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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May 21. 2023

커피 맛이 나는 노래

에티오피아

그날의 선곡은 퍼렐 윌리엄스의 <Happy>였다. 가사, 가창, 선율, 리듬이 경쾌한 행복감을 한데 뿜어내는 노래. 몽실몽실한 솜사탕 같은 기분이 이어폰을 타고 귓가에 흘러왔다. 한 번 들은 걸론 부족하지 싶었다. 뒤로 가기 버튼을 눌렀다. 한 번 더 들을 요량이었다. 어쩌면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더. 그날만큼은 퍼렐이 노래하는 행복감이 꼭 내 마음 같았다. 발걸음에도 힘이 붙었다.


손뼉 쳐, 지붕 없는 방 같은 기분이 느껴진다면(Clap along if you feel like a room without a roof)
손뼉 쳐, 행복이 진실이라고 여겨진다면(Clap along if you feel like happiness is the truth)
손뼉 쳐, 너에게 있어 행복이 뭔지 안다면(Clap along if you know what happiness is to you)
손뼉 쳐, 바로 그게 네가 하고픈 거라면(Clap along if you feel like that's what you wanna do)


그날 나를 채운 행복감의 기원은 에티오피아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에티오피아 사람들.


"파란지!"


나를 발견한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어김없이 이렇게 외쳤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보다 황홀하고 심마니의 "심봤다!"보다 사랑스러운 외침. 파란지는 에티오피아 공용어인 암하라어로 '외국인'을 뜻하는 말이랬다. 이곳은 아직도 외국인이 생경하고 신비로운 존재인 땅이었다.


반원형으로 둘러선 마을 사람들이 나를 관찰하거나 내 보드라운 직모를 만져보고는 호들갑 떨기를 여러 번. 덕분에 사주에도 없었을 인기를 누리게 된 나는 불특정 다수의 관심 대상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지를 몸소 깨달았다. 하지만 생전 처음 받아보는 관심이 영 싫기만 한 건 물론 . 그 덕에 내게 떨어지는 콩고물이 제법 달아서였다. 그 콩고물은 제 품 안의 소중한 망고 한 알을 내게 건네는 소녀의 마음이던 날도 있었고, 어느 가족의 부산한 저녁 밥상에 내 몫으로 하나 더 얹어지던 숟가락이던 날도 있었고, 초면인 아주머니의 기습적으로 뜨겁고 일방적으로 진한 포옹이던 날도 있었다. 물론 그 가운데 제일 달고 고소한 콩고물은 '분나(Bunna)'였지만.


분나는 암하라어로 '커피'를 뜻하는 말. 상투적이게도, 에티오피아는 커피를 빼놓고는 논할 수 없는 나라였다. 커피가 처음 발견된 나라가 에티오피아랄지, 전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원두의 일종이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랄지 하는 커피 상식을 들먹일 필요도 없었다. 커피로 시작해 커피로 끝나는 이곳의 하루하루. 바로 그 일상이 에티오피아를 '커피의 나라'로 기억하게 했다.


집이나 카페 앞에 낮은 의자를 펴고 앉은 사람들이 "파란지!" 하고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나를 제 옆에 앉혔다. 나한테 분나를 대접하겠다고 그러는 거였다. 처음엔 나도 의심부터 했다. 이 커피 값으로 나한테 얼마를 뜯어 가려는 걸까? 혹 커피를 대접한 대가로 나한테 뭘 팔아보려는 수작은 아닐까? 하지만 조건 없는 분나 대접이 하루에도 여러 번. 그런 나날이 이어지기를 몇 날 며칠. 나는 에티오피아 사람들을 향한 내 서툰 의심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정성껏 내린 차 한 잔에 담아 보내는 따스운 마음. 도무지 그 마음 말곤 이들이 날 초대하는 데에 다른 목적이 없어 보였다.


분나는 진했다. 한약처럼. 그 진한 분나를 나는 하루에도 여러 잔 마셨다. 손마다 들려 있는 에스프레소 잔이 비워져 가도록 에티오피아 사람들과 내가 나눈 긴 이야기. 그 이야기가 좋아 나는 누구의 분나 대접도 마다 할 수 없다. 카페인 과다로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을 모르는 체하며 내가 그들과 나눈 귀한 이야기들은 이를 테면 이런 것들이었다.


