”
집에 가기 일보 직전, 빨갛게 익은 00이 막 도착했다. 넉넉한 하얀색 셔츠 깃이 어색하게 접혔고 땀에 흠뻑 젖어서 오다 물에 빠진 건 아닌지 합리적인 의심이 들었다.
콜록-! 콜록-!
숨을 몰아쉬던 00은 연신 마른기침을 해댔다. 몸이 주체가 안 되는지 벤치 끝을 꼭 잡고 선 자리에 그대로 고꾸라지듯 주저앉았다. A는 벌떡 일어나 근처 편의점으로 달려갔다. 500ml 물 한 병을 꺼내 계산대에 올렸다.
“계산이요!”
계산이 끝나자마자 물병을 들고 벤치로 돌아갔다. 00은 여전히 주저앉은 채였다.
“물 마셔요.”
A는 물병을 따서 00에게 건넸다. 00은 물병을 받아 벌컥벌컥 500ml를 다 비워냈다.
콜록-! 콜록-!
이번엔 빨리 마시다 사레가 들었는지 연신 기침했다. A는 말없이 00의 등을 두드렸다. 잠시 후 진정한 00은 숨을 고르고 벤치에 앉았다. A는 00의 안색을 살피고 옆에 앉았다.
“미안해요! 이번에도 제가 너무 늦었죠.. 정말 죄송해요.”
진정한 00은 거듭해서 사과했다. 머리를 숙이고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거의 울 지경이었다. 안절부절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깍지를 꼈다 풀었다 좌불안석이었다.
“자, 이유나 들어봅시다. 왜 늦었어요?”
어차피 집에 갈 이유로 퉁 치려던 주제에 A는 거만하게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울였다. 00이 앉은 쪽 다리를 반대 다리에 올려 꼬고 곁눈질로 차갑게 시선을 던졌다. A의 시선을 받은 00은 움츠러들었지만 그렇다고 위축되지는 않았다.
“... 말해도 믿지 못할 거예요.”
“변명의 기회를 날려 버리나, 시도라도 해보나 어차피 우린 다음에 안 봐요.”
“... 그렇겠죠.”
00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했다. A는 말없이 00이 최소한의 자기 방어로 스스로 일부의 명예를 회복하기를 기다렸다. 어떤 말을 한들 어차피 안 볼 확률이 아주 높았지만, 친구의 지인이라는 특혜는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저...”
말을 꺼내려던 00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동공이 심각하게 흔들렸고 이내 수치심으로 일그러지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 괜찮아요?”
“아... 너무 수치스러워서...”
“당신은 오늘 나한테 개자식이 됐어요. 인생에서 소개팅 상대한테 2번이나 연락도 없이 늦어서 개자식이 되는 거랑 당신만 아는 그 수치를 밝히고 모래 한 줌 정도의 명예라도 지키는 거 중에 빨리 선택해요. 저도 더워서 죽겠어요.”
“정말 죄송해요.. 연락이라도 드렸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연락이라도 못한 이유가 뭔가요? 시간 보여요? 지금 몇 신지?”
A는 과장되게 손목시계를 들어 00 앞에 들이댔다. 가까이 들이댈 때마다 00은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게... 말이죠... 오다가...”
“오다가...?”
“...-”
목소리가 작아도 너무 작아서 속으로 도로 기여 들어갔다.
“예...?”
A는 귀에 두 손을 모아서 대고 00 가까이 다가갔다. 00은 달팽이처럼 점점 더 조그맣게 움츠러들었다.
“... 오다가 ㄷ...”
“예...?”
“도...를 믿습니까 하시는 분한테 붙잡혔어요...!”
“...예...?”
화창한 여름이었다.
맴- 맴-
매미도 더운지 죽도록 울어대는 아주 더운 여름이었다. 별의별 게 다 핫한 아주 더운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