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위하여(For the Story)

제1장 이번 생엔... #1 눈을 감으면 도시는 물에 잠긴다 -17

by 단영화

더 미적거리면 움직일 용기가 나지 않을 듯했다. 00은 목욕탕 문에 바싹 붙어 주변을 살폈다.


짤랑-


유리문을 살짝 여니 문 위에 달아놓은 풍경이 소리를 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00은 초긴장 상태로 풍경을 손가락으로 살짝 잡고 문을 열었다. 두리번거리며 인적을 살폈다.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안녕히 계세요-”


00은 카운터의 중년 남자에게 작은 소리로 인사를 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빠져나왔다. 허리를 굽히고 건물 벽에 달라붙어 빠르게 다리를 움직였다. 00의 시야에 목욕탕 근처 국밥 가게 간판이 들어왔다. 거리에 세워놓는 네온 입간판이었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피고 간판 뒤쪽으로 서둘러 움직였다. 뒤에 들러붙어 사방을 살폈으나 근처에 여자는 없는 듯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관자놀이를 따라 흘러내리며 뺨을 간질였다. 초긴장 상태인 00은 신경질적으로 땀을 스윽 닦아냈다. 끈적하게 늘어 붙은 땀이 팔뚝을 타고 내렸다. 00은 후다닥 도망쳤던 기억을 따라 목욕탕으로 왔던 길을 역순으로 따랐다. 앞에 바람에 펄럭이는 입간판이 보였다. 00은 입간판까지 걸음을 재촉했다.


“엇-!”


몇 걸음 걷지 않아 골목 끝 도로에 여자가 나타났다. 00은 소스라치게 놀라 후다닥 달려서 입간판 뒤에 몸을 숨겼다. 눈만 빼꼼 내밀어 동향을 살폈다. 여자 말고도 몇 사람이 여자에게 말을 건네고 길을 오갔다. 접근한 여자의 일행이었다. 00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여기서 잡혔다가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순식간에 스쳤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빨리 고백도 하고 연애도 얼른 할 걸 등 온갖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00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미 약속 시간이었다. 시간을 확인할 때마다 배터리는 점점 빠르게 줄었다. 지금 연락하지 않으면 이 상황이 해결될 때까지 연락은 불가능했다. 00은 늦는다는 연락을 하려고 메신저를 켰다.


“어!!!!”


그 순간, 여자는 00을 발견했다. 00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여자가 도로에서 목욕탕 골목 쪽으로 향했다. 여자 뒤로 두 명의 남자가 여자를 따라왔다. 깜짝 놀란 00은 골목 반대쪽으로 달렸다.


“거기 서요-!!!! 이야기 좀 하자니까요-!!!!!!”

“으아-아아아아-!!!!”


목욕탕 골목 반대쪽 도로로 나가니 허름한 상가 골목이었다. 주변 가게를 둘러보았다. 반은 거의 문을 닫은 수준이었고 반은 도매 상가로 도움을 청하기 어려웠다. 00은 상가 골목을 따라 번화가와 가까운 방향으로 달렸다. 일단 핸드폰 배터리 충전이 먼저였다. 늦는다고 연락하든 경찰에 신고하던 우선 배터리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번화가 쪽으로 달리다 보면 분명 편의점 하나쯤은 있을 터였다. 00은 여자가 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최대한 소리를 크게 지르며 최대한 많은 골목을 구석구석 오가며 도망쳤다. 어느 정도 사방으로 오간 후에 차 소리가 나는 큰 도로 쪽으로 달렸다. 다행히 00의 예상대로 큰 도로 근처에 편의점이 보였다.


딸랑-


“어서 오세요-”


카운터에 대기 중인 아르바이트생이 무기력하게 인사를 했다.


“핸드폰 충전되죠?”

“네, 돼요.”

“여기, 핸드폰 충전 좀 해주세요.”


00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아르바이트생은 시큰둥하게 받아서 충전기를 꽂았다. 00은 시간을 확인하려 여기저기 살폈다.


“지금 몇 시예요?”


편의점에 시계가 없어 00이 시간을 물었다. 아르바이트생은 자기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2시 24분이요.”

“제가 근처에 있을 거거든요. 핸드폰 찾으러 언제쯤 오면 돼요?”

“30분 있다가 오세요.”

“알겠습니다.”


한숨 돌린 00은 여자가 따라올지도 모를 때를 대비해 편의점 근처로 자리를 옮기려 했다. 아무 생각 없이 문을 나서려던 때였다.


“아악-!!!!”


