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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Oct 14. 2019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

"일본어 잘하시네요!"라는 말의 뒷면과 1,248시간의 언어


"일본어 잘하시네요!"라는 말의 뒷면


2년여 전 처음 일본에 왔을 때 어디든 가면 꼭 "일본어 잘하시네요!"라는 말을 듣곤 했다.

그간 일본에 살면서 일본어 실력이 처음보다 훨씬 늘었는데, 지금은 더 이상 이런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니까, "일본어 잘하시네요!"라는 말 앞에는 사실 "외국인치고는요"이라는 전제가 있다는 뜻이다.


나도 한국에서 외국인을 만나면 별 거리낌없이 던졌던 말이다. 내 경험으로 이해해보자면 그 말은, 서툰 한국어로 어떻게든 의사소통 해 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기특(?)해서 해준 말에 가까웠다. "한국어 잘하시네요!"라고 격려해주지만 실은 그의 한국어 실력이 아주 우수하다기보다는 노력해줘서 고맙다는 그런, 격려의 말.


추측컨대 지난 2년 일본에 거주하면서 이 나라 특유의 겉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질서가 필자에게도 어느정도 체화되고, 애티튜트 역시 '여행객'에서 '거주인'으로 바뀐탓에, 더는 '격려'가 필요치 않아보이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1,248시간 짜리 일본어?


'거주인'으로 분류가 된 지금, 아직도 자주 듣는 말은 "일본어 어떻게 공부하셨어요?"다.


이 질문에는 역시 '일본의 드라마 또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는 답이 압도적으로 많고, 그 다음은 뭐 천차만별이다. 일본 지사로 발령이 나면서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다든지,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를 일본어로 선택했던 인연으로 조금씩 공부해왔다든지 하는.


필자의 경우는 좀 싱겁다. 외국어 고등학교의 일본어과를 졸업했다는 게 전부다.


고등학교 3년 내내 한 주에 대략 8시간 정도는 일본어 수업이 있었다. 회화, 작문, 문법, 청취 등등 이름도 다양했다. 1주일에 8시간이면 1년은 52주니까 1년에 416시간, 그렇게 3년을 쌓으면 무려 1,248시간이 된다. 원어민 선생님을 포함해서 실력 있는 선생님들이 잘 짜여진 커리큘럼 안에서 최선을 다해 가르쳐주셨다.


실은 고등학교 졸업하고는 딱히 일본어와 인연을 이어갈 일이 없어서 얼마 전까지 그 흔한 JPT, JLPT 성적도 없었다. 그렇게나 오래 공부를 소홀히 했는데도, 고등학교 때 배운 단어나 문법은 신기하게 잘 까먹어지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1,000시간의 법칙이 이런걸까.


필자는 워낙 외국어 공부를 좋아해서 영어나 일본어 말고도 이런저런 언어에 손을 대 보았지만, 누군가 강제하는 게 아니라 오직 내 의지만으로 1,000시간을 넘기는 건 보통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일주일에 한 번 2시간짜리 외국어 수업에 가고, 1시간 정도 숙제하는 데 쓴다고 하자. 이 패턴을 무려 6년 반이나 지속해야 겨우 1,000시간을 넘길 수 있다. 직장 다니면서 한 가지 취미를 6년 반이나 유지한다는 게 어디 보통 일인가.


어쨌든 이런 배경을 가지고 일본에 왔다.


드라마나 애니메이션을 많이 본 게 아니라 일상회화나, 특히 친구들끼리 주고받는 반말에는 전혀 자신이 없고, 교과서에 나오는 고리타분한 말과 문법만 손에 쥔 채로. 그렇다고 이 나라에서 생활해 본 사람들처럼 분위기와 뉘앙스에 따라 천차만별인 경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닌, 좀 애매한 일본어 실력을 가지고서.



