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의 퇴근 복불복

TEXTIST PROJECT

by 서인석

1.

자율출퇴근이라는 축복받은 제도 덕분에 '워라밸', work and life balance는 만족스러운 수준이다. 사실 그렇다. 근무 시간이나 업무의 총량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자율출퇴근은 여기에 '개인'의 시간을 고려할 여지를 준다. 조직의 입장에서는 업무의 총량을 줄이지 않으면서도 개인의 만족감을 줄 수 있는, 꽤 저렴하고 효율적인 복지다. 게다가 여전히 조직이 우선시되는 한국 사회에서 자율출퇴근제는 조직 자체의 이미지를 선진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큰 효과가 있다.


2.

한국 사회가 자율출퇴근제에 얼마나 무지한지는 주변의 시선만 봐도 매우 쉽게 인지할 수 있다. 가령 우리 아버지만 해도 "그렇게 해서 업무가 가능하니?"라는 반문을 먼저 하신다. 그럴만하다. 아버지야말로 대기업에서 이십여 년을 근속한, 나와 비슷한 직군의 선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회사 밖의 친구들이나 ROTC 동기들을 만나도 반응은 비슷하다. '그건 노는 거다'는 편협하고 질 낮은 시선도 존재하지만, 굳이 반박할 필요는 없다. 큰 복지에는 항상 큰 의무가 따른다. 회사는 학교가 아니고, 모두 성인이며, 자리를 유지하는데 자비는 없다. 회사는 항상 모든 것을 성과와 산출물로 평가하며, 혹자의 시선대로 내가 '놀았다'면 진작에 자리를 비워줘도 오겠다는 사람이 줄을 서 있는, 그런 잔인한 곳이다.


자, 어쨌든 이렇게 우리 회사는 다른 많은 회사들이 그러하듯 모순과 불평, 잘못을 수 백, 수 천 가지 내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무의 특성상 꽤 특이하고 기발한 부분이 많다. 지난번 글에서 말했던 '검정 화면'도 이런 우리 회사의 특징이다. 오늘 꼽는 특징은 바로 이 자율출퇴근이다.


3.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를 갔을 때, 가장 크게 달라진 생활은 바로 시간표를 스스로 짠다는 것이었다. 공강이라는 게 자연스레 생기고, 누군가에게는 하루가 일찍 시작되고, 또 누군가에게는 늦게 시작되는, 성인의 자율적 일상의 첫출발이 바로 시간표를 짜는 일이었다. 그래서 요일마다 어느 시간에 점심을 먹고, 어느 시간에 은행을 가고, 어느 시간에 조금 휴식을 취할 수 있는지를 시뮬레이션할 수 있었다. 그냥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선생님들만 열두어 시간 동안 바뀌면서 들어왔던 19살까지의 하루와 완전히 바뀌게 되는 것이다.

자율출퇴근은 이게 가능하다. 직장인들의 큰 불편함 중의 하나가 '은행 업무'라는 말이 있다. 은행원들도 직장인들이기 때문에, 직장인들이 부담 없이 은행에 방문해야 할 시간이면 은행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이 퇴근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 모순은 병원이나 공공기관에도 적용된다. 그러다 보니 직장인들은 이런 곳을 방문할 때, 상사의 양해를 구하거나 점심시간을 할애해야 한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다시피 나는 두 달에 한번 병원을 방문한다. 그리고 이때 병원에 체류해야 하는 시간은 꽤 길다. 대여섯 시간을 병원에 머무르기 위해서, 일반적인 직장인들의 패턴에서는 반차나 월차를 내야 한다. 자율출퇴근은 이 비효율을 매우 깔끔하고 간단하게 정리해 준다. 월 의무 근무시간만 넘어가고, 일 4시간 이상의 근무시간을 채운다면 나의 출근과 퇴근을 유연하게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 직장인들이나, 나보다도 더 자주 병원을 가야 하는 직장인들에게 자율출퇴근은 회사에 좀 더 애사심을 가질 수 있는 촉매제 역할을 톡톡히 한다.


