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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Oct 13. 2019

태풍 '하기비스'가 지나간 자리

이웃나라 일본을 읽는 키워드, 자연재해


2011년 3월 11일, 대지진의 기억


일본에 사는 한국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화제가 있다. 2011년 3월 11일 대지진 때 어디서 무얼 했고, 어떤 어려움을 겪어가며 집으로 돌아가서 가족들을 만났는지, 그 후 한동안 삶에서 어떤 불안함을 겪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대지진이 발생한 건 평일(금요일) 오후였다. 모든 교통편이 운행중지 된 건 물론, 전화나 인터넷도 먹통이 되었다고 한다. 그 시각에 사무실이나 집에 있던 경우라면 오히려 낫지만, 외출중이었던 경우에는 사무실 또는 집까지 몇 시간씩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도쿄 시내에서 대중교통으로 1시간 이상 가야하는 사이타마나 치바, 카나가와에 사는 사람들은 교통편이 일부라도 재개될 때까지 기약없이 몇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고도.


당일을 무사히 넘겼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전력망이 복구될때까지 한달 넘게 전력이 제한공급 되고, 물류망도 마비되어 마트에서 생필품을 구하기 어려워지는 등 생활의 어려움이 이어졌다고 한다.


직접 겪어 본 일도 아니고, 필자 역시 일본에서 생활한 지 2년이 조금 안 되어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어쨌든 당시 일본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그 때의 기억이 아주 강렬한 트라우마로 남아있으리라 추측한다.


그리고 기억은 과거에만 머물고 마는 게 아니라 현재의, 미래의 생각과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일본이 슈퍼태풍 '하기비스'에 대비하는 자세


진작부터 '슈퍼태풍'이라고 명명되었던 태풍 19호 '하기비스'가 어제(12일) 저녁 관동지방을 휩쓸고 지나갔다.


한 달 전 도쿄 인근 교통을 마비시켰던 태풍 '파사이'와 '하기비스'의 크기를 비교한 위성사진 (이미지 출처 Weather News)


위 이미지를 보면 '하기비스'의 위력이 어느정도인지 가늠이 된다. 일본 열도를 다 덮고도 남을만큼 거대한 비구름을 몰고 왔다. 태풍 자체의 영향도 있지만, 태풍 근처로 형성된 비구름의 영향이 커서 비가 엄청나게 왔다. 도쿄에서 1시간 반 거리 온천마을인 하코네의 경우 연간 평균 강수량이 3,000mm 수준인데 '하기비스' 영향으로 지난 48시간 동안에만 1,000mm가 넘는 비가 쏟아졌다고.


한 달 전 일요일 밤에 난데없이 강풍을 몰고 나타나 도쿄 인근 교통을 마비시켰던 '파사이'와 달리, 이번 '하기비스'는 한참 전부터 뉴스며 신문에서 '역사상 유례 없는 태풍'이라고 광고했기 때문에 태풍이 오기 며칠전부터 정부와 기업은 물론 개인들도 나름의 대비책을 마련해두었다.


어제 하루 도쿄에서는 백화점, 슈퍼마켓, 영화관, 카페, 심지어 웬만해서는 잘 쉬지 않는 편의점까지 거의 모든 편의시설이 임시휴업 했다. 태풍이 이미 지나간 오늘도 오후 2시 이후에 개점한다고 미리부터 공지해 둔 가게가 많다.


(오늘은 이미 비가 그쳤는데 그냥 열면 되는 거 아니냐!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반나절 더 쉬는 데에는 출퇴근 교통 문제가 있다. 도쿄 시내로 출퇴근 하는 사람들은 지상철(地上鉄)을 많이들 이용한다. 지하철과 달리 지상철은 철로가 바깥에 노출되어 있다. 태풍으로 철로에 나무가 쓰러져 있다거나 하면 안전확인이 될 때까지 운행을 정지하기 때문에 점원들이 출근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온다. 한 달 전 '파사이' 때만 해도 중앙선(中央線)이 마비되는 바람에 도쿄 시내를 기준으로 북서쪽의 미타카(三鷹)나 하치오지(八王子) 등지에서 출퇴근 하는 사람들이 한동안 대체 교통편을 이용해야 했다.)


며칠에 걸쳐 정전(停電)을 경험한 적 있어서일까? 데우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신선식품 코너 역시 전부 텅텅 비어있다.
녹색채소를 찾아볼 수 없는 슈퍼마켓의 진열대.



어젯밤을 보내고 난 개인적인 소회


태풍이 오기 이틀전인 10일과 11일에 각각 마트에 가서 식료품을 사다 놓았다. 10일에도 이미 녹색채소나 계란 종류가 많지 않아서 '내일 다시 와 볼까'라고 생각하며 최소한만 골랐는데, 11일에 가니 위 사진처럼 매대가 전부 텅텅 비어있었다.


생수 같은 생필품은 아마존(Amazon)에서 배달시키기도 하지만, 지난 10월 1일부로 소비세가 8%에서 10%로 인상되면서 그 전에 생필품을 사재기 해 두려는 사람들 때문에 마비된 물류망이 아직 전부 복구되지 않은데다, 새롭게 태풍 영향으로 밀려든 주문도 있어 주문하고 3~4일 후에야 배송이 가능하다고 떴다.


