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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endy An Sep 26. 2024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 프로빈티아 호텔

Provintia Hotel - 타이난(Tainan), 대만

호텔은 하나의 새로운 세상이다. 호텔로 들어선 순간 도시는 잠시 잊고 호텔이라는 새로운 세상을 누비며 여행 속 또 하나의 여행을 만끽한다. 발견과 탐험의 즐거움으로 가득한 호텔을 만나면 2개의 여행을 하는 셈이다. 작은 디테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모든 감각의 날을 벼리며 관찰하고 집중한다. 자연스레 감동과 발견의 즐거움은 배가 된다. 호텔은 구석구석 자세히 볼수록,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볼수록 흥미진진한 곳이다. 예상치 못한 틈새와 매력이 여기저기에 존재한다. 도시의 거리와 골목 그리고 낯선 풍경 못지않게 호기심을 자극하는 곳, 감성과 감정을 충만하게 채워주는 곳이 바로 호텔이다. 호텔은 도시의 축소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도시를 잊게 만들어주는 곳이기도 하니 묘할 수밖에. 도시에 대한 힌트를 주긴 하지만 전부 내어주지는 않으면서 여행자 스스로 발견하고 찾아가게끔 생각과 영혼에 조약돌 한두 개 툭 던져 물결을 일으켜주는 곳이랄까.


대만 최초의 수도이자 오랜 역사를 지닌 남부의 도시, 아름다운 타이난에서 ‘프로빈티아 호텔’을 만났다. 아니, 차라리 프로빈티아 호텔을 만나기 위해 타이난으로 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부의 매력, 늘 그리워해 마지않는 타이베이를 뒤로하고 남쪽에서만 여행하겠다는 결심은 오직 프로빈티아 호텔 때문이었다. 2023년 겨울의 어느 날 특정 목적이 있는 웹서핑을 하던 중 정말 우연히 발견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이끌려 호텔 홈페이지를 한동안 유영하다가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강렬하다 못해 신비로운 끌림을 느꼈고, 금세 프로빈티아 호텔에 머물고 있는 나를 상상하게 됐다. 마음의 서랍 속에 잘 간직하고 있다가 새해가 되고 하루하루 삶을 영위하며 한동안 잊고 살았다. 그러다 가을 연휴의 여행은 타이베이가 아닌 남부 가오슝으로 가보는 게 어떻겠냐는 연인의 제안에 섬광이 번쩍였다. ‘가오슝과 타이난은 가깝잖아!’ 사라진 줄 알았던 불꽃은 여전히 살아 있었고, 프로빈티아 호텔로 향할 수만 있다면 남부 여행을 하겠노라는 강력한 의지를 건넸다.

 

오래된 것을 열렬히 흠모하는 내게 타이난은 제격이었다.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인 데다가 1982년 문화유산보존법이 타이난을 기준으로 제정되어 유지되고 있다고 하니 영혼의 안식처가 될 수밖에. 타이난 자체가 문화유산이자 대만 문화예술의 황금기를 지나온 곳이라는 건 여행 첫날부터 온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었다. 공기에 가득 차 있는 역사와 문화예술에 대한 당연한 자부심과 애정이 서려있기 때문일까. 프로빈티아 호텔의 역사도 1985년부터 결을 함께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역시 내 멋대로의 해석이지만 프로빈티아 호텔은 ‘타일’과 ‘목재’로 대만의 ‘오래된 미래’를 표현한 것만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긴다. 여행자의 동선과 내밀한 욕망을 읽고 해석한 흔적은 꽤 모던하지만, 전반적으로 감도는 분위기와 디테일의 매무새는 오래된 타이난을 옮겨둔 듯하다.