1. 에티오피아에는 '하이에나마저도 길들여질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길들인 하이에나와 공생하는 동부 지역 하라르(Harar) 사람들의 전통에서 비롯된 말이다. 흔히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도 하지만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그들은 사람도 하이에나도 사랑의 힘으로 변하고 길들여질 수 있다고 말한다.


2. 내가 에티오피아를 여행했던 2017년 5월 당시, 현지를 휩쓴 인기곡은 국민 가수 테디 아프로의 앨범 <에티오피아> 수록곡들이었다. 그중에는 <테오드로스 황제(Atse Tewodros)>라는 곡이 있는데, 1800년대 중반에 에티오피아의 중앙집권화와 근대화를 도모하고 영국군에 맞서 싸운 테오드로스 황제를 찬양하는 곡이다.


3. 이 밖에도 1800년대 후반에 즉위했던 메넬리크 2세가 에티오피아의 역사적인 군주로 회자된다. 유럽 국가들이 앞다퉈 아프리카 땅을 분할 통치했던 제국주의 시대에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무이한 독립국으로 남을 수 있었다. 이탈리아군을 격파한 메넬리크 2세의 공이었다.


4.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일무이하게 고유한 언어와 문자를 가진 나라이기도 하다. 암하라어가 바로 그 증거다.


5.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사랑하는 건 분나만이 아니다. 맥주는 이곳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주류다. 그중에서도 이른 오후 카페 앞에 앉은 사람들 손에 많이 들린 맥주는 하베샤(Habesha) 맥주. '하베샤'란 오늘날 에티오피아 사람들, 그리고 옆나라 에리트리아 사람들을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6. 이런 에티오피아에게 우리나라는 형제의 나라다. 6·25 전쟁 당시 에티오피아가 우리나라에 자국의 최정예 부대를 파견했던 역사 덕분이다. 에티오피아의 참전은 자국의 이익과 무관한 자발적 참전이었다. 그리고 그 참전은 그로부터 20여 년 후 쿠데타를 통해 들어선 에티오피아 공산주의 정권이, 북한군에 맞서 싸웠던 참전 용사들의 재산을 몰수하게 한 참전이기도 했다. 우리는 잊고 지낸 이 역사를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기억했다. 그리고 내게 매일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에티오피아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원 없이 마시는 최고급 커피. 고원 지대의 온화한 날씨. 날씨를 닮아 어진 사람들. 그들이 들려주는 다채로운 이야기. 그 이야기를 듣고서 어쩐지 저릿해지는 내 마음.


이런 만족감에 취해 퍼렐 윌리엄스의 노래를 듣고 또 듣던 오후였다. 노래 속 말마따나 행복이 진실 같았고, 진실이 행복 같았다. 내게 행복감을 선사한 에티오피아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하늘까지 치솟을 듯했다. 이름도 어여쁜 에티오피아. 이 땅엔 오로지 사랑과 평화뿐인 듯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노래가 끊겼다.


나는 고개를 떨궈 아래를 쳐다봤다. 과연 이어폰 줄이 공중에서 덜렁이고 있었다. 역시 이어폰 줄이 핸드폰에서 빠져서 노래가 멈춘 게 맞았다. 이어폰 잭을 다시 핸드폰 단자에 꼽으면 그뿐이리라. 그렇게 생각한 시간이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찰나가 지나기 무섭게, 아래로 떨군 내 시선 속으로 또 다른 실체가 들어왔다. 내 등 뒤에서 내 허리쯤 되는 높이에 멈춰 있는 웬 남자의 정수리. 그 정수리는 이내 방향을 180도 틀어 뒤로 돌더니, 내가 걸어오던 방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그 즉시 나는 깨달았다. 그 정수리는 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집어가는 도둑놈의 정수리란 사실을. 핸드폰에서 이어폰 줄이 빠졌던 건 이어폰 줄이 가로수 덤불 따위에 걸렸기 때문이 아니라, 저 도둑놈이 핸드폰을 내 주머니에서 꺼내갔기 때문이란 사실을.


그때부터였다. 에티오피아 북부 도시 메켈레(Mekele)의 어느 한적한 도로 위에서 현지인 도둑놈과 외국인 여행자의 분노의 질주가 시작된 건.


