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일하기 시작한지도 어느덧 3년차 중반을 향해 다가간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때, 한국에서 경험한 적 없던 일본의 방식에 익숙해지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도 생소한 부분이 많다. 그래도 이 곳에서의 시간이 쌓일수록 조금씩 적응해나가고 있다.
오늘은 일본에서 직장생활 하면서 겪었던 몇몇 일화들을 소개하려고 한다.
도장을 찍는다는 것
한국에서 나는 도장을 써본일이 거의 없었다. 내 도장은 엄마가 챙겨줬다. 대학생 때 은행 갈 일이 있으면 서랍에서 꺼내 손에 들려줬다. 어느 순간부터 도장 말고 서명으로 등록해두면 편하다는 걸 알게되어서 도장과는 영영 안녕을 고했다.
일본에 오니 달랐다. 아, 도장! 일본에서 회사를 다니면 회사 도장 말고 내 이름이 적힌 도장을 따로 들고다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각종 업무서류에 내 이름이 적힌 도장을 찍어서 이 업무가 누구 담당이었는지를 표시하는 것이다. 가령 식당에서 밥 먹고 영수증을 받을 때에, 계산원이 영수증 한켠에 본인 이름이 적힌 도장을 찍어준다. 나중에 이 영수증에 문제가 생겼을 때 도장을 찍어 준 직원에게 문의하라는 의미다. (물론 POS에 구매이력이 다 남아있지만, 도장이 찍힌 바로 그 영수증 종이는 POS에서 다시 뽑을 수 없다. 종이서류를 잃어버리면 아주 곤란해진다.)
그래서일까? 외근이 잦은 영업직 중에는 도장 전용 파우치를 따로 들고다니는 분을 만난적도 있다. 파우치 안에는 도장, 도장 찍을 때 종이를 받칠 수 있는 고무판, 그리고 인주가 풀세트로 들어있다. 요즘은 인주가 자동으로 찍혀나오는 고무도장도 많지만, 진지한 서류에는 나무도장을 사용해야 한다는 암묵적 규칙이 있어 인주도 따로 필요하다.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내가 관찰한 바로 일본에서 도장을 찍는 순서는 대충 이러하다.
도장찍을 위치를 확인하고, 서류 아래에 고무판을 댄다.
도장을 거꾸로 들었거나 비뚤어져 있지 않은지 확인해본다. 여분의 종이가 있으면 미리 도장을 찍어보는 경우도 있다. 찍어보고 문제가 없으면 그 각도 그대로 정식 서류에 도장을 찍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주를 묻힌다.
도장을 찍는다. 혹시 인주가 덜 묻을 수 있으니 지그시 누른 채 0.5초 정도는 기다려준다.
도장에 묻은 인주를 닦고, 서류를 후 불거나 살짝 털어서 인주가 번지지 않도록 한다.
좀 산만해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도장을 찍을 때만큼은 아주 진지해져서 차분하게 도장찍기 위한 절차를 하나하나 밟는다. 이 과정을 지켜보고 나면 나도 모르게 도장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 도장!
종이문화와 팩스
다음은 팩스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팩스를 써본일이, 글쎄,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정도였던 것 같다. 관행적으로 명함에 팩스번호를 적어놓기는 했지만, 그 번호로 실제 팩스를 보내거나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니 사실, 팩스로 서류를 주고받으면 나중에 히스토리를 추적할 수 없어 불편하지 않은가. 요즘은 스캐너 성능도 좋고 하니, 종이서류를 외부에 보낼일이 있으면 PDF로 스캔을 떠서 이메일로 보내곤 했다.
일본에서도 물론 팩스와 이메일 중 어느쪽을 더 많이 사용하냐고 물으면 당연히 이메일 쪽이 우세하다. 그래도 기업마다 선호하는 방식이 있어서, 어떤 기업에서는 반드시 서류를 팩스로 보내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되면 좀 귀찮아지는데,
종이서류를 우편 또는 팩스로 수신한다.
피드백(RVSP, 질문에 대한 회답 등)을 손글씨로 정성스럽게 작성한 후 팩스로 발신한다.
수신/발신된 종이서류는 파일철을 만들어 따로 보관한다.
이 방식에 장점이 전혀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RSVP, 설문조사 등 여러 수신처에 피드백을 요청하는 경우에 유용할 수도 있다. 이메일로 보내면 이메일을 잘 수신했다는 둥 감사하다는 둥 한 번 더 연락해야 하는 수고가 발생하는데, 팩스로 보내면 가만히 앉아서 팩스가 오기만을 기다렸다가 하나하나 손으로 취합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메일로 Google Form 링크를 보내면 되지 않느냐, 라는 의문도 든다. 나도 그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냥, 팩스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구나 라고 이해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시간약속은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내 단편적인 경험으로 일반화해서 말하기 어려운 영역이기는 하지만, 일본에서 업무상 미팅을 할 때 신기했던 부분이 있다. 시간약속이다.
10시에 미팅하기로 했다면, 9시55분부터 10시 사이에는 뿅 하고 나타나야 한다. 기업에 따라서는 입구에서 방문접수를 하고, 주차증을 받고, 등등의 절차가 있어서 시간이 좀 더 드는 경우도 있다. 그 절차를 다 마치고 기업 로비 또는 회의실 앞까지 도착해서 내선전화로 "저 왔어요"라고 말하는 시간이 9시55분부터 10시 사이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초행지라면 더더욱 20분 정도는 일찍 도착한다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좋다.
물론, 어느 나라에서나 미팅에 늦는 건 별로 권장할 만한 행동이 아닐 것이다.
반대로 일찍 도착한 경우라면 어떨까? 그냥 바로 미팅을 시작하면 안 되는 걸까?
