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러버
나는 시계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어릴 때 정말 갖고 싶던 시계가 하나 있었다. 카시오 지샥(G-SHOCK)이라는 시계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반에서 나와 가장 친했던 친구 수미는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일본에서 살다가 온 친구였다. 몇 번 놀러 갔을 때 수미네 집의 규모나 살림살이로 보아 깨나 잘 살던 친구였던 것은 분명하다. 우리 집도 젊은 시절 피땀 흘려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가난한 편은 아니었다. 수미가 부럽지는 않았는데, 한 가지 부러웠던 것은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 흰색 지샥 시계.
당시 디지털시계가 유행이었는데, 초등학생이 차기에는 고가였기 때문에 아무나 가질 수 있던 시계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버지가 내게 선물해 준 시계가 하나 있기는 했는데, 형광 연두색이었고 그것도 꽤 예뻤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스승의 날에 내가 다니던 '지인 미술학원'에서 날 제일 예뻐했던 선생님께 그 시계를 럭키 포장지에 둘둘 말아 선물해 드렸다. 그러고 나서 나에겐 쭉 시계가 없었다.
지샥 시계는 특히 흰색, 분홍색이 예뻤는데, 집 좀 산다는 아이들은 그 시계를 차고 있었다. 어린 마음에 우리 집은 중산층이긴 하지만 그렇게 많이 잘 살진 않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동생 둘과 매일 식사 때 소시지 쟁탈전, 저녁때 투게더 아이스크림 쟁탈전을 벌이느라 첫째인 게 싫고, 동생들이 미울 때도 많았다.
그런데 지샥은 왜 지샥일까? 구글링을 해서 지샥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이제야 제대로 된 뜻을 알게 됐다.
중력(Gravity)과 충격(Shock)에 견딘다는 뜻의 지샥(G-SHOCK)은 가장 엄격한 내충격 검사와 내구 검사 등을 거치는 시계입니다. 카시오의 대표적인 시계 브랜드로 전 세계의 많은 마니아를 거느리고 있는 인기 브랜드입니다. 지적이고 세련된 디자인에 합리적인 가격까지 갖춘 시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지샥(G-Shock) 홈페이지 참조
중력과 충격에 견딘다는 뜻이었다니! 엄청난 명품이었구나. 어릴 때만 반짝 유행하던 시계가 아니라 지금도 마니아가 있고, 가격도 10만 원 대부터 130만 원을 넘는 제품이 있을 정도로 고퀄 시계인 이유가 있었다. (최근에는 지샥 국내 모델로 걸그룹 ITZY가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사진도 보았다)
나의 지샥에 대한 에피소드는 여기까지. 이런 추억들을 뒤로한 채, 지금은 시계도 시대를 타서 거의 열 명에 둘셋 쯤은(내 느낌상) 애플워치를 차고 있는 것 같다. 예전 지샥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힙스터들의 상징, 애플워치. 확실히 스마트폰의 휴대성과 편리성을 손목으로 옮겨 놓은 획기적인 아이템이긴 하다. 물론 시계 상에서 메시지를 직접 보낼 수는 없지만 확인은 가능하고, 음악 재생과 음성녹음부터 수면 시간/심전도/심박수/혈압/혈중 산소/운동량까지 관리할 수 있는 생활 건강 도우미(?)의 기능도 한다. (2023년 현재 애플워치가 밀고 있는 콘셉트는 '건강한 삶을 위한 궁극의 기기'인 듯하다)
사실 애플워치가 막 엄청 효과적이고 필요한 아이템은 아니긴 하다. 하지만 한 3달 정도 스마트 워치를 차고 생활해 본 솔직한 후기를 적자면, 시간을 봐야 하는데 휴대폰을 들고 다니기 번거로운 상황에서는 확실히 유용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까맣고 네모난 화면이 뽀대가 난다.
최근에 나온 애플워치는 넘어짐과 충돌을 인식해서, 충격이 가해지면 시계 소유자가 사고를 당한 것으로 인식돼 저절로 911로 신고가 된다는 미국 광고를 봤다. 이제 생명의 은인 역할까지. 익스트림을 즐기는 여행가를 위해 나침반 기능 탑재나 수영에 최적화된 모델도 있다. 지금보다 더 많은 기능들이 더해지고 발전하면, 휴대폰 말고 시계 형태의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전 세계인이 차고 다닐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