편의점 투명 유리문을 사이에 두고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험상궂은 표정의 여자는 00을 표독스럽게 노려보았다. 문을 열려고 힘껏 밀자 열지 못하게 막으려고 00은 문고리를 세게 움켜잡았다. 꿈쩍 않자 열려고 여자는 더욱더 세게 힘껏 밀었다. 00은 생각보다 강력한 여자의 힘에 놀라 두 손으로 문고리를 움켜잡고 어깨를 밀착했다. 여자도 악에 받쳐 반대쪽 문고리를 잡고 앞뒤로 세게 흔들었다. 문만 아니라 편의 유리 벽면 전체가 흔들렸다.


“뭐 하시는 거예요?!”


아르바이트생은 위험을 감지하고 카운터 바를 올리고 나왔다. CCTV를 의식한 듯 카운터 근처 천장 부근을 흘긋대며 막아섰다.


“자, 잠깐만...! 여기 좀 잡아봐요!”


00은 마침 좋은 타이밍에 나타난 아르바이트생 손을 문고리에 올렸다. 맞은편 문밖의 여자는 아르바이트생이 나오자 미친 듯이 흔들어 대던 손을 잠시 놓았다.


“네?”


아르바이트생이 문고리를 잘 잡은 걸 확인하고 00은 후다닥 반대쪽 입구로 달렸다.


“어! 자, 잠깐만!! 거기 서-!!!”


여자는 달아나는 00을 보고 당황해서 문을 확 잡아당겼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아르바이트생은 여자의 강한 힘에 힘없이 문과 함께 훅 끌려 나갔다. 문과 한 덩어리가 된 아르바이트생의 무게 때문에 여자도 뒤로 확 밀려났다. 발을 헛디딘 여자는 제 발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반쯤 열린 문에 매달려 무릎 꿇듯이 엎어진 아르바이트생은 여자 앞에 털썩 고꾸라지며 곱게 절을 했다. 여자는 의도치 않게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절을 받고 말았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은 창피함에 고개를 들지 못했다. 엎어져서 꿈쩍 않으니 편의점 근처를 지나던 사람들이 웅성웅성 댔다. 여자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익-!!!!!”


뒷문으로 도망친 00은 다시 골목으로 들어갔다. 작은 상가들 사이 틈바구니에 몸을 숨길 요량이었다. 한참 추격전을 벌인 탓에 체력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핸드폰을 찾으러 가려면 편의점 근처에 머무는 편이 나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오래되고 낡은 진한 파란색 비닐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거미줄과 두꺼운 먼지가 뒤엉켜 닿기도 싫었으나 이만한 피난처가 없었다. 00은 허리를 숙이고 웅크려 비닐 더미 사이로 몸을 구겨 넣었다. 다행히 비닐 안쪽은 최근에 사용한 흔적이 보였다. 거미줄을 걷고 먼지를 닦아낸 덕에 먼지투성이가 되는 꼴은 면했다.


다다다-


근처에서 발소리가 났다. 소리가 가까워지기 전에 00은 숨소리를 낮췄다. 호흡을 깊게 들이마셔다 내뱉고 한 손으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다다다다- 거기야?!

다다다-


발소리가 비닐 더미를 지나쳤다. 소리 뒤에 바로 여자 목소리가 들렸으나 서로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은 점점 멀어졌다. 00은 안도했다. 이대로 30분 정도 버텼다가 핸드폰을 찾아서 약속 장소로 가면 끝이었다.


후우-


큰 몸을 웅크린 00은 땀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오늘은 무척 더운 여름날이었고,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비닐 더미 속였다. 거의 한 시간에 육박하는 긴장 속 추격전에 몸은 탈수 직전이었다. 마른입에 침을 연신 삼켰지만 거칠하게 마른 목구멍이 따끔했다. 시간이 지나자 점점 숨이 막히고 비닐이 사방에서 옥죄었다. 점점 숨이 가빠오고 전신이 저릿했다. 심장이 터질 듯 뛰면서 머릿속이 폭발할 것처럼 두근거렸다. 가만히 숨을 다스려도 전력 질주한 듯 질식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숨을 헐떡이던 00은 영문 모를 죽을 것 같은 기분에 비닐 더미를 나가야만 했다. 나가지 않으면 여자한테 걸리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 당장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먼저였다.


헉-! 헉-!