4.

이렇게 가끔 찾아오는 효율의 체감보다 더 잦은 상황은 바로 출퇴근이다. 서울의 교통은 지독해서 절대다수가 출근하고 퇴근하는 시간에 일터로 가기 위해선 꽤 많은 체력과 지구력이 필요하다. 이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건 자차를 이용하건 예외 없다. 물론 직장과 집이 매우 가까워서 도보로 출퇴근할 수 있다면 극히 예외겠지만. '지옥철'이라는 별명이 그다지 격해 보이지 않는 지하철과 3분을 간격으로 '곧 도착'이 떠도 항상 서서 타야 하는 버스, 15km를 가는데 한 시간을 한숨 쉬며 와야 하는 자차 모두 서울의 노동 의지를 감당하기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 시간을 한 30분에서 1시간 정도만 뒤로 미루거나 앞으로 당기면 상쾌한 출근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는 보통 자율 출근하는 편이지만 예외적으로 아침 9시 정도에 회의가 있을 경우 맞춰서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 드물게 있다. 이럴 때는 8시 정도에 집 문을 열고 나오는데, 그야말로 도로는 명절이다. 1시간 안에 사무실로 들어오면 다행이고, 시간이 오버되는 경우도 많다. 넉넉하게 한 시간 반 정도는 잡고 움직여야 한다. 보통 나는 10시 안팎에 집에서 출발하는데, 이때 차로 집에서 사무실까지는 30분에서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1~2시간 늦게 출근하는 것만으로도 도로에서 두 배의 시간을 아끼게 된다.


5.

알다시피 직장인들에게 퇴근의지는 출근의지보다 막강하다. 그래서 퇴근은 더욱 심하다. 금요일은 그중 단연 압도적인데, 나는 별생각 없이 회사에서 금요일 오후 다섯 시 반에 출발했다가 2시간을 도로에서 보낸 적이 있다. 특별히 사고가 있거나 도로를 보수한다거나 하는 특별한 이벤트가 있던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알아보니, 금요일의 퇴근시간은 단지 퇴근 차량만 몰리는 것이 아니라, 다음날이 주말인 만큼 편하게 놀기 위해서 움직이는 유동인구와 주말을 맞아 지방으로 이동하는 차량들까지 한 번에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유독 퇴근시간의 밀집도가 높다고 하더라.

도로에서의 2시간을 겪은 후, 금요일 나의 퇴근시간은 무조건 오후 4시 반 이전이거나 오후 8시 이후로 정해졌다. 이래저래 일이 많아서 오후 4시 안팎에 퇴근하는 것이 어렵다 싶으면 그냥 사무실에서 다음 주의 업무를 미리 조금 당겨서 하는 게 나은 것이다. 그리고 오후 8시를 넘겨 퇴근하면 다소 퇴근길의 정체는 풀려있다. 이런 루틴이 생기다 보니 내가 맞아야 하는 업무의 총량에 대해서도 미리 조율하는 습관이 생겼다. 금요일의 폭력적인 퇴근 정체 현상이 내 업무의 계획성과 효율성을 높여준 셈이다.


7.

내일도 금요일이다. 그래서 오늘 다소 늦게까지 필요한 일들을 미리 체크했고, 당겨서 처리할 수 있는 일들은 이미 결재선까지 넘겨 놓은 상태. 특별히 문제없는 한 내일도 이른 시간에 합리적으로 퇴근이 가능할 것 같다. 기업들마다 조직문화가 다르고 업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복지를 허하라고 함부로 주장할 수 없다. 그래도 대면으로 처리하는 업무가 적고, 개인의 퍼포먼스로 처리해야 하는 일이 많은 회사라면 자율출퇴근은 실보다 득이 많다. 당신이 경영자라면 오히려 당신의 직원에게 다른 복지를 무리해서 챙겨주지 않고도 큰 편의를 제공할 수 있다. 어쨌든 나는 내일도 '내 스스로' 필요한 시간을 조율해서 출근하고 퇴근하련다. 퇴근길 복불복의 승자가 되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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