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사계(四季)를 보내고 난 후에 보이는 이 도시의 미학
오늘은 글보다는 사진을 보여드리고 싶다. 2018년을 맞는 겨울에 이 곳에 와서, 어느덧 세 번째 가을을 맞았다. 이제 겨울이 되면 이 곳에서 보낸 시간도 만으로 3년이 된다. 연애를 할 때도 사계절을 한 번은 보내봐야 그 사람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다는 말을 한다. 도시에서의 삶도 그렇다. 첫 해에는 모든것이 마냥 신기하고 즐겁다가, 두번째 해에는 신기함이 반 심드렁함이 반이었다. 세번째 해에는 전 세계를 다 우울하게 만든 코로나 라는 변수 앞에서 주로 집에 갇혀있다가 조심조심 산책이나 다니곤 했다. 없어봐야 소중한 줄을 안다고, 코로나로 밖에 나다니기가 어려웠던 몇 개월 동안 이 도시에 대한 사랑이 더 깊어졌다.
선데이수는 이 도시의 어떤 면을 사랑하는가. 먼저 이 사진을 보자.
도쿄라는 도시에 중심점을 찍는다면 바로 이곳이 될 것이다. 고쿄(皇居)는 일왕의 거처인데, 이 곳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도록 엄청 큰 녹지를 조성해놓았다. 그걸로도 부족한지 해자를 만들었다. 일왕의 거처를 해자의 물길이 둘러싸고, 그 길을 따라 산책로를 만들어두었다. 이 산책로에서 바라보는 도쿄 도심 풍경을 좋아한다. 높은 빌딩이 잘 보이지 않는다. 뭐랬더라, 높은 빌딩에서 내려다보면 안 되니까 고도제한을 두었다나.
오밀조밀 비슷한 높이로 늘어서 있는 건물들이 정겹다. 이 사진을 찍던 날에는 나무에 꽂혔다. 나무를 어찌나 정성스럽게 다듬어놨던지, 멀리서 물에 비친 모양을 보니 마치 청포도알을 나란히 늘어놓은 것처럼 보였다.
일본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선데이수가 늘 꺼내놓는 에피소드가 있다. 무인양품의 아트 디렉터 후카사와 나오토 상의 강연에서 들은 이야기다. 무인양품은 심플하고 실용적인 일본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불린다. 그렇다면, 그가 일본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
그는 밤비행기를 타고 상공에서 도쿄를 바라볼 때라고 답했다.
밤에 고층건물 꼭대기를 보면 빨간불이 깜빡인다. 항공안전을 위한 시설로, 어느 나라든 일정높이 이상 건물에는 이걸 꼭 설치하게 되어있다. 말이 그렇지 생각보다 관리가 쉽지 않다. 이런저런 이유로 고장이 날 수도 있고, 또는 LED의 수명이 다했는데 교체하는 걸 깜빡했을 수도 있다. 그 편이 더 이해하기 쉽다. 그렇게 해외를 돌아다니다 일본에 오면, 밤비행기에서 바라보는 도쿄 시내에 빨간불이 촘촘히 박혀있는 게 신기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것은 해야 하니까 한다" 라는 고집이 느껴지는 순간이라고 설명했다.
말로만 들어서는 참 뭐라는지 모르겠다. 이 도시에 살다보면 어렴풋이 그 뜻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전혀 다른 장면 같지만, 아래 사진도 결국 같은 종류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뭔가 여유롭고 편안한 아름다움이라기보다는,
완벽한 기하학적 균형이 만들어질 때까지 깎아내고 깎아 낸 데서 오는 긴장감이 느껴진다.
도쿄에서 느껴지는 그 긴장감이 나는 좋다. 오히려 내가 이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었다면, 그 긴장감이 나를 옭아맨다고 느껴 답답해했을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 나는 이 곳에서 이방인의 신분이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 자체로 느낄 수 있다는 특권이 있다. 이런 프레임을 발견하면, 스트레스 받을 것 없이 그냥 카메라를 들어 프레임에 담으면 그걸로 그만이다.
위에서 '차렷' 한 것 같은 긴장감을 보여줬다면, 이번에는 한층 긴장이 풀어진 도쿄의 모습도 소개하고 싶다.
내 생각에 이 도시를 좀 더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철길이다. 신카이 마코토 영화에나 등장하는 것 같은 기차가 오기 전 경고음과, 기차가 지나갈 때의 익숙한 소리. 서울은 지하철이 많은데, 도쿄는 지상철이 많다. 원래대로라면 철길 근처는 소음 문제 때문에 부동산으로 쓰기가 까다롭겠지만, 도쿄에는 지상철이 너무 많아서 그런 사치를 부릴 수 없다. 철길 바로 옆에 사람 사는 집이 있고 그렇다.