00은 비닐 더미 틈바구니에서 들어온 방향 반대로 조금씩 굳은 몸을 밀었다. 발가락을 움직이면서 아스팔트 바닥에 신발을 밀착시켜 미끄러지듯 다리를 밀어내고 나니 몸이 움직였다. 손으로 바닥을 짚은 뒤 먼저 밖으로 내민 다리 쪽으로 골반을 밀었다. 골반 움직임에 맞춰 상체를 낮추니 바로 어깨가 빠져나왔다. 후덥지근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비닐 안보다 바깥의 공기가 상쾌했다. 반대쪽 남은 다리까지 꺼내고 나니 그제야 숨이 쉬어지고 살만했다.


하아- 하아-


“여기 계셨어요~?”

“아-악-!!!!!!!!”


간신히 살았다 싶은 순간 뒤통수에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00은 비명을 질렀다. 고개를 돌리니 쫓아오던 여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00을 내려 보고 있었다. 그녀 옆엔 같이 쫓아오던 남자 두 명이 서서 00을 둘러쌌다.


“도대체 왜 이러세요~? 다 도와드리려고 하는 말이에요~”

“도움 필요 없다니까요!!!!! 정말 왜 이러세요?!!!”

“그럼 조상님께 정성만 드리고 가세요. 평생에 한 번인데 정성 한 번 드리는 게 그렇게 어려우세요?”

“저희 조상님께 효도는 제가 알아서 할 거니까 제발 가세요!!!!!”

“방법을 모르시잖아요. 정성 들이실 거면 제대로 해야죠. 저희가 도와드릴 수 있다니까요?”

“아니, 진짜...! 와...!”


일방적 대화에 00은 정신이 혼미했다. 여자는 어차피 무슨 말을 하든 전혀 듣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앞에 대상이 존재할 뿐이었다. 00은 이 대화를 더 하다가 미칠 지경이었다.


“우리가 조상님께 제사 지낼 때도 그냥 지내지 않잖아요? 제사상 차리려던 돈이 필요하지요~ 정성 들일 때 할 수 있는 만큼 성의를 표하셔야 해요~”

“저 돈 없어요.”

“정성 들이는 다른 분들은 보면 보통 삼십만 원씩 해요. 못해도 십오만 원, 많이 하면 백만 원 이상도 하고 그래요~ 평생 한 번 정성 들이는 건데, 힘드세요~?”

“이봐요! 아니, 제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 알겠어요. 그럼 삼만 원이라도 내세요. 그럼 정성 들일 때 같이 드릴 수 있게 해 드릴게요.”


완강히 저항하자 여자도 거의 포기한 듯했다.


“... 삼만 원이요?”

“네. 다 가족들 잘 되고 건강하게 살라고 하는 건데 삼만 원이면 거저 아니에요~?”


잠시 생각하던 00은 지갑을 꺼냈다. 천만다행으로 뽑아 논 현금이 얼마 없었다. 딱 삼만 원뿐이라 전부 꺼내 건넸다. 여자는 만 원짜리 세 장을 받고 싱긋 웃었다.


“정성 들이러 가시죠.”


여자가 먼저 나서자 같이 있던 남자 둘이 00을 양쪽에서 잡았다. 끝인 줄 알았던 00은 다시 절망했다.


“뭐야! 놔준다는 소리 아니었어?! 가도 된다며!”

“무슨 소리예요~? 정성은 드리고 가야죠.”


여자와 남자 둘은 00을 데리고 골목 사이를 빠르게 걸었다. 비닐 더미 근처 오래된 빌라 앞에 도착하자 놓아주었다.


“먼저 올라가세요. 저는 정성 들일 때 쓸 것 좀 사 올게요.”


여자는 남자 중 한 명과 빌라 근처 슈퍼마켓으로 갔다. 남은 한 남자가 00을 데리고 빌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 3층에 도착하니 왼쪽 문이 살짝 열려 어수선한 소리가 밖으로 들렸다.


“들어가세요.”


같이 온 남자는 문을 열고 00을 밀어 넣었다. 안에는 작은 공간에 사람들이 빽빽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여럿이 모여 어수선했다. 00이 들어오니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친절한 미소로 인사를 했지만 분위기가 묘했다. 서로 아는 사이인지 모르는 사이인지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같이 온 남자는 00을 남겨두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00은 어색해서 현관문 앞을 서성였다. 아무도 안 보는 사이 도망가려는 수작이었으나 잠시 후 여자와 남자가 바로 들어왔다. 검은색 작은 비닐봉지를 들었는데 바로 주방과 거실 사이 애매한 자리의 작은 식탁 위에 올렸다. 검은 비닐봉지 틈으로 귤 하나가 굴러 나왔다.


“왜 여기 계세요? 자, 이쪽으로.”


