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PROJECT
영화 <매트릭스>에 등장하는 스미스 요원은 악역의 전형이다. <매트릭스> 시리즈는 인류가 멸망 수준에 이른 미래 시대를 배경으로 진행되는 이야기이다. 인공지능과의 전쟁에서 패배하고 지하세계로 숨어든 인류에게, 스미스는 남아있는 아주 작은 희망까지도 말살시키려 최선을 다한다. 매트릭스라고 불리는 인류 통제 시스템에서 '버그 삭제 담당자'인 스미스가 인공지능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중학생 시절, <매트릭스>는 남학교였던 모교의 복도를 액션스쿨로 만들어 놓았던 영화다. 비단 우리 학교만의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1편이 개봉된 시점을 기준으로 20년이 훌쩍 지났다. 그럼에도 <매트릭스>는 여전히 액션 영화의 비교를 위한 기준으로 유효하다.
하지만 나이가 한참 더 들고 깨닫게 되었다. <매트릭스>는 비단 '액션'영화만은 아니라는 점을. 여러 상징들이 투영되어 있다는 점을 말이다. 또한 액션 이면에 녹아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스토리가 액션보다도 훨씬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을 느끼게 된다.
<매트릭스>하면 지금도 '존 윅'에서 멋짐을 발산하고 있는 키아누 리브스가 바로 떠오른다. 그리고 그 가장 대칭점에 서있는 악당이 스미스 요원이다. 배우 휴고 위빙이 맡았던 스미스 요원에 대해 이야기다.
이 책에서 다룰 소재들은 대부분 인공지능이기 때문에 소재로 정해졌다. 하지만 스미스는 예외다. 과연 스미스가 인공지능인가? 대답을 위해서는 <매트릭스> 트릴로지의 세계관에 대해 폭넓은 이해가 필요하다.
간추려본다. <매트릭스>는 인류가 멸망하고 기계가 지배하는 지구의 이야기다. 크게 세 세력이 등장한다. 지구를 지배하면서 인간을 자신들의 동력원으로 사용하는 기계들. 기계의 지배에서 탈출하여 지하 깊숙한 곳(시온)에 숨어있는 인간. 그리고 기계 세계를 구동하는 프로그램일 뿐이었지만, 어떤 계기로 그 틀을 벗어나버린 스미스 요원'들'이다.
자, A.I.에 대해 다시 정의해보자. 'Artificial Intelligence'. 인간과 유사한 지능, 즉 '인공지능'이다. R2-D2편에서 이야기했듯, 인공지능은 약인공지능과 강인공지능으로 나눠서 표현하기도 한다. 약인공지능은 특정 분야에 특화되어 인간과 유사하거나 혹은 뛰어넘는 지능 역할을 하는 AI를 일컫는다. 예를 들어 알파고는 바둑에서 압도적이지만 규칙을 바꿔서 오목을 두거나 장기를 두는 행위는 하지 못한다. 반대로 강인공지능은 실제 인간의 지성과 유사한 지능을 구사하는 A.I.를 말한다.
그렇다면 영화 <매트릭스> 트릴로지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기계들은 강인공지능에 해당한다. 스미스는 기계들에 내재된 프로그램이다. <매트릭스> 1편에서는 휴고 위빙이 분한 '스미스' 이외에도 두 명의 요원들이 더 등장하는데, 이들의 역할은 기계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진실을 깨닫게 된 인간들을 '삭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매트릭스> 2편과 3편에서는 스미스가 폭주한다. 네오와의 격투에서 뭔가가 스미스에게 심어진다. 그래서 스미스는 불필요한 인간을 삭제하는데서 멈추지 않는다. 아예 기계의 통제를 벗어나고 궁극적으로는 세상을 '스미스 바다'로 만들려는 목적을 갖는다. 뭔가 떠오르지 않는가? 바로 바이러스다.