우아하게 치밀하게, 나의 권리를 쟁취하고 싶다


처음엔 불편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었지만 그렇게 2년을 살다보니 편해진 부분이 많이 있다. 딴짓하면서 NHK 뉴스를 틀어놔도 대충 무슨 이야기인지 귀에 들어오고, 차 타고 가다가 간판이나 표지판에 적힌 글씨를 순발력 있게 캐치하는 능력도 생겼다. 처음에는 영화관에 가더라도 일본어 자막을 따라갈 자신이 없어서 영어 또는 일본어 영화만 봤는데, 이제는 제3국 언어로 된 영화도 종종 본다.


평화로운 일상 속에서라면 큰 불편함이 없다.

뭔가 일이 잘못되었을 때, 누군가에게 나의 권리를 어필해야 할 때 비로소 아쉬움이 몰려온다.


한국어로는 내가 어떻게 컴플레인을 걸더라? 우악스럽게, 또는 너무 직설적으로 내 의사를 표현하기보다는, 우아하게 치밀하게 상대방이 기분 상하지 않는 선에서 문제상황을 설명하고 해결책을 제시해달라고 요구했던 것 같다. 실은 대화 과정에서 언어적인 부분을 거의 의식하지도 않는다. 왜냐, 나는 네이티브니까. 설령 내가 사용하는 용어와 상대방이 사용하는 용어가 다르더라도, 상대방의 용어를 차용하지 않고 내 용어로 내 주장을 펼칠 수 있었다.


일본에서는 그게 잘 안 된다. 일단 '돌려말하기'가 안 되니까 직설적으로 말해야 하고, 내가 표현하고픈 말에 딱 부합하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으니 그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구구절절 말이 길어지고, 무엇보다 말하는 내 자신이 내 언어의 부족함을 인지하고 있다.


일본 사람이 모국어인 일본어를 잘하는 건 아무 자랑도 아닌데.

외국인인 내가 외국어인 일본어로 이렇게까지 내 주장을 펼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대단한 일인데.


그럼에도 괜히 언어적인 부분에 위축되어 하고싶은 말을 다 못 하거나, 내 주장을 중간에 굽힐때가 많이 있다.


이러다가 정 억울하면 영어로 덤비기도 한다. 너는 모국어 나는 외국어 로 말해야 하는 불공평한 상황을 어떻게든 뒤집어보려고. 물론 일본에서 영어로 컴플레인에 대응해 줄 만한 사람을 만나기도 쉬운 일은 아니어서 일본어로 할 때보다 몇 배 귀찮아지기는 한다. 전화로 컴플레인 하다가 말이 막혀서 영어로 하겠다고 하니 일본어 콜센터와 영어 콜센터를 동시에 연결해서 3명이서 정신없이 떠들어야 했던 적도 있다.



외국어가 네이티브 수준이라는 말


잠시 한국에 돌아가 친구들을 만나면 간혹, "너 이제 일본어 네이티브 수준 됐겠다!"라는 말을 듣는다. 친구도 아주 진지하게 하는 말은 아닐테니 그냥 대충 대답하고 넘기지만, 집에 가서는 지금 이 포스팅을 다 합친 것보다도 더 복잡한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참 피곤한 사람이로구만.


'네이티브 수준'이라니 참 쑥쓰러운 말이 아닐 수 없지만, 이 말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 있다. 하다못해 링크드인 프로필만 작성하려 해도 외국어 수준을 Low, Middle, High, Native 의 네 단계 중 하나로 선택하게 되어있다. 일본에서 2년이나 살았으니 적당히 부풀려서 Native 라고 체크해도 누가 뭐라 하진 않겠지. 그치만 아주 어릴때부터 외국에 거주하며 외국에서 교육과정을 이수하지 않고서 외국인이 네이티브 수준에 도달할 수 있기는 한 것일까.


나야 뭐 막연히 아주 어릴때부터 외국에 거주한 경우라면 모국어와 외국어를 모두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만 그게 또 과연 그럴까?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스트레스가 있지는 않을까?





일본어를 좀 더 잘 하고 싶다가도,

어차피 외국인으로서의 한계에 부딪힐 바에야 이 정도면 됐지 않겠나 싶다가도,

그래도 외국인으로서 손해보지 않고 살려면 지금보다는 더 표현이 늘었으면 좋겠는,


그런 모순적인 생각들 속에서 이방인으로서의 하루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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