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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Oct 08. 2020

중고 클래식 기타를 들이고

내 방의 옷장에 그녀를 들였다 옷장 속으로 날씨들이 사라져갔다


-詩 '펭귄과 달의 난방기' 중, 최정진 시집 「동경」





시작은 나훈아였다.


추석특집 콘서트에서 그가 클래식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나도 한 대 장만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포크기타가 집에 있었기에, 새 기타를 살 논리를 (굳이) 개발했다.


첫째, 가끔 치는 포크기타는 줄이 거칠어서 손가락이 너무 아프다.

둘째, 아무리 조심해도 밤에 포크기타를 치는 건 민폐다.

셋째,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혼자 놀 거리가 필요하다.

이 정도의 구매 이유를 생각해내곤 혼자 납득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기타를 사려는 이유는 나훈아였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 오전 동묘에 갔을 때,

전동기구를 주로 늘어놓은 좌판 구석에 클래식 기타가 한 대 있었다.

얼마냐고 물으니 쿨한 대답이 돌아왔다.

"3만 원에 가져가. 마수야"


기타를 건네받고 줄과 넥 사이의 간격이 적당한지,

그러니까 기타의 목이 휘었는지를 체크했는데 양호했다.

 "주세요."

생각지 못한 가격에 기분이 좋아진 내게,

좌판 주인은 물티슈로 대충 닦은 기타를 내밀었다.



집에 와서 케이스에서 꺼내니, 칠이 벗겨진 곳이 조금 있고,

군데군데 언제 내려앉았을지 모르는 먼지가 있다는 것 외엔 멀쩡해 보였다.  


중고로 물건을 살 때 웬만한 흠결에 적당히 눈 감는 편인 데다가,

전문 연주자나 엄격한 아마추어 연주자는커녕,

어려운 코드는 안 치고 대충 넘겨버리는 '낮은 단계의 취미 연주가'였기 때문에

더더욱 이 정도의 낡음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튜닝을 하려고 보니 줄을 돌리는 플라스틱 부품 하나가 없었다.

3만 원인 이유가 이거였나 싶었다.

도저히 손으로는 돌릴 게 아니어서, 공구함에서 펜치를 가져와 급한 대로 튜닝을 했다.


소리는 괜찮았다.

도로 동묘에 가서 무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매번 펜치를 들고 조율을 하는 너무 귀찮을 것 같았다.



시간 될 때 낙원상가 쪽에 들고 갈까 하다가,

(그마저 귀찮아서) 그냥 새 부품을 주문하기로 했다.


여러 검색어를 전전한 끝에, '헤드 머신'이 이 망가진 부분의 명칭임을 알았다.

클래식 기타와 헤드 머신, 두 단어가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렸다.

플라스틱 하나가 아니라, 한쪽에 있는 세 줄 연결부위가 통째로 하나의 부품이었다.


기존에 있던 은색도 있지만, 일부러 금색을 주문했다.

동묘의 좌판을 거치면서 편안한 분위기를 가진 이 기타엔,

그 정도의 키치가 잘 어울리지 싶었다.


이틀 뒤, 세상 반짝이는 금색 헤드 머신이 도착했다.



수리, 랄 것도 없는 수리를 시작한다.

주문 전에 이미 부품과 기타에 있는 볼트 홈의 간격이 같음을 확인했다.

이쪽은 규격화가 잘 돼있지 싶다.

세 개의 줄을 끄르고 나서, 안경용 드라이버를 가져와 4개의 작은 나사를 푼다.


그게 끝이다.

반쪽의 부품이 제거된 기타의 헤드는 간결해 보인다.

생각보다 단순한 구조였구나, 기타는.


떼어낸 낡은 부품은 구석에 얌전히 둔다.



금니를 씌우는 치과의사처럼, 새로 도착한 금색 헤드 머신을 기타에 부착한다.


홈에 맞춰 끼우고 4개의 나사를 끼운다.

홈 하나가 어긋나서 송곳을 대고 망치로 때려서 홈을 내고 나사를 박는다.

나사들은 저항 없이 들어간다.


새 부품은 너무나 금색 티가 나고, 낡은 은색 부품은 은색 티가 거의 나지 않는다.

그래도 잘 어울린다. 혼잣말을 한다.

"소리만 잘 나면 되지."

 


줄을 연결한다.

조율을 한다.

마른 수건을 가져와 닦는다.

기타가 준비된다.


코드를 집자, 익숙한 음이 나온다. 만족한다.

코드를 몇 개 잇자, 입에서 가사가 따라 나온다.


어디서 보여줄 실력이건 아니건,

앞으로 많은 시간이 이 낡은 기타 안으로 흘러들어 갈 것이다.

기타가 받아낸 시간은 그 안에서 차곡차곡 쌓여

언젠가, 그러니까 이 기타가 수명을 다하거나 혹은, 무료하게 먼지가 쌓이는 어느 깊은 밤에,

몇 개의 음(音)이 되어 나올지도 모른다.


그때 즈음이면, 나는 별다른 조율을 할 생각 없이,

기타 옆에 아무렇게나 드러누워,

사라져 간 무엇이나 떠나간 누군가의 얼굴이나 떠올리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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