타이난의 건축 양식을 내부 인테리어로 재현한 듯한 모습, 충분한 여유를 추구한 여백의 미, 그리고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도시의 거리를 옮겨놓은 듯한 공간 구성까지. 타이난의 이곳저곳을 누비고 나니 프로빈티아 호텔에서 느끼고 감동했던 많은 것들의 기원과 이유를 나름 찾을 수 있었다. 신비스러운 작은 골목, 순수하고 다정한 사람들의 기운이 감도는 개성이 뚜렷한 공간, 몇백 년은 족히 살고 있을 고목과 오랜 건축물이 중심이 되는 비정형의 길로 대표할 수 있는 타이난의 매력을 호텔에서도 발견하고 느낄 수 있었다. 취향이 섬세하고 뚜렷한 누군가의 컬렉션룸과 아틀리에에 초대받은 듯한 기분이 드는 호텔 로비, 설렘이 피어나는 미로 찾기를 하듯 계속 거닐게 되는 라운지 공간, 도시의 오래된 아름다움이 주축이 된 공간에 모던 한 방울을 떨어뜨리고는 창밖으로 펼쳐지는 타이난 전경을 종일 바라보며 머물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 라이브러리에서 말이다.


즉각적이라기보다는 아주 은은하게, 시간이 흐른 뒤 문득 하나씩 포착하게 됐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발견과 깨달음, 연결과 상상을 끝없이 자극받은 3박 4일 동안 프로빈티아 호텔에 제대로 스며들었다. 이제 내게 타이난과 프로빈티아 호텔은 일심동체 한 쌍이다. 결코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고 다른 호텔에 머무는 타이난 여행도 상상할 수 없다. 체크인에서 시작된, 아니 호텔로 한 발자국 디딘 순간부터 시작된 감동과 환희는 사그라들 줄 모른 채 계속됐다. 방키와 호텔 페이퍼 '황금 시간(Golden Hours)’을 건네받고, 방에 있는 턴테이블로 음악을 들으라는 제안에 LP도 한 장 골랐다(연인의 바람대로 ‘탑건’ OST로 했다). 호텔 페이퍼에는 ‘구시가지에서의 최고의 순간들’이란 제목으로 프로빈티와 호텔과 깊은 유대감으로 연결돼 있는 주변 6곳이 소개돼 있었다. 비밀 쿠폰도 함께! 친절과 활력으로 가득 찬 안내를 듣고는 로비와 바깥 양쪽으로 연결돼 있는 작고 어여쁜 카페 NAN Bar1으로 향해 웰컴드링크를 테이크아웃 했다. 레몬과 로컬 꿀을 듬뿍 넣은 시원한 탄산수는 설레는 여정에 둘도 없이 좋은 선택이었다.

홈페이지에서 사진을 수십 번 보고 왔는데도 어찌나 떨리고 설레던지요. 진녹색의 카펫과 비밀스러운 구조가 꽤나 매력적인 복도를 지나 903호로 들어선 순간 연인과 나는 동시에 탄성을 뱉어냈다. 그것도 몇 분 동안 여러 번. 우리는 ‘우와~ 우와~ 너무 좋다’는 말 외에는 할 말이 없었다. 넓디넓은 공간은 곡선의 미와 아늑함, 여유와 여백 그리고 궁극의 감각적인 인테리어 디자인으로 채워져 있었다. 하나인 줄로만 알고 있던 발코니는 독립적인 두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고(감동), 카펫과 원목과 타일이 만들어내는 색과 질감의 조화는 예술 작품처럼 미감을 한껏 발휘했다. 방도 넓은데 욕실까지 넓은 건 정말이지 보너스였다. 이토록 여유 있게 공간을 쓰는 건 ‘남부의 여유인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목과 타일과 짙은 녹색의 대리석이 완벽한 조명의 거울과 만났을 때 어떤 그림을 그려내는지를 매일 밤낮으로 볼 수 있어 행복했다.

