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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소도 Nov 17. 2023

영알못이 뉴욕에서 본 라이온킹

용기만은 대단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해주고 싶다.

2013년경, 처음으로 뉴욕에 가봤다. 친한 친구가 뉴욕에서 살고 있어 그 친구 하나만 보고 떠난 여행길이었다. 


참고로 나는 영어를 못한다. 어느 정도 서투른 게 아니라 1살 베기와 같은 수준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그마저도 자신할 수 없다는 게 슬프지만)


회사에서 출장이 갈 일이 있을 때면 영어를 잘하는 직원들과 늘 동행했었다. 나는 잘 따라다니면서 눈치껏 미소 짓고 내 할 일만 열심히 하면 되었기에 큰 어려움을 못 느꼈다.


나는 영어도 못하는 주제에 그렇게 다녀본 경험치만 쌓여 있었다. 해외에 대한 겁이 없었다. 가서 하면 다 된다는 무적의 논리로 비행기를 예매했다. 또 본 건 있어서 티켓을 싸게 끊어보겠다고 환승이란 것도 했다. 굳이 굳이 반대편 방향으로 날아가는 방법으로. 


갈 때는 두바이에서 반나절 정도를 기다렸다 뉴욕행 비행기로 갈아탔다. 올 때는 두바이에서 1박을 하는 스탑오버 일정으로 티켓을 끊었다. 친구는 왜 굳이 반대편인 두바이로 경유를 했는지 의아해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샌프란시스코 같은 경유지는 영어가 더 쎄보였다.(?) 뉴욕 입성도 하기 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국제 미아가 될 것 같았다. 공항도 두바이가 더 좋아 보였고, 개인적인 안정감이 느껴졌다. 대체 어디가?


좀 더 솔직히는, 그게 지구 반대편으로 돌아가는 줄을 몰랐다. 지구는 둥그니까, 어느 방향으로든 날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A4 용지 5장 정도에 글자 폰트 9, 줄간격 130 정도로 한 여행 계획표를 짰다. 가고자 하는 곳에 대한 모든 정보를 긁어모았다. 


지하철 타는 방법, 표 끊는 순서, 음식 주문하는 방법, 모마 같은 미술관의 층별 정보 등이었다. 아이러브뉴욕 같은 책에는 나와 있지 않은 여행자들이 겪은 경우의 수들을 모두 파악해 정리했다. 표지판도 제대로 못 보면서 나는 그 종이 하나로, 3주간의 뉴욕 여행을 해냈다.


뉴욕 여행에서 미술관과 뮤지컬을 빼놓을 수는 없는 일. 여행 말미쯤에는 브로드웨이에서 라이온킹 공연을 봤다. 한국에서 미리 끊어온 라이온킹 티켓을 들고 공연장으로 갔다. 예스를 몇 번 하고 나니 나는 어느새 공연장 안에 앉아 있었다. 


자리는 1층 앞쪽 중앙 섹션이었다. 못 알아들을 테니 무대라도 가까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좌석은 그 줄의 맨 끝으로 예약을 했다. 좀 더 잘 보이는 가운데 자리로 들어가려면 분명 '익스큐즈미'를 말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것 같았다. 차라리 가만히 앉아 비켜주는 편이 나았다. 


옆자리에 앉은 외국인이 짧게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내뱉은 음성의 길이감과 짧은 고갯짓으로 봐서는 '공연 잘 봐~'정도 같았다. 나도 빙긋이 웃어주며 고갯짓으로 인사를 했다. 뉴욕에서는 인자하게 웃을 일이 많았다.


불이 꺼지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공연은, 완벽했다. 무대 자체가 압도적이었고 현장에서 듣는 배우들의 쏘울은 엄청났다. 그리고 나도 엄청난 눈치 싸움을 해야 했다. 길고 외로운 싸움이었다. 


라이온킹이 그렇게 웃음 포인트가 많은 공연일 줄 알았다면 나는 보지 않았을 것이다. 왜 그렇게도 쉴 새 없이 웃음들을 터트리는 것인지 너무나 당황스러웠다. 그건 내 계산에 없던 일이었기 때문에.


웃음이 안 나는데 웃는 건 힘든 일이다. 사람들의 웃음이 터질 때마다 괜히 한 번씩 어깨를 들썩이거나 고개를 까닥거렸다. 조금 고역스럽기까지 했지만, 어쨌든 공연은 잘 보고 나왔다. 그야말로 보기만 하고 나와야 했지만. :)




무엇을 쓸까 사진첩을 쭉 보다가 이 사진 앞에서 멈춰 섰다. 무모하긴 했어도 마침표는 찍었던 인생의 한 페이지가 펼쳐졌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던 시기를 지난 다음에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원하고 바란다고 해서 모든 게 이뤄지지는 않는다는 것. 인생의 순리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그게 날 비참하게 했다. (가끔이긴 했지만.) 내 인생에 다시는 마주하지 못할 페이지 같았다.


순리를 거를 수 있는 것은 하늘 아래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때를 따라 일어나고 흘러간다. 비참할 필요도, 들 뜰 필요도 없을 일이다. 오늘 내게 내리는 것이 부슬비라면 맞고, 옷은 내일 해가 뜰 때 탁탁 털어 말리면 될 것이다. 


영어를 잘해서 떠난 여행이 아니라, 영어를 못해도 떠났던 여행을 기억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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