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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Oct 27. 2021

회사 속 장비 혹은 조운

TEXTIST PROJECT

 그다지 재밌어 보이지 않는 회사원 생활이다. 그래도 IT라는 특수 업종, 거기서도 연구소라는 특수한 사업부에 속해 있다 보니 겉으로 봤을 때는 좀 달라 보이긴 한다. 출퇴근 시간이나 복장이 자유롭다거나 뭐 그런 것들. 그래도 회사원은 회사원이다. "회사에서 뭐 했니?"라는 질문에 "일했지." 이상으로 구체적으로 대답하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이 재밌고 반짝일 때가 아주아주 드물게 존재한다. 해내야 될 업무 리스트를 위에서부터 하나하나 빠르고 정확하게 쳐 나갈 때, 뭔가를 열정적으로 발표하고 이어지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이 단호하게 답하며 회의를 마무리할 때, 걸려온 전화에 일 초의 더듬거림도 없이 전문적으로 대응할 때 등등이다. 

 이런 날은 보통 그 흐름이 이어지기 때문에 오후쯤 되면 스스로의 모습에 파스텔톤을 입히기 시작한다. 소위 말하는 '자뻑'이 슬슬 스며드는 것. '와 나 되게 프로페셔널하네.'. 게다가 그렇게 해결한 일들이 아주 깔끔하게 끝을 맺는 걸 보면서 스스로를 삼국지의 인물에 대입하기도 한다. 장비와 조운은 그 대표 격이다.


 수많은 일들이 조직화되지 않은 채, 날 것의 상태로 화살처럼 우수수 쏟아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상사나 타 부서 담당자와 단호한 협의를 통해 합리적인 오거나이징을 진행한 후 딱 내가 해야 될 부분을 필터링해낼 때, 상상 속 나의 모습은 장비와 같다. 장판교 위에서 "야!! 와 봐!! 와보라고!!" 일갈하는 모습. 그 일갈만으로 몇 명의 적을 졸도시킬 정도의 위압감 있는 모습이다. 


 한편 걸러지지 않은 채 쏟아지는 일을 혼자서 해결해야 할 때도 분명 존재한다. 그게 정말 빠르고 군더더기 없이 척척 해결될 때는 -아주 드문 경우다- 상상 속에서 내 모습이 조운처럼 보인다. 10만 대군 사이를 무아지경으로 휘저어 다니면서도, 가까이 오는 모든 적들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사기 캐릭터의 모습 말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개인은 조직의 규모를 결코 감당할 수 없다. 그렇게 하루를 잘 보내고 흐뭇하게 메일함을 볼 오후 늦은 시간이면 허무하다. 내가 그렇게 장판교 위에서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고 10만 대군 사이를 춤추듯 휘젓고 다니는 동안, 내가 처리한 적들의 숫자보다 줄 서있는 적들의 숫자가 더 많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게 된다. 그렇게 상상 속에서 미화된 내 모습은 사라지고 현실만 남는다.


 그렇게 다음 날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가 된 것을 알고서야 매번 깨닫는다. 사실 나는 장비도, 조운도 아니었다는 걸. 단지 장비가 소리칠 때, 겁먹어서 졸도한 병사1이었음을. 혹은 조운이 말 달릴 때 그 창에 목이 떨어져 나간 병사1이었음을. 


 덧. 물론 이렇게 스스로를 미화하며 하루를 보낼 정도로 일이 착착 처리되는 날조차도 매우 드물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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