태풍 당일인 어제(12일)은 말 그대로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오전까지는 비가 오는구나, 하고 말았는데 오후에도 계속되니 걱정이 많아졌다. NHK 재해속보를 틀어놓고 걱정하다가, TV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폭우'라느니, '재해경보 5단계 중 사상 최초로 최고 레벨을 발령했다'느니, '국민들께서는 정부의 재해경보를 기다리지 말고 목숨을 지킬 수 있도록 행동 해주시기를 바란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무서움이 배가되는 것 같아 잠깐 꺼 두었다가, 그래도 현재 상황이 어떤지 궁금해 다시 틀었다가 하며 하루를 꼬박 보냈다.


심지어 저녁 여섯시 반 즈음에는 꽤나 큰 지진까지 왔다. 이거 참, 그야말로 가지가지 한다고 해야 하나. 치바에서 진도 5.7 규모로 왔고, 필자가 사는 도쿄 23구는 진도 3을 기록했다. 그 정도면 차 타고 있거나 걷는 중이라면 느끼기 어렵지만, 어제처럼 집에 가만히 앉아있는 상황에서는 충분히 흔들림이 느껴지는 규모다. 안 그래도 빗소리에 무서워 죽겠는데 땅까지 흔들려서 멀미가 났다.


태풍 본체가 본격적으로 도쿄에 접근해 온 건 저녁 9시 즈음이었는데, 그때부터는 빗소리에 바람소리가 더해져 무서움도 더했다. 창문 밖으로 고오오- 하는 바람 소리, 바람에 맞아 창문이 덜컹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린다. TV에서는 창문이 깨질 수 있으니 창문 가까이에 있지 말라고 한다. 첨에 집 보러 왔을 땐 커다란 창문으로 해가 잘 든다는 게 큰 장점이었는데, 창문이 크니 어디 피할데가 없네.


저녁 10시 이후에 태풍이 도쿄보다 북쪽에 위치한 나가노 현으로 이동하면서는 빗소리도 바람소리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하루가 전부 다 꿈이었던 것처럼 맑고 푸른 하늘에 햇살도 쨍쨍하다. 이렇게 태풍이 지나간 건가.


아직 구체적인 피해상황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에서도 파악하고 있는 중인 것 같다. 아무쪼록 피난장소로 이동하셨던 분들도 무사히 자택으로 복귀하시고, 침수 등 피해를 겪은 지역도 얼른 복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자연재해와 일본


한편, 필자는 이번 태풍을 겪으며 새삼 자연재해와 일본을 놓고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다.


어느 나라든 자연재해는 예상할수도 피할수도 없는 것이지만, 환태평양 지진대 위에 위치했고 태풍이 형성되는 태평양을 마주한 섬나라 일본에서 자연재해는 조금 더 일상생활에 가까운 문제가 아닐까 하는. 태풍은 그나마 예측이라도 할 수 있지만 지진은 정말 언제 어떻게 일어날지 모르고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한다.


지진은 예측이 안 되니 대비도 안 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매일매일 지진이 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본에 오기 전에 일본은 어떤 나라일까 궁금해하며 하릴없이 인터넷을 탐험하다가, '30년 이내에 70% 확률로 발생한다고 예측된 직하지진'에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 진 '도쿄방재'라는 책자를 보고 깜짝 놀랐던 게 새삼 기억났다. 지진으로 지반이 흔들릴 때 수평 방향인지 수직 방향인지에 따라 피해규모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데, 수직 방향의 직하 지진의 경우 그 피해가 훨씬 크다고 한다. 도쿄도에서는 직하지진에 대비하기 위한 매뉴얼인 '도쿄방재' 책자를 일본어뿐 아니라 영어, 중국어(번체, 간체), 한국어로 번역하여 업로드 해 두고 있다.



정부나 지자체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지진에 대비하는 건 마찬가지로, 아마존이나 라쿠텐(Rakuten)에 가 보면 아래 사진 같은 지진키트를 판다. 내용물은 다음과 같다.


전화와 인터넷망이 끊겨도 작동하는 AM/FM 라디오, 랜턴, 장기보존이 가능한 비상식량, 물, 공기를 넣으면 쓸 수 있는 간이침대, 비상 시 5~8회 정도 사용할 수 있는 간이화장실, 마스크, 일회용 슬리퍼, 물티슈, 비상시에 물을 채워넣을 수 있는 3L 크기의 봉투, 필기도구 등.


언제든지 비상상황이 오면 가방을 휙 집어들고 어디든 피난갈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셈이다.


집집마다 위 사진 같은 '방재용품'을 구비해놓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미지 출처 Amazon)


매뉴얼 만능주의, 변화보다는 안정을 지향하는 분위기, 변화를 앞두고 일사분란한 - 그리고 매우 복잡한 대응방안을 만들어 차근차근 준비해나가는 프로세스, 책임소재를 놓고 '나'에게서 공이 멈추지 않게끔 세심하게 피할 구멍을 만들어 놓는 것, 다른 사람 일에는 가급적 간섭하지 않고 싶어하는 개인주의적인 태도 등등.


위에 적은 면모들은 다 일본에 살면서 필자를 무척 답답하게 했던 것들이다. 하나하나 글로 풀어내기에는 아직 생각정리가 잘 안 되지만, 언제라도 재해상황이 올 수 있다는 전제를 깔고 보면 일본의 이런 면모들이 희미하게나마 이해가 됐다. 그리고 조금 더 이해가 될때쯤 다시 한국에 돌아갈 날이 오지 않을까.


태풍 '하기비스'가 지나간 자리, 생각이 많았는데 적다보니 참 두서없는 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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