여자는 친절하게 00을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엔 이미 여러 음식을 가득 차린 제사상을 준비한 상태였다. 다른 여자가 식탁 위에 둔 귤과 사과를 제기에 담아왔다. 상 위에 올리고 여자는 00에게 물을 한 잔 권했다.


“마시세요. 정성 들이기 전에 몸과 영혼을 깨끗이 해야 해요. 이건 일반 수돗물인데 여기 계시는 이분이 물에 특별한 힘을 넣었어요. 이 물을 마시면 그 힘으로 몸과 영혼이 아기처럼 깨끗해져요.”


불그르죽죽한 플라스틱 바가지에 수돗물을 담아 주었다. 00은 바가지를 받고 너무 집에 가고 싶었다. 멍하니 바가지 속 물을 바라보며 망설였으나 여자는 00이 물을 마실 때까지 지켜보았다. 머릿속으로 ‘탈출’ 두 글자만 되뇌고 눈을 딱 감았다. 바가지에 입을 대고 들이키자 차가운 물이 입으로 들어왔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장기의 생김새를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탈수 직전이었던 00은 수돗물이나마 약간 마셔서 정신이 맑아졌다. 생각 같아선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으나 극한의 인내심으로 입만 축이고 말았다.


“어때요? 좋죠?”


여자는 싱긋 웃으며 00에게 옷가지를 건넸다.


“이제 정성을 들일 거니까 이걸로 옷을 갈아입고 와요.”

“네?”

“세배할 때 한복 입잖아요. 조상님께 인사드리는 거니까 예의 있게 잘 입고 인사해야죠.”


옷가지를 펼쳐보니 오래된 사람 냄새와 얼룩이 잔뜩 묻은 한복이었다. 가면 갈수록 가관이었다. 코를 찌르는 냄새로 다시 머리가 띵 했다. 00은 찝찝한 기분에 입고 있던 옷 위에 옷을 겹쳐 입었다. 여자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았지만 00은 시선을 돌린 채 끝까지 모른 척했다. 목적을 이뤘기 때문인지 여자는 더 이상 관심 두지 않았다. 거실 구석에 조용히 서서 사람들을 살폈다. 하나둘씩 한복으로 갈아입고 제사상 앞으로 모였다. 00은 사람들 사이에 껴서 서 있다가 여자가 나타나 절을 시키자 냉큼 절을 했다. 한 남자가 상 옆에 서서 종이에 쓴 제문을 읽었다. 모든 순서가 끝나니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각자 이야기를 나눴다. 00은 서둘러 겉에 입었던 한복을 벗은 뒤 곱게 접어 두었다. 눈치를 보다 몰래 도망칠 요량이었다. 거실을 부유하던 00은 다시 여자 눈에 띄었다.


“이거만 먹고 가요.”


여자는 큰 선심 쓰듯 제사 음식을 소담하게 담은 접시를 주었다. 전 몇 가지와 과일이었다. 00은 정말 먹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끝이라는 말에 귤을 하나 잡았다. 얼른 서둘러 귤을 까면서 먹는 시늉을 했다. 여자는 음식이 입에 들어가는지 확인한 후에야 자리를 떴다. 혀에 닿은 귤이 무슨 맛인지 지우개를 씹는 기분이었다. 00은 다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각자 자기들 할 일이 바쁜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현관 앞을 서성이던 00은 누군가 나가며 현관문을 열어놓은 걸 확인했다.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신발을 신고 후다닥 문을 나섰다.


“저, 저기요-!”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00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단을 달리듯 내려왔다. 빌라 1층 현관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편의점으로 향했다. 이미 30분을 넘긴 지 오래였다. 충전된 핸드폰을 찾아서 약속 장소로 가야 했다.






“약속 시간에 늦어서 정말 미안합니다. 날도 더운데 연락 미리 못 드려서 죄송해요. 제가 늦은 이유가 황당할 겁니다. 믿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근데 거짓말은 아닙니다.”


이야기를 듣고 난 A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들어본 지각 사유 중에 가장 황당했다. 거짓말이라면 절대 믿지 못할 거짓말이었다. 좀 더 그럴듯한 이야기를 대야 믿는 시늉이라도 할 텐데 믿으라는 건지 믿지 말라는 건지 도통 모를 일이었다.


맴- 맴- 맴-


화창한 여름날이었다. 해는 뉘엿뉘엿 무르익어 더위를 한층 더했다. 죽을 듯 울어대는 매미는 지치지도 않았다. A는 말없이 먼 하늘을 응시했다. 00은 멍한 표정으로 새하얗게 질렸다가 절망감에 새빨갛게 익었다가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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