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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데이수 Oct 25. 2020

손님이 많으면 가게를 확장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평균 대기시간 1시간 반, 좌석 12개짜리 식당의 이상한 고집

도쿄역에서 약 10분 정도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이상한 식당이 있다. 사람은 커녕 개미 한 마리도 안 보이는 한산한 골목을 기웃기웃 대다보면, 멀리서도 "아 여기구나" 알 수 있다. 가게 앞에 뱀이 또아리를 틀듯 길게 늘어서 있는 대기줄 때문이다. 이 가게는 카이센동(해산물덮밥) 전문점 츠지한(辻はん)이다.





이 정도 맛이라면 기다린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다.


그래, 맛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데 맛있다는 말 뒤에 으레 "근데, 대기가 엄청나"라는 말이 따라와서 마음을 무겁게 했다. 요즘은 코로나 때문에 관광객이 없으니 좀 낫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로 도전해보기로 했다. 가게 오픈은 11시. 오픈 시간에 맞춰가는 게 목표였으나 아침에 밍기적대다 보니 11시20분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뱀처럼 길게 늘어 선 줄의 맨 끝에 얌전히 가서 섰다. 그로부터 마침내 가게에 입장하기까지 정확히 1시간 반이 걸렸다. 기다리면서 책 한 권을 다 읽을 만한 시간이었다.


한 시간 반을 기다려 손에 넣은 해산물 덮밥. 기본메뉴에 우니(성게알)를 추가했다.


그만큼 기다렸는데 맛이 없었다면 굳이 글을 쓸 마음이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확실히 다른 데서는 절대 먹어볼 수 없을 것 같은, 아주아주 맛있는 음식이었다.


카이센동 하면 따뜻한 밥 위에 회를 숭덩숭덩 썰어 올리는 경우가 많다. 스시집에서 스시가 비싸다고 느껴질 때 가벼운 마음으로 주문할 수 있는 음식이다. 무척 고급진 음식이라기보다는, 그냥 저렴한 가격에 점심 한 끼 해결할 수 있는 서민적인 음식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아래 사진처럼 말이다.


카이센동 하면 흔히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런 석이다. 스시집에서 스시 네타를 그대로 밥에 올려준다.


그런데 츠지한은 스시집이 아니고, 메뉴가 카이센동 딱 하나밖에 없는 전문점이다. 츠지한의 카이센동에 올라 간 해산물은 스시 네타를 그대로 활용하지 않고, 밥 위에 살살 펴서 먹기 좋도록 잘게 다져서 나온다. 처음 음식이 나왔을 때는 밥 위에 해산물이 산처럼 쌓여있는 모양이지만, 살살 펴서 먹으면 된다는 가이드를 준다.


아, 사진을 보니까 또 먹고 싶다. 오키나와의 지역 특산물로 꼬들꼬들한 식감이 매력적인 고야나, 한국의 꺳잎처럼 일본에서 많이 먹는 향채(香菜)인 시소, 해산물이 모자란 순간에 밥이랑 싸 먹기에 딱 좋은 김 등등이 중간중간 섞여있다. 해산물도 부드러운 식감이 주를 이루는 가운데, 중간중간 이쿠라(연어알)의 터지는 듯한 식감과, 흰살생선의 조금 단단한 듯한 식감을 함께 즐길 수 있어 한 입 한 입이 심심하지가 않다.


산처럼 쌓여있던 해산물을 살살 밥 위에 퍼뜨려 주면 이런 모양이 된다. 이제 야금야금 맛을 즐길 차례다.


이 집이 유독 외국인 관광객에게 인기를 얻는 이유는, 한 그릇의 음식으로 두 가지 경험을 동시에 할 수 있게 해주어서가 아닐까 싶다. 밥을 반 이상 먹고 나서 "도미육수 주세요"라고 청하면 밥 위에 뽀얀 생선육수를 부어준다. 밥 위에 따뜻한 국물을 붓는다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카이센동에서 오챠즈케(お茶漬け)라고 하는 전혀 다른 카테고리의 음식으로 식경험이 바뀌게 된다.


실은 카이센동이 나오기 전에 애피타이저(?)로 된장소스를 묻힌 참치회를 한 접시 가져다 준다. 배고프다고 다 먹어버리면 안 된다.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다 안 먹고 아껴뒀다가 담가먹으면 또 다른 별미가 되기 떄문이다. 왜 한국에서도 회 한 두 점 남겨뒀다가 매운탕에 살짝 담가서 반쯤 익혀먹지 않는가. 그거의 일본 버전이다. :)


입가심 같지만, 실은 새로운 시작이다. 생선육수를 붓기 전에 "쌀밥 리필하시겠어요?"라고 묻는데, 이 때 "네"라고 하면 한 끼에 두 그릇 이상을 밥을 먹게 된다. :)


웬만해서는 어디 가서 국물까지 싹 먹어버리는 일이 없다. 이 집에서는 설거지 할 필요 없이 깨끗하게 해치웠다. 하나도 짜지 않아서 속이 편하다. 다 먹고 나서도 생선육수의 은은한 향기를 오랫동안 느낄 수 있다. 이 날 기다리면서 날이 조금 추워서 몸이 으슬으슬 했는데, 생선육수로 배를 따뜻하게 덥히고 나니 추위가 싹 사라졌다.