우습게도 스미스는 모피어스와의 긴 대화 중에 인간을 바이러스로 비유한다. 바이러스는 생존 환경은 고려하지 않고, 스스로의 유전자를 증식시켜 환경을 지배하려는 목적만을 갖는다. 스미스가 결국 매트릭스 속에서 '바이러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만약 스미스가 매트릭스를 지배하고, 매트릭스 밖의 기계까지 지배 범주를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때부터는 진정한 인공지능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의 스미스는 목적을 지향하거나 창조하는 행동은 전혀 보여주지 못한다. 그저 개체를 무분별하게 불리고 폭주하기만 한다. 이런 점에서 스미스 요원은 여러모로 인공지능이라 인정하기 애매한 구석이 있다.
<매트릭스>에서 얘기하는 매트릭스는 무엇인가? 기계들이 인간을 지배하고 농락하기 위해 만든 '상상의 세계'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족족 유리병에 갇혀서 상상만을 하며 살아간다. 기계는 유리병에 연결된 전선들을 통해 인간의 뇌에서 발생하는 전기들을 동력원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기계가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기계는 확률과 숫자로만 움직인다. 예외는 허용치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자꾸 예외가 생겼던 것이다. 매트릭스가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자꾸만 어떤 이유에선지 인간들 중에 "여기는 실제 세상이 아니야"라는 자각을 가지는 자들이 생겼다. 그들은 유리병 안에서 눈을 뜨고 탈출하여, 완전히 황폐화된 실제 세상(시온)에서 기계에 저항하며 살아간다. 이 숫자가 늘어갈수록 기계에겐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기계들은 매트릭스 안에 '요원'이라는 프로그램을 넣는다. 요원들은 자각한 이들을 매트릭스 안에서 삭제한다. "정신이 죽으면 몸도 죽어."라는 모피어스의 말을 기억하자. 원래 요원 중 하나였던 '스미스'는 그렇게 세상을 자각한 인간들을 삭제하는 역할이었다.
그런데 스미스까지도 매트릭스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된다. 스미스는 다른 요원들까지 '스미스'로 만들기 시작한다. 이제 기계는 매트릭스의 지배권을 잃고 '스미스'라는 버그에게 침범당하기 시작한다.
매트릭스에 널리고 널린 게 요원이고, 스미스였다. 그런데 네오의 일부가 스미스에게 이식되면서 뭔가 달라졌다. 많은 요소가 달라진 게 아니다. 딱 하나가 달라졌다.
요원은 매트릭스 내부의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그들이 가지는 능력은 무조건 매트릭스에서 정해놓은 물리법칙 안으로 한정된다. <매트릭스> 2편을 보면 네오가 수십 명의 요원들과 무쌍난무를 펼치는 부분이 있다. 이들을 다 쓰러트려도 다시 수십 명의 요원이 나온다. 그때 네오가 '날아서' 자리를 뜬다. 요원들은 그저 하늘을 보다가 흩어진다. 무슨 말이냐, 매트릭스의 요원들은 날지 못한다. 즉, 그 프로그램들은 '난다'라는 능력을 갖지도 못하고 가질 수도 없다. 매트릭스 안의 물리법칙은 '날다'라는 행위를 허용하지 않는다. 매트릭스 밖에서 접속한 네오는 '날다'라는 행위가 가능하다.
그런데 3편으로 가보자. 네오와 스미스는 '날면서' 싸운다. 네오가 요원보다 강한 이유는 '여기는 현실이 아니다.'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날 수도 있고 빠르게 움직일 수도 있다. 스미스는 그 자각의 일부를 흡수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통제받는 요원이 아니라 네오처럼 '실제 세상'의 여부를 자각할 수 있는 존재가 됐다.
<매트릭스> 4편의 제작이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1편보다 나은 속편은 없다고 하지만, 이미 크게 벌려놓은 <매트릭스> 세계관이 3편에서 끝나기에는 십수 년간 아쉬운 감이 있었다. 열린 결말이지만 3편의 마지막은 관객들에게 필요 이상의 아쉬움과 의문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는 스미스와 같은 존재가 어떤 형태로 등장할 것인가.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에 대해서 인간은 오랫동안 걱정하고 두려워해 왔다. <매트릭스>는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의 '가상 세계'를 정밀하게 세워 놓았다. 기계가 세상을 지배할지 모른다는 걱정은, 인간 스스로가 가진 욕심이 너무 크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그래서 인공지능이 인간 정도의 수준이 되면 그런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가정 때문에 생기게 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