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진이 일상인 나라, 불안과 화해하며 살아가는 법
어제 아침 일이다. 회의하는데 "지신데쓰! 지신데쓰!"라는 지진경보가 울려댔다. 경보가 울리고 지진이 오기까지는 1분 정도 시차가 있다. 회의실에 위험요소가 있는지 쭉 둘러보고, 그 자리에 세 사람이 있었으니 유사시에는 테이블 밑으로 다 들어가도 자리가 모자라지 않겠다는 계산을 했다. 그 게산이 서기까지 20초 정도 회의가 멈췄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시작됐다.
결국 지진은 오지 않았다.
저녁에야 일본 기상청이 지진경보 오류를 시인했다는 뉴스를 봤다.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 때 핸드폰을 안 가지고 있어서 못 봤는데, 무려 진도 7.3의 대지진이 올 거라고 경고했단다. 와, 못 봤기에 망정이지 그 경보를 봤다면 겁이 나서 도무지 태연하게 회의를 계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늘은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크든 작든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포의 대상, 지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지신데쓰! 지신데쓰!
2017년 포항에서 큰 지진이 났다. 그 때 나는 서울 사무실에 있었다. 10층 건물이 갑자기 흔들렸던 게 기억난다. 그게 내가 경험한 첫 번째 지진이었다. 한국에서는 지진경보 앱 같은 걸 깔아놓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고요하던 사무실에 적막을 깨는 흔들림이 왔고, 다들 지진을 겪어 본 적 없다보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파악하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진동을 느끼고, 사무실 안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까지 벙쪘던 시간이 기억난다.
그러고 나서 몇개월 뒤인 2018년 일본에 왔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니 걱정되는 게 많고 많았지만, 지진에 대한 걱정도 컸다. 일본에는 지진경보 앱이라는 게 있다는 말을 어디서 듣고 도착하자마자 그것부터 깔았다. 그리고 한달만에 지워버렸다. 깜짝깜짝 놀라는 것도 한두번이지, 경보가 울릴때마다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기 때문이다. 그 때는 앱 설정법을 잘 몰라서 진도 2~3짜리 지진까지 다 알람이 오도록 되어 있었는데, 알람이 너무 자주 와서 언제 조심해야 하고 언제 조심 안 해도 되는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나중에 누가 요령껏 설정하는 방법을 알려줘서 지금은 핸드폰에 잘 계신다. 내 위치를 설정하고, 주변에 진도 5 이상의 지진이 오면 알려준다든가, 이렇게 설정해 두면 대략 몇 개월에 한번 정도 알람이 울리고, 알람이 울린 후에는 진짜로 지진이 온다. 체감할 수 있는 정도로 말이다. 늦은 밤이나 새벽 자는 시간에 경보가 울리면 자다 깨니까 좀 번거롭지만, 그래도 확실히 안심이 된다. 하다못해 잠결에 이불이라도 뒤집어 쓸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기에 공공장소에 사람 10명이 모여있으면 그 중 5명 정도는 핸드폰에 지진경보 앱을 깔아놓은 것 같다. 그 때문에 소소한 에피소드도 생겨난다. 친구 이야기인데, 일본에 놀러와서 피아니스트 조성진 공연을 보는데 공연 중간에 지진경보가 울렸다고 한다. 말 그대로 경보이기 떄문에 듣기 편한 소리는 절대 아니다.
지신데쓰! 지신데쓰!
여기저기서 울려대는 소리를 듣고도 조성진 님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연주를 계속했다고. 과연 위인은 위인이다.
지진의 경험
지진지진 말로만 듣다가 실제로 경험해보면 기분이 참 이상하다. 말 그대로 땅이 흔들리는 거라, 지속시간이 길어지면 기사님이 핸들 팍팍 돌리는 버스 타고있을 때처럼 멀미도 난다. 진도가 몇인지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수직인지 수평인지가 중요하다든가, 진원과의 거리에 따라 다르다든가, 뭐 이런저런 이론적인 이야기들도 생활에서 체득하게 된다. 그래도 말하기 편하게 진도로 이야기하면, 진도 3 이상부터는 확실히 흔들림이 느껴진다.
내가 일본에 와서 직접 겪은 지진 중 제일 큰 건 진도 4 정도였던 것 같다. 물론 진원지에서는 진도가 더 컸을 수 있다. 지진을 느끼면 일본 기상청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진도를 확인해본다. 5~10분 정도 기다리면 지역별로 세분해서 진도를 알려준다. 도쿄 안에서도 미나토구는 진도 4, 시부야구는 진도 3 이라는 식이다. 치바에서 진도 5 짜리 지진이 났더라도, 도쿄에 있는 우리 동네에는 3만 왔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일본 기상청 지진정보 페이지를 링크해본다. 미관상으로는 촌스럽고 구려보인다. 디자인이랄 게 1도 없고 전부 텍스트다. 첨엔 "무슨 홈페이지를 이렇게 만들었어?"라고 생각했는데, 지진 났을때마다 접속하면서 보니 다 계획이 있는 거였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동시에 접속해도 서버가 잘 버텨주고, 로딩도 아주 빠르다.)