곧 겨울이 다가오고 하니 한동안은 한 시간 반 기다릴 엄두를 내기 어려울 것 같다. 그래도 이 특별한 경험이 그리워지는 날이 머지 않아 올 것 같고, 그 때 또 찾아가게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편 본점 대기시간이 길다는 거지 롯본기, 아카사카, 카구라자카 등지에 위치한 분점은 대기가 거의 없다고 하니 이쪽을 공략해보는 것도 방법이 될 것 같다.


실은 맛집 소개를 하려던 건 아니었다. 글을 쓰면서도 이 집의 맛이 떠올라서 서두가 본론보다 더 길어졌다.






손님이 많으면 가게를 확장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츠지한이 만약 서울에 있는 맛집이었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답을 알고 있다.


전주나 속초 같은 유명 관광지의 '맛집'에 가면 일단 식당이 무지 넓다. '맛집'이 되면 손님들이 밀어닥치니까 그 손님들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부터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식당에서 식사하는 경험도 좋아한다. 대기부터 입장까지 막힘없이 리드미컬하게 해결이 되고(빠릿빠릿!), 주문을 하고 나면 5분도 안 되어서 음식이 도착한다. 워낙 사람 많고 정신없는 분위기라 천천히 음미할 기분은 안 들지만, 어쨌든 관광지니까. 그 시끌벅적한 분위기에 젖어 그 집의 맛을 즐기고 나올 수 있다.


그런데 도쿄의 츠지한은 손님이 1시간 반을 기다리든 2시간을 기다리든, 니혼바시의 작은 가게를 확장할 마음이 없어 보인다. 사실 처음에 줄을 서면서 내 앞에 30명 남짓의 사람들이 있는 걸 보고, "이 정도면 금방 들어가겠군"이라고 섣불리 오판했던 것도 좀 있다. 가게에 들어가서 보니 10명 조금 넘게 앉을 수 있더라. 10명이 각각 20분씩 먹는다고 하면, 30명이 다 먹고 나오려면 1시간이 걸린다. 1시간 반 기다릴 만 했던 것이다. 그나마 "대기시간을 참을 수 없다면 분점으로 가라"는 뜻일지 분점이 몇 개 있기는 하다. 그걸 알고서도 나처럼 고집스럽게 본점에 가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다.



서울은 트렌드에 민감하고, 뭐든 금방금방 바뀐다. 선데이수가 서울에서 도쿄로 온 지 어느덧 3년 가까이 되어 가는데, 3년 전 내가 좋아했던 맛집들 중 이미 폐업한 곳이 상당수 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 머릿 속 "서울 맛집지도"가 실제와의 괴리를 넓혀 갈 것이다.


도쿄에 온지 3년, 이 곳에서 내가 경험한 바로 장사가 안 되어서 없어지는 집은 봤어도 장사가 잘 되는데 없어지는 집은 잘 못 봤다. 특히 도쿄의 많은 맛집들에는 '역사와 전통'이라는 스토리텔링이 녹아있어서, 1960년대부터 꾸준히 맛집이었던 곳이 갑자기 2020년에 문을 닫는 경우는 잘 없다. 식당이 잘 되어서 돈을 벌면 조리원을 따로 고용할 수도 있을텐데, 백발의 할아버지가 뜨거운 조리대 앞에 서서 고집스럽게 직접 조리를 한다. 내 머릿 속 "도쿄 맛집지도"가 과연 3년 뒤에도 유효할까.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지만, 왠지 유효할 것 같다. 여기는 그냥 그런 곳이다.


한편, 2020년에 우리 모두가 맞닥뜨린 코로나라는 전대미문의 위기가 고집스러운 일본을 조금쯤 바꿔놓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포인트도 있다. 츠지한은 올해 8월부터 우버잇츠 딜리버리를 시작했다. 가게 앞에서 1시간 반을 기다려야 겨우 먹을 수 있는 집인데, 근처에 사는 사람이라면 우버잇츠로 언제든지 배달해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츠지한 말고도 그간 "아쉬울 것 없다"고 생각했을 법한 유명 식당들이 우버잇츠에 속속 입점하고 있다. 당장 코로나로 매출은 줄어드는데, 이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니 싫어도 변화에 올라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방인의 눈으로 보는 일본 이야기>, 오랜만에 포스팅을 추가합니다. 처음 일본에 왔을 때는 또랑또랑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면 "이게 한국과 다르네!"라는 글감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습니다. 일본에서 지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역설적으로 글을 쓰기가 더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처음보다는 일본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나, 이해가 깊어질 수록 "이것을 다르다고 규정해도 되는 것일까? 과도한 일반화는 아닐까?"라는 걱정이 커져 글을 쓰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 이 곳에서만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느릿느릿 쌓아가보려고 합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도쿄의 아름다운 순간들을 사진으로 남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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