나는 뛰었다. 전속력으로. 생명줄과 같은 핸드폰을 잃지 않겠단 일념으로. 그런데 뛰어도 뛰어도 도둑놈과의 격차가 좁혀지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놈도 자기의 전속력으로 뛰고 있었을 테니.


도둑놈은 인도를 달리다 못해 차도를 가로질러갔다. 그놈을 따라 나도 차도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차도 위에 차는 없었다. 따사로이 내리쬐는 오후 두 시 햇살. 광활한 아프리카 차도 위에서 벌어지는 고요한 추격전. 나는 문득 우리의 장면 속에 소리가 없음을 감지했다. 그래서 냅다 질렀다.


"야!"


사실 내가 지른 소리가 "야!"였는지, "아!"였는지, "헤이!"였는지, 그도 아니면 활자로 적기 민망한 육두문자였는지, 그건 확실치 않다. 다만 내가 그때 소리를 질렀고, 그 괴성에 놀란 도둑놈이 내 핸드폰을 길바닥에 살포시 내려놓고 사라졌단 사실만이 확실하다. 나는 핸드폰을 향해 달려갔다. 핸드폰은 길바닥 위에서 안녕했다. 바로 그때 도둑놈 일행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걸 내게 건넸다. 하사라도 하듯. 나는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도둑놈이 됐든 지금 내 눈앞에 선 이 일행 놈이 됐든, 누구 한 놈의 낯짝을 시원하게 한 대 후려쳐도 분이 안 풀릴 판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엔 생명줄을 되찾았단 안도감, 그리고 내 성인기 생애 최전속력을 내고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 때문에 "하, XXXX가 왜 남의 핸드폰을 갖고 튀고 XX이야 XX, 헉헉"이라고 어린 시절부터 익히고 다진 우리나라 고유의 육두문자 시리즈를 한 문장 안에 모두 담아 육성으로 뱉어내기만 하고 말았다. 아무튼. 핸드폰은 이제 내 손안에 있었다.


특별한 계획도 없이 햇살만 좋았던 그날 오후. 나는 메켈레에도 대학이 있다는데 구경이나 한 번 가볼까 하는 생각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거리를 걸은 것뿐이었다. 그뿐이었던 소박한 오후에 난데없이 절도 사건이 들이닥친 것이었다. 가쁜 숨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도둑놈이 괘씸해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내가 걸어왔던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이 와중에 한가로이 대학 교정이나 구경하고 있을 정신이 없었다. 숙소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파란지!"


그 소리가 또 들려왔다. 작은 동양 여인을 부르는 에티오피아 사람들만의 주문 같은 호어.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돌아보니 노상에 의자를 펴고 앉은 두 남녀가 내게 손짓하고 있었다. 나더러 얼른 이리 와서 분나 한 잔 들지 않고 뭐 하냐고 묻는 표정으로. 나는 그 초대에 덥석 응했다. 남은 숨이나 더 고르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었다. 방금 저기서 내가 도둑놈 쫓아가던 거 다 봤어?


"노우(no)!"


그들은 본 게 없었다. 지척에서 격정적인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 채 햇살 좋은 노상에서 분나를 홀짝이던 사람들이었다. 내가 겪은 일생일대의 절도가 이토록 미소한 사건이었단 사실에 놀랄 틈도 없이, 나는 격앙된 목소리로 그들에게 사건 경위를 상술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 얘길 들으며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가, 깔깔거리고 웃었다가, 종국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행이라고 말했다. 내가 핸드폰을 찾아서.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우리 손에 들린 에스프레소 잔들이 시나브로 비워져 있었다.


분나를 다 마신 남자는 유유히 생업 전선으로 돌아갔다. 그는 오토바이형 택시 '바자지(bajaj)' 기사였다. 태권도를 배운 적이 있다며 날 향해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사부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숫자를 한국어로 하나부터 열까지 읊어 보이기도 했다.


나도 그들에게 고맙다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숙소를 향해 걸어갔다. 타오르던 감정의 불덩어리를 이야기 속에서 식혀냈던 덕일까. 마음이 잔잔했다. 방금 전에 도둑놈과 추격전을 벌였던 여행자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물론 분나를 들이켠 탓에 가슴은 다소 뛰었다.


그날 이후론 퍼렐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어쩐지 깊고 진한 분나 향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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