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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Sep 07. 2018

요시모토 바나나, ‘키친’

기억을 통해 읽는 책 #1 외로움을 요리해 나를 먹이다, 자라나다

 새 집으로 이사하게 되면 반드시 확인해야 하는 곳이 두 곳 있다. 먼저 화장실이다. 구석구석 곰팡이가 끼어 있지는 않은지, 창문은 있는지, 창문이 없다면 환풍기의 성능이 양호한 지, 청소로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더러움인지, 변기의 수압은 어떤지.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부엌이다. 키친(kitchen). 내 피와 살이 되어줄 양식을 요리할 곳. 입에 들어가는 것을 만드는 장소이니만큼, 부엌 역시 최소한의 (개인적인 기준으로는 최대한의) 청결은 갖춰야 한다.  

 식기 건조대가 찬장 아래 설치되어 있는 부엌은 비록 이 한 몸 겨우 누일 좁은 원룸의 부엌이라 할 지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요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면적이 싱크대 위에 존재할 수 있어 가장 반갑게 느껴진다.

 건조대를 따로 구매해야 한다면, 그것을 올려놓고도 요리며 뒷정리를 바로바로 할 수 있도록 약간의 여유공간이 있는 널찍한 싱크대여야 한다. 요리할 때의 동선에 들어갈 수 있도록, 자취생 치고는 제법 큰 편인 냉장고가 놓일 자리를 반드시 확보한다.

 그다음은 수압이다. 설거지를 할 때 온수를 사용하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수압이 약한 부엌은 매 식사가 고역으로 느껴질 것이다. 식사의 마무리는 설거지라는 게 내 신조다. 덕분에 다이어트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으로 온전한 내 부엌을 갖게 되었던 것은 학부 2학년을 시작하기 직전의 겨울 끝자락이었다. 그 해는 유달리 겨울이 길어서, 유래 없는 폭설 소식이 4월까지도 꽤 잦았던 걸로 기억한다. 며칠 전의 눈이 아직까지도 녹지 않아 길 위가 온통 밟히다 만 검은색 눈으로 가득했다. 살짝 얼어 미끄럽기까지 해서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삿짐을 옮겼다.

 기숙사에서 보낸 1년 동안 그다지 짐이 많이 늘지 않았기에, 가구도 들이지 않은 원룸 안 스물한 살 여대생의 인생은 그저 옷 박스 몇 개와 선별해서 골라온 책 몇 권으로 정리되었다. 짐들을 방 한 구석에 몰아넣고, 어머니는 기약 없이 혼자 지내게 된 딸을 걱정하며 방바닥을, 창문을, 거울을, 화장실을, 그리고 부엌을 깨끗하게 쓸고 닦았다. 작은 몸에도 작지 않은 원룸이었다.

 아버지와 동생이 접이식 상과 간단한 생활용품들을 사러 간 사이, 어머니는 하나하나 손수 고른 식기와 조리도구들을 당신의 질서에 맞춰 각각 배치했다. 옆에서 거들겠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내가 쓸 곳이니 내가 편한대로 정리할게, 이야기해도 그저 당신 손이 닿아야 탈 없이 오래 쓸 거라며 이곳에는 냄비가 있고, 저곳에는 밥그릇이 있고.. 설렘과 안쓰러움과 서글픔과 미안함을 새로운 살림, 그 위치들과 함께 가르쳐 주었다. 다 같이 먹은 그날의 저녁은 된장찌개였다. 고릿한 된장 냄새가 낯선 방 안에 가득 찼고, 그 냄새가 채 빠지기도 전에 우리는 모두 노곤함에 잠이 들었다.

 다음날 부모님과 동생이 안동으로 돌아가고 나서, 며칠이고 나는 된장찌개를 끓여먹었다. 냉장고에 자석으로 곱게 붙여 놓은 어머니의 식기 구매 영수증은 침대에 누우면 바로 보이던, 불 꺼진 내 첫 부엌이 유난히 두렵고 외롭게 느껴질 때, 뒤척이지 않고 이내 잠들 수 있도록 마음을 안정시켜주었던 자장가였다.