주거환경과 지진
지진이 미치는 영향은 주거에도 반영된다. 내 방 침대 주변에는 높은 가구가 없다. 침대옆에 책장을 두는 것, 한국에서는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 배치지만, 일본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배치다. 자다가 책에 얼굴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부터 침대 위에 걸어두던 액자가 있는데, 일본에 와서 몇달만에 치워버렸다. 액자가 아무리 예쁘단들 언젠가 내 머리위로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면 정이 딱 떨어지기 때문이다.
요즘은 한국 아파트에도 붙박이 가구를 많이 달아놓는다고 한다. 버리는 공간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일본 집에도 붙박이 가구가 많은데, 선호하는 이유가 좀 다르다. 공간활용보다는 안전을 위해 선택한다. 말 그대로 붙박이니까, 지진이 와도 넘어질 확률이 상대적으로 적기 떄문이다. 붙박이 아닌 가구를 사더라도 천장이나 바닥에 별도의 고정장치를 설치한다든가 해서 지진대비를 해 두기도 한다. 이런식의 "지진대비 무엇무엇"을 인터넷에 찾아보면 진짜 상상외의 카테고리가 많이 있다.
지진을 걱정하는 마음, 지진을 대비하는 마음
사무실에 안 쓰는 신발이 하나 있다. 평소에 높은구두를 잘 안 신지만, 그래도 가끔은 신게되는 날이 있는데, 하필 그런 날 큰 지진이 와서 대중교통이 마비되어 버리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든 날 가져다뒀다.
사무실 책상에 헬멧도 구비되어 있다. 지진 시 행동요령 같은 걸 보면 공통적으로 머리를 보호하라는 말이 나온다. 벽쪽으로 가라거나, 책상밑에 들어가라는 게 다 그런 맥락이다. 머리보호라는 목적으로만 보면 헬맷이 제일 효과적일 수 있다. 언제든 꺼낼 수 있도록 헬멧을 넣어 둔 서랍은 잠그지 않고 있다.
집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대표적인 게 생수다. 다 떨어지면 사는 게 아니라, 집에 늘 10~20L 정도는 재고가 남아있도록 미리미리 주문해둔다. 지진 대비 가이드를 보면 꼭 생수 구비해두라는 말이 있다. 큰 지진이 나면 수도나 전기, 가스 공급에 차질이 생길 수 있는데, 그 중에 미리 쟁여둘 수 있는 게 그나마 물이라서다.
지난 4~5월 긴급사태 선언으로 생필품 사재기 현상이 나타났을 때도 그 전에 비해 생수 사기가 어려워졌었다. 물론 슈퍼에 가면 다 있지만, 아마존에서 편하게 시켜먹으려고 할 때, 평소에는 하루면 오던 게 그 당시에는 최대 2주까지 걸렸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생수까지 사재기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일본은 2011년 대지진 당시 상당기간 물이나 전기, 가스 공급이 제한되었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생각이 생수에까지 미쳤을 수 있다.
사실 제일 무서운 상황은
회사나 집에 있을 때 큰 지진이 난다고 생각하면, 무섭고 힘들겠지만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라는 기대가 생긴다. 어쨌든 내가 잘 알고 익숙한 환경이다. 풍부한 자원,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 갖춰져 있다.
사실 제일 무서운 상황은 회사도 집도 아닌 제3의 공간에 있을 때 지진이 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여행지. 집에서 가까우면 그나마 다행인데, 신칸센이나 비행기를 타고 멀리까지 이동한 경우에는 아무쪼록 내가 머무는 동안 지진이 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덮어놓고 불안해하기만 하면 너무 힘드니까, 그나마 안심할 거리를 찾아보았다. 언제 어떤 지진이 날지를 정확히 에측할수는 없지만, 언제든 어떻게든 지진이 날 수 있다는 것만은 모두가 알고 있다. 위에서 걱정이 되니까 대비하자는 마음으로 주거환경과 일상에서 각각 노력하는 부분들을 적어보았는데, 나뿐 아니라 일본사회도 그렇다. 각종 건물과 인프라를 만들 때 내진설계를 꼼꼼하게 확인하고, 지진이 오면 어떻게 행동할지 매뉴얼과 가이드라인을 만들어놓고 수시로 훈련도 한다.
진짜 지진이 난 상황에서, 혼비백산하지 않고 가이드라인대로 질서정연하게 지시에 따라 움직일 수 있을까? 뭐든 100%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정기적으로 지진대비 훈련을 하고, 짜증날정도로 꼼꼼하게 소방점검을 하고 가는 일들을 겪다보면 그래도 좀 안심이 된다.
때로 불안한 마음이 들 때면 괜찮을거야,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그러는 수밖에 없기도 하다.
자연재해가 대개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급격하게 밀려 와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는다. 태풍이나 폭우는 "태풍이 온다더라"에서 "태풍이 왔다"까지 하루 정도는 말미가 있는데, 지진은 "지신데쓰"에서 "흔들린다"까지 1분 정도밖에는 말미가 없다. 그래서 더 무섭게 느껴진다.
일본에 오기 전에 지진에 대한 두려움이 컸고, 지금도 두렵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연재해니까. 그래도 매일매일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엔 스트레스가 크다. 아예 불안해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너무 불안해할 수도 없으니, 때로는 대비하고 때로는 신뢰하며 불안과 화해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지진경보 오류 뉴스를 보고 간만에 지진에 대해 써 보았다. 일본의 또 다른 자연재해, 태풍에 썼던 글을 관련글로 달아본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