궁극적으로 원하는 욕실의 모습이 무엇이었는지를 이제야 비로소 깨달았달까. 아름다운 힌트를 얻었다. 목욕 공간이 온통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는 건 매일 아침마다 거품 목욕과 반신욕을 하는 동안 작품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멍을 때릴 수 있는 특권이자 선물과도 같았다. 실은 모든 게 선물로 여겨졌다. 그 모든 것이라 함은 ‘자비로운 전신 거울, 방의 곳곳에서 완벽한 위치와 조도를 뽐내며 분위기를 좌우하는 조명, 뜨거운 햇살을 받아 빛나는 타이난의 아침과 근사한 석양을 무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발코니, 열고 닫을 때마다 기분이 묘하게 근사해지는 원목의 미닫이 문, 나란히 앉아 컵라면도 먹고 술도 마시고 하루의 지출도 정리하기에 안성맞춤인 테이블과 푹신한 소파, 커피 내리기에 찰떡인 드립포트, 놀라우리만치 향긋하고 맛있는 타이난 차(tea)와 외부 음식 먹기에 편하도록 구비해 둔 커트러리와 접시, 등 뒤로 햇살을 받으며 생각과 마음을 평온하게 끄적일 수 있는 책상’이다.

프로빈티아 호텔의 화룡점정을 단 하나 꼽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어려움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선택을 해보자면, 바로 루프탑 층에 있는 레스토랑 ‘라 쿠폴라(La Cupola)’다. 여느 때의 여행에서는 조식을 부러 신청하지 않고 일찍이 바깥으로 나가 카페를 찾는 편이다. 고요한 아침 산책도 즐겁고, 날마다 다른 곳을 찾는 즐거움도 제법이니까. 그런데 라 쿠폴라의 사진과 '타이난은 한국의 전라도이자 푸디들의 성지’라는 믿음직한 한마디에 의지해 조식을 신청했다는 거 아닌가. 재밌는 건 실제로 우리나라 전라도 광주와 타이난은 자매결연 사이라고 한다. 탁월한 선택이었고, 하루를 여는 리추얼로도 훌륭했다. 여전히 뜨겁게 불타오르며 이글거리는, 습도 90%에 육박하는 타이난의 여름을 견뎌내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맛깔나게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심장이 쿵쾅 거리고, 극도의 환희가 밀려와 만족을 넘어 황홀한 기분에까지 다다를 수 있었던 건 공간의 미감이었다. 방에서도 물씬 느꼈던 원목과 패브릭과 타일 그리고 조명의 기가 막힌 조화가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펼쳐져 있었다. 아치형 디자인과 벨벳 의자, 대리석 테이블과 타일 바닥, 타이난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창과 밤하늘의 달처럼 떠 있는 조명 그리고 불투명 유리 파티션이 따로 또 같이 만들어낸 풍경은 어디에서도 본 적 없었던 독보적인 분위기의 그림이었다. 시공간을 초월한다는 게 무엇인지 피부로 체감하는 순간을 3번이나 맞닥뜨렸달까. 마치, 19세기 유럽 횡단 열차 오리엔트 익스프레스의 식당칸에서 밥을 먹는 것만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럭셔리 열차로 재탄생했다는 특급 열차는 귀하고도 귀한 내 버킷 리스트 중 하나다. 간접 경험을 한 셈 쳐볼까나. 창밖 풍경과 조명에서는 아시아 느낌이 물씬 나는데, 공간 구성과 인테리어 전반적인 분위기에서는 유럽의 향기가 가득 풍겨났다.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면 1980년대 대만 사회에서 유럽의 세련된 분위기가 유행했었다고 한다(역시…). 더욱이, ‘라 쿠폴라’가 타이난에서 가장 오래된 양식당이라는 거 아닌가. 가히 걸맞은 타이틀이다. 쌓인 세월 위에 절묘한 조화를 멋지게 만들어낸 프로빈티아 호텔에 박수와 경의를!