  남자아이들이 친구들과 주로 제 방에서 시간을 보낸다면, 여자아이들은, 적어도 내가 가까이 두고 지낸 친구들은 부엌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초등학교 때, 지금 돌이켜보면 제 손을 베지는 않을까 칼을 쥐어주기도 겁나는 어린 저학년의 우리들이 가장 좋아했던 놀이는 부엌에서의 요리프로 놀이였다. 지폐가 한 줌에 채 들어오지 않는 작은 손으로, 다진 쇠고기를 조물 조물 치대 밀가루와 달걀물을 입히고 뜨거운 기름에 퐁당 튀겨냈다. 시식은 방송인 못지않은 호들갑이 기본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함께 요리하는 과정에서의 우여곡절, 마치 어른처럼 소주 마시듯 물을 삼킬 때의 두근거림, 엉망이 된 부엌과 싱크대를 서로 나서서 정리하게 만들었던 ‘놀이’라는 이름. 시험공부를 위해 누군가의 집에 모이게 되어도, 결국 공부는 뒷전인 채 우리는 부엌으로 향했다.

 

 여대에 와서도, 반(半) 사회인으로서 강사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나 대접은 부엌에서, 직접 만든 식사의 따뜻함이나 커피 한 잔의 담소가 병행되었다. 생존을 위해 부엌에 들어가는 것이 남자라면 (아마도 유교 문화에서의 남녀 역할 구분이 세월이 흘러도 부엌에 대한 거리를 달리 만든 영향이 크지만) 여자에게 있어 부엌은 식(食)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튀긴 기름으로 눅진한 가스레인지며 녹슨 부엌칼에서 문득 눈을 돌리면, 창밖에서는 별이 쓸쓸하게 빛난다’
‘그곳에서는, 그럭저럭 평온하게 긴 밤이 가고, 아침이 와주었다. 다만 별 아래서 잠들고 싶었다.
그 외의 모든 것에는 그저 담담했다.'

 


 미카게에게 부엌은 할머니와의 기억이자,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다. ‘모든 것에 그저 담담했다’ 말하며, 자신의 부모를 ‘젊은 나이에 나란히 죽었다.’며 무덤덤이 설명하지만, 상실의 연속이었던 미카게의 삶은 살기 위해 무던함을 가장하는 삶이다.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알 수 없지만, 어린 자신을 두고 세상을 저버린 부모에 대한 마음은 슬픔보다 원망에 가까웠을 것이다. 할아버지의 죽음에 다다랐을 때는 죽음이란 그저 피할 수 없는 것임을, 할머니의 죽음을 마주하고서는 더 이상의 가장도 지쳐 우주의 어둠 속에서 무한히 잠들고만 싶은 고통 속에 잠긴다.

 

 할머니의 부재를 증명이라도 하듯 녹슬어버린 부엌칼 (혹은 할머니의 노화와 함께 녹슬어갔을), 기름으로 눅진한 가스레인지는 흔적으로나마 할머니를 느끼고 싶은 미카게의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자신을 먹이기 위해 부엌 한 구석에서 한결같이 서 있던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을 때마다, 할머니와 만든 추억은 하나 둘 늘어갔다. 집안 어느 곳보다도 여자에게 가까운 부엌, 할머니와 둘 뿐인 단란한 집이었기에 각자의 공간보다 오히려 안락했던 부엌. 때때로 감정은 그 존재 자체를 인정해 버리는 순간 미처 막을 새도 없이 굉장한 속도로 밀려들어오는 법이다. 버틸 수 없게 커진 슬픔의 크기에 짓눌리기 직전 집세를 핑계 삼아 함께 했던 집과 부엌을 떠남으로써 그 슬픔을 인지할 수 없도록 도망쳐 버린 미카게. 온전히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던 그녀는,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할머니와 소녀의 모습을 통해 지금껏 미뤄왔던 슬픔과의 경계벽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부엌은 그 주인의 취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내 부엌은 나름대로의 규칙을 가지고 있는 부엌이다. 설거지 후 건조대에 올려둔 그릇의 물기가 완전히 사라지면 모든 그릇은 찬장 안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만 특히 좋아하는 붉은색 배경의 판다 무늬 국그릇 두 기는 싱크대 왼편의 또 다른 철제 건조대 위에 인테리어를 겸해 올려 둔다.

