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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정문일침

식견

by 파르헤시아

가슴속은 텅 비어 속에 든 것이 없는데 한갓 겉만 꾸며서 이를 취한다. 번드르르하게 치장하는 것을 글 짓는 것(文事)으로 생각하고 아로새겨 꾸미는 것을 글(文)이라고 여긴다. 스스로는 천하의 공교로움을 다하였다고 여겨도 아무 쓸데없는 헛소리요, 공허한 빈말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 보건대 사물을 바르게 분별하는 능력, 즉 식견(識, 많은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몸소 체득한 지식)이 높은 자는, 그가 쓴 문장(文章) 또한 높다. 식견(識)이 낮은 자는 문장 또한 낮다. 글(文)의 좋고 나쁨은 문장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식견(識)에서 비롯된다. 나무로 비유하자면 식견(識)은 뿌리고, 문장(文)은 가지와 잎이다. 뿌리가 튼튼한데 가지와 잎이 무성하지 않은 나무는 없다. 뿌리가 튼튼하지 않은데 가지와 잎이 무성한 나무 또한 없다. 그러므로 식견(識)이 자라기를 구하지 않고 문장에서 공교로움만을 구하고 오로지 글 잘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망령 된 짓일 뿐이다. 문장(文)은 마음에 품고 있는 실재(實)가 밖으로 드러나 꽃핀 것이다. 실재(實)는 마음 가운데 쌓여 있는 것으로 이미 깊고 두텁게 되면 문장(文)으로 밖에 드러나 환히 빛난다. 실재(實)는 사람다움의 도리, 즉 인의효제충신예악(仁義孝悌忠信禮樂)의 도(道) 이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


-이하곤(李夏坤 1677-1724),『두타초(頭陀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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