호텔의 안팎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치’와 ‘곡선’이 매우 중요하다는 걸 알아챌 수 있다. 로비에서부터 루프탑에 이르기까지, 방에서도 라운지에서도 곡선이 흐른다. 단아하고 아름답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미처 묻지 못했던 바인지라 상상에 맡겨보련다. 훗날 꼭 다시 찾아가 물을 기회가 있기를 바라며 이 질문은 아껴두자. 8층 투숙객 전용 라운지에는 커피나 차를 언제든 즐길 수 있는 바(bar)와 간단한 조리를 할 수 있는 키친과 다이닝 공간, 멋짐이 폭발하는 라이브러리, 옛날 오락실 그리고 런드리룸이 있다. 한 공간도 빠짐없이 경험하며 누렸다. 지금 생각해도 제일 잘한 일이다. 라운지에선 커피를 받아 전자책을 읽으며 돌려둔 빨래를 즐거이 기다렸다. 라운지에 머물며 왜 이리도 기분이 좋은지를 계속 생각했는데 결정적인 이유를 찾았다. 넓은 공간 구성과 완벽에 가까운 각도로 새어드는 햇빛도 좋았지만 늘 ‘재즈’가 흐르고 있었다. 에디 히긴스 트리오, 빌 에반스, 마일스 데이비스 그리고 쳇 베이커까지. 프로빈티아 호텔은 로비, 라 쿠폴라, 라운지 등 곳곳에서 재즈가 흐르는 곳이다. 그 어떤 음악보다도 재즈와 정말 잘 어울리는 곳이다.

타이난의 여름 끝자락은 한 시간 미만을 걸어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땀으로 젖는, ‘뜨거운 습도’의 날씨였다. 중간중간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2-3번 해야 했다. 몸이야 샤워로 해결되지만 간단히 가져온 옷가지가 걱정이었다. 그런데 자판기에서 세제 캡슐만 사면 드럼세탁기로 빨래와 건조 모두 무료로 해결할 수 있는 라운지 덕에 갑자기 인생이 바뀌는 만큼의 희열을 느꼈던 것. 이 순간 그 어느 때보다도 호텔은 영웅이었다. 뽀송하게 마른 옷과 속옷을 들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엔 휘파람이 절로 나왔다. 남은 가오슝 일정까지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타일벽과 아치형 창이 멋들어진 라이브러리에서는 차분히 앉아 공간과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조식을 먹고 방으로 돌아가던 길엔 오락실에서 옛 추억에 젖어 들어 신나게 오락을 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게 큰 재미였다. 편리함과 재미와 아늑함, 게다가 예쁨까지 모두 놓치지 않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오랜 세월 쌓은 업력이기도 하겠지만 투숙객들을 향한 섬세한 애정이 강하게 느껴졌다.

프로빈티아 호텔에선 타이난으로 여행 왔다면 결코 그냥 보내줄 수 없다는 듯한 부드러운 결의를 느낄 수 있다. 이곳을 경험해야만 비로소 타이난 여행이 완성될 거라는 듯한 자신감도 함께. 문화와 예술이 역사에 서려있는 타이난의 숨결을 호텔로 표현해 본 거라며 소리 없는 외침을 하고 있는 것 같더라. 그 외침이 내 마음에 와닿았다는 건 크나큰 행운이었다. 프로빈티아 호텔은 주변 이웃도 훌륭하다. 인근에 타이난스러움과 유니크한 개성을 절묘하게 섞어둔 보물 같은 곳들이 숨겨져 있다. 호텔을 기점으로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 향해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지역사회의 사랑을 듬뿍 받아서일까, 지역사회에 활짝 열려있어서일까. 프로빈티아 호텔은 사랑과 관심을 잔뜩 받은, 잘 자란 어른의 모습이 연상된다. 여행자인 우리를 더 품어주고, 안아주고 배려해 준 것만 같은 느낌을 매일 받았던 건 아마도 이 때문이었을지. 누군가 타이난은 어떤 곳이냐고 물어온다면 프로빈티아 호텔로 먼저 향해보라 말하고 싶다. 그럼 알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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