 자잘한 요리 도구들은 모두 수납하기보다는 바깥으로 보이게 두는 편이 좀 더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고 생각한다. 다만 가스레인지의 화구 위에는 되도록 무언가 얹어 놓지 않으려고 한다. 내 집이 아니기에 원하는 대로 꾸밀 수 없어, 이사 오기 전 부엌을 볼 때 또한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화려한 타일이나 시트지가 붙어있지 않은 곳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미카게가 유이치를 따라 그의 집으로 향했던 날, 그녀는 한눈에 그 부엌을 사랑하게 된다. 일관성이 없지만 묘하게도 품위 있는 물건으로 가득 찬 부엌. 오랜 세월 길들여진 도구가 있는 부엌. 동시에 에리코와 유이치의 삶이 배어있는 부엌. 부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에리코와 유이치에게 마음의 문을 열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미카게의 부엌 사랑은 나만큼의 기준조차 없다. 그녀의 묘사에서 특별히 다나베네 부엌의 아름다움이 전달되는 것도 아니다.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 준 두 사람, ‘사랑하는 여인을 잃고 아들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엄마가 된’ 에리코와 ‘낳아 준 사람은 너무 어릴 때 죽어버려 기억이 안 나지만 강아지의 죽음에는 며칠을 밥도 먹지 못한’ 유이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을 것이다. 태생적으로 외로움을 안고 있는, 그렇기에 무던하고 강해 보이려는 존재. 그러나 세 사람 다 스스로의 감정들을 의도적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다. 그 동질감이 부엌에도, 작지만 가득 차 있는 냉장고에도, 반듯하게 걸려있는 식기에도, 독일제 껍질 깎기 칼에도 닮아있었기 때문에, 미카게는 마치 운명처럼 그들의 부엌을 사랑하고, 그들과의 더부살이를 시작한 것이다.




‘방 한 구석에서 숨 쉬며 살아 있는, 밀려오는 그 소름 끼치는 고적함, 어린애와 노인네가 애써 명랑하게 생활해도 메울 수 없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나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일찌감치 깨닫고 말았다.’
‘딱히 할 필요도 없지만 그를 만나면 늘 그랬다. 내가 나 자신이라는 것이 굉장히 슬퍼진다.’




 미카게에게 부엌은 또한 그녀의 인생이다. 태어날 때부터 살아왔던 황록색 부엌. 할머니와 단 둘이었던 그녀의 인생은 소타로를 만났을 때 늘 들었던 슬픔이 증명하듯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언제나 할머니의 존재를 의식하며 열심히 살아왔지만, 질색할 정도로 싫은 황록색 바닥 마냥 그녀의 삶은 가장 안락을 느끼면서도 소름 끼치게 고적했던 부엌이었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 장면, 그녀는 꿈속에서 유이치와 함께 그 바닥을 손수 닦으며 이사를 마무리한다. 떠난다고 생각하니 그 황록색 바닥은 그립고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실제로는 이미 예전에 치워버렸지만, 선반 안도, 싱크대 안도 깨끗하게 정리한다. 고적함은 고즈넉함으로 바뀐다. 그리고 새로운 꿈의 부엌을 찾고자 마음먹는다. 지난 삶을, 부엌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녀의 외로움은 다나베의 부엌에서 계란죽으로 요리되어, 스스로를 성장시킬 수 있는 양식이 되었다.  



 할머니가 아닌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다 해도, 에리코가 여전히 유지로 남아있었다고 해도, 미카게와 유이치에게 있어 부엌은 단순한 부엌이 아닌 ‘키친’으로 존재했을 거라 믿는다. 또한 누구에게나 ‘키친’이 존재할 거라고 생각한다. ‘키친’은 세대와 성별을 뛰어넘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염려를 재료로 상처를 보듬고 성장을 이끌어 주는 요리가 완성되는, 다름 아닌 그 모든 곳의 부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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