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XTIST PROJECT
기행으로 잘 알려진 웹툰작가 기안84는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듯 네이버에서 숙식하며 지냈던 적이 있다. 그는 그 시절에 대해 이런 묘사를 하곤 한다.
"그 왜, 다들 컴퓨터 화면만 보고 있고. 화면에는 외계어 써있고.."
내가 속해있는 직장은 바로 그런 '외계어'가 주업인 곳이다. 프로그래머들이 코딩으로 하루를 보내는 바로 그런 곳. 그래서 사무실로 들어가면 보이는 수백 대의 컴퓨터들은 대부분 검정 화면이고, 그 안을 깨알만 한 흰 글씨들이 채우고 있다.
그저 화면 속의 글씨라고 생각했던 이 코드들이 모여서 10조 원의 매출을 발생시키고 1조 원의 이익을 발생시킨다는 사실이 나는 가끔 버겁다. 화면 안에 존재하는 줄 알았던 0과 1의 집합체는 서비스라는 이름으로 가치가 산정된다. 코드들은 화면 안에 존재하겠지만, 화면 밖 진짜 세상의 누군가에게 충분히 값어치 있는 현실로 다가선다.
내가 근무하는 층을 쭉 돌다 보면 매우 드물게 흰 화면을 띄워놓은 모니터가 보인다. 내 자리다. 깨알 같은 프로그래밍 코드와 각종 특수 부호들로 구현된 수많은 화면들 사이에 내 화면만 희다. 그리고 그 흰 화면은 검은 글씨로 채워진다. 이 회사의 업은 IT이지만, 나의 업은 IT가 아니라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개발자들이 자바나 파이썬 같은 언어를 타이핑하고 있을 때, 나는 워드나 엑셀에 내가 필요로 하는 언어를 타이핑한다. 개발자들이 타이핑하고 있는 언어에서 문장부호 하나만 빠져도 그들이 구현코자 하는 무정형의 산출물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쓰고 있는 문서도 마찬가지로 회사의 안정적인 운영과 발전에 필요하길 항상 바라며 타이핑한다. 과연 그게 얼마나 크게 기여할지는 모르겠다.
IT회사에 근무하는 문과생들은 항상 특정 시점에 '현타'를 맞는 모양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검은 화면의 흰 글씨들에 비해 흰 화면 속 검은 글씨가 초라해 보이는 그런 기분. 저 개발자들의 일에 비해,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건 아닐까라는 불안감. 과연 이 조직에서 나의 존재가치가 어느 정도일까라는 의문.
검은 화면에 흰 글씨를 채워나가는 개발자들은 그들의 코드가 제대로 동작하고, 획기적인 방향으로 확장될 때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흰 화면에 검은 글씨를 채우는 나의 입장에서 나는 언제 보람을 느껴야 할까.
마음만 먹으면 윗 분들이 좋아할 만한 추상적이고 상투적인 문구들에 그럴듯한 정량적 수치 몇 개를 섞어서 화려한 문서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언어는 아니다. 그저 속이 빈, 껍데기만 화려한 소설 같은 결과물일 뿐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개발자들이 검은 화면에 흰 글씨를 채워서 얻어낸 결과와 보람'을 흰 화면 속에 검은 글씨로 온전히 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개발자가 아닌 경영진이나 고객의 입장에서 흰 글씨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검은 글씨로 갈무리하여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하고 배열하는 것. 그 과정에서 흰 글씨가 쓰일 때 머리를 쥐어뜯으며 했을 고민과 계산, 그리고 '유레카'라고 외치며 써 내려간 코드의 값어치를 검은 글씨로 최대한 표현해 내는 일. 그래서 IT가 주업인 회사에서 IT 개발자들이 '우리의 흰 글씨가 우리만의 언어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하고, 더 높은 단계의 보람을 창출해 낼 수 있도록 뒤에서 밀어주는 일.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문과생에게 여전히 IT는 버겁고 어떤 외국어보다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흰 화면을 검은 글씨로 채울 사람을 채용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단순히 내 언어가 쉬워 보인다는 느낌만으로 내 언어를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검은 화면에 쓰인 흰 글씨들이 멋있어 보이는 것처럼, 흰 화면에 채워지는 나의 검은 글씨들 또한 어딘가 어떤 영역에서 소중하게 동작할 것이라고, 그렇게 나는 매일 믿으며 키보드를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