블로그에도 소개한 적이 있었다. 철길 옆 허름한 듯 정감있는 식당들.
기차가 일상에 가까이 있다 보니 '철도 덕후'들도 많이 있다. '철덕'들이야 뭐 어른이니까 각자의 취향이 있겠지만, 어린이들에게 최고 인기인 기차를 꼽으라면 역시 모노레일이다. 공항가는 길에 있다. 이 모노레일은 지상에서부터 한참 올라 간 고가에 철길을 지어놓았다. 기관사 없이 운전하는 게 가장 큰 특징이라, 모노레일 제일 앞칸에 타면 마치 기관사가 된 것처럼 철길을 바라보며 갈 수 있다. 언제 타든 앞자리를 노리는 어린이들이 있다.
다음은 역시 도쿄타워가 등장할 때다. 실은 파리에 있는 에펠탑의 모양을 그대로 베껴온 것 뿐이지만, 오랜 역사를 거치며 지금은 이 도시의 일부가 되었다. 2012년에 도쿄 스카이트리가 완공되면서 "도쿄에서 가장 높은 건물" 타이틀은 빼앗기고 말았지만, 그래도 꽤 높은 건물이 맞기는 한 것 같다. 도쿄 중심부에서 사방을 잘 둘러보면 도쿄타워가 고개를 빼꼼 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제 도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 된 도쿄 스카이트리는 사실 도쿄 사람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다. 역시 도쿄타워가 더 예쁘다는 얘기를 많이 한다. 어쩌면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걸 수도 있겠다. 새로운 상징물을 도시의 일부로 받아들일 시간 말이다. 음, 과연 그 날이 올 때까지 선데이수가 도쿄에 있을까? 모를 일이다.
위 사진을 도쿄타워 앞의 시바공원에서 찍었다.
서울에 살다가 도쿄로 가 보니 도쿄에는 도심 곳곳에 녹지가 많이 있다. 신주쿠가 고층건물이 많아 답답하다고는 하지만, 조금만 걸어가면 요요기공원도 있고 신주쿠교엔도 있고 그렇다. 볕 좋은 날 공원에 가면 돗자리 들고 공원으로 피크닉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집 회사 집 회사 하다보면 도쿄에 녹지가 많든 어쨌든 나는 늘 실내에만 있게 마련이지만, 그래도 주말에 맑은 공기 마시러 훌쩍 나갈 수 있는 곳이 많아서 좋다.
굳이 공원까지 안 가도 도심 속에서 녹지를 즐길 방법은 많이 있다. 아래 사진처럼 고층빌딩의 일부를 옥상정원으로 꾸며놓는 경우가 많아서다. 일본에서 직장을 다니면 점심시간에 상사와 함께 점심 먹으러 나갈 일이 많지 않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다가 어디서든 혼자 먹어도 이상하지 않다. 직장 근처에 이렇게 옥상정원이 있는 건물이 있다면 말할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물론 이런 시설이 있으려면 고층빌딩이어야 하고, 사회적인 이미지에 신경이 쓰일 만큼 유명한 회사에서 소유 또는 관리해야 하니, 도쿄 도심에서도 아주 흔한 케이스는 아니지만, 그래도 잘 찾아보면 이런 환경이 갖춰져 있는 경우가 꽤나 있다.
아래 사진은 주택가 골목길에 갑자기 뿅! 등장한 커피 스탠드다. 앉을 자리가 없다. 정 가게 근처에서 커피를 마시고 싶다면, 가게 문 앞의 작은 벤치에 옹송그리고 앉아 지나가는 주민들을 바라보며 홀짝홀짝 마시는 걸 뭐라 하지는 않는다. 도쿄에서 유명한 카페라고 해서 어렵게 지도를 보고 찾아가면 이런 식의 커피 스탠드인 경우가 많이 있다. 간판이 없어서 "이 집이 이 집 맞나?" 한참 쳐다봐야 한다. 심지어 커피를 주문해 보면 꽤나 맛있기까지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한다. :)
하나 더, 이 가게의 인테리어도 도쿄의 골목길을 지나가다 보면 자주 발견할 수 있는 분위기다. 아주 좁은 공간을 활용해서 가게로 만들었다 보니, 덩치 큰 사람이 활개치고 다녔다가는 화분을 넘어뜨리기 딱 좋다. 도쿄의 사람 많은 거리에서 서로에게 부딪히지 않도록 신비한 주의력을 발휘하는 일본 사람들처럼, 도쿄에서 살아가는 이방인도 어느순간 어깨를 옹송그리고 도쿄라는 도시의 공간감에 적응하게 된다.
사진첩에 저장된 사진이 더 많은데,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만 들고 와 보았다. 다음번에 또 다른 사진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