내 경험상, 기본적으로는 상대방이 10시부터 시간을 내 주기로 했기 떄문에 10시 이전에 방해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일본에서 자주 듣는 말 중에 '폐를 끼치지 않는(迷惑をかけない)'이라는 게 있다. 늦지도 이르지도 않게 미팅시간에 딱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노력의 연장선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회식비는 각자
이 부분은 일본에서도 기업마다, 상황마다 다 다르기는 한데, 회식비를 각자 내는 경우가 생각보다도 더 많이 있다. 주변에 물어보니 n빵하는 경우도 있고, 막내가 총무 역할을 맡아 높은 직급이 높은 비율로 부담하도록 회식비 챠트를 짜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회식비를 각자 낸다고 하면 당장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각자 밥 먹는 양도, 술 마시는 양도 다른데 어떻게 회식비를 n빵한단 말인가? 그래서 일본에서 직장 근처에 있는 이자카야에 가면 높은 확률로 코스메뉴가 준비되어 있다. 인당 얼마를 내면 샐러드, 메인, 면, 디저트 등의 구색을 갖춘 코스요리를 내어주고, 얼마를 더 내면 '노미호다이(飲み放題)'라는 이름으로 일정시간 동안 음료를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옵션까지 붙여준다.
이런 이자카야에서 코스요리를 서빙할 때 아주 중요하게 신경쓰는 부분은 인당 몇개가 나오는지다. 고기를 예로 들어보자. 한 사람 당 한 조각 이라는 식으로 딱 떨어지게 배분이 되어야 한다. 인원수에 맞게 준비한다. 회식 가겠다고 해 놓고 당일에 몸이 안 좋다고 빠지는 경우, 운 나쁘면 코스 주문 취소가 안 되어서 회식비를 고스란히 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한국 사람인 내 입장에서는 노미호다이 옵션을 만들어 놓으면 소위 '본전'을 뽑아야 하니 술을 너무 많이 마시게 되는 게 아닌가, 라는 걱정이 든다. 뭐, 솔직히 그런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 같다. 내 경험으로는 이 옵션 덕분에 술을 덜 마실 수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한국에서는 소주 한 병 놓고 주거니 받거니 술을 따르면서 마시다보니, 상대방 잔이 비었는지도 확인해야 하고, 상대방 먹는 속도에 어느정도 맞춰줘야 한다. 정신 차리고 보면 주량보다 더 마시는 경우가 많다.
반면 일본에서는 각자 취향에 따라 술을 한 잔씩 시켜놓고 마신다. 노미호다이 옵션에서 어떤 음료를 제공하는지는 식당에 따라 다르지만, 맥주/와인/위스키/무알콜음료 등 종류가 아주 다양하다. 술이 약하면 무알콜음료를 주문하면 된다. 한국에서 회식할 때 남들 다 술 마시는데 나만 콜라나 사이다를 따로 주문해 먹는 건 아무래도 눈치 보이는 일이지만, 일본에서는 음료 무제한 옵션 안에서 각자 시키면 되니 눈치 볼 일이 없다. 철저한 개인주의 분위기에 잘 어울리는 방식인 것 같다.
편지와 선물로 인사하기
긴자에는 1904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전통의 문구점 이토야(Itoya)라는 곳이 있다. 연말에 이 곳에 가면 갖가지 디자인의 연하장(年賀状)으로 가게 한 층이 가득 차 있다. 연하장을 핑계로 한 해 동안 신세졌던 분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한다.
회사에서 연하장 수신처를 조사한 다음, 인쇄업체에 문구와 수신처 리스트를 넘겨서 한꺼번에 처리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 때 수신처에는 기업명은 물론 내가 신세지고 있는 담당자 이름과 직책도 들어가야 한다. 그 편이 더 정중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편 이 수신처에 오타라도 나면 감사의 마음을 전하려다 도리어 상대방 기분이 상할 수 있으니, 그런 불상사가 없도록 여러 번에 걸쳐 성심성의껏 점검을 한다.
편지 말고 선물로도 인사를 한다. 그 중 하나가 오츄겐(お中元), 오세이보(お歳暮)다. 오츄겐은 여름나절에, 오세이보는 연말에 보낸다. 각각의 시즌이 되면 백화점을 비롯한 유통업체들이 가격대별, 품목별 선물을 제안하며 총력 홍보를 한다. 선물을 정할 때 제일 중요한 건 역시 포장과 이름값이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유명품종의 쌀, 신선한 과일로 만든 주스, 각 지방의 특산물 등이 선물로 인기가 높다.
한편 정기적인 선물 말고, 수시로 하는 선물도 있다. 테미야게(手土産)다. 담당자가 바뀌어서 새로 인사하거나, 영업목적으로 상대방의 회사에 방문하는 등의 경우에 인사차 가져가는 작은 선물을 말한다. 테미야게도 종류가 천차만별이지만, 받는 사람이 부담스러워하지 않는 선에서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가격대로는 1~3천엔 사이가 많고, 품목으로는 역시 과자가 흔하다. 외근 나가는 길에 챙겨가는 경우가 많아, 기차나 지하철역에 이런 과자를 파는 매장이 많이 있다.
쓰다보니까 자꾸 다른 포인트가 생각나서 글이 길어졌다.
처음에는 한국과 다른 일본만의 방식이 마냥 귀찮고 싫기만 했는데, 일본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왜 이런 방식을 고수하는지에 대해 조금씩이나마 이해가 쌓인다. 여전히 이해 안 되는 부분도 많이 있지만...
어쨌든 한국에 살다가 해외에 나오면 내가 살아 온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와 부딪히게 된다. 그 다른 방식을 때로는 이해해보고 때로는 짜증내보며, 어떻게든 적응해나간다.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소설 제목처럼, 그 과정이 다 <해외생활의 기쁨과 슬픔>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