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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무 다른 역할 Jun 14. 2018

어쩌면, 사은품은 훌륭한 소비

계륵이었던 책 모양 LED 조명

사실을 은유로 바꾸는 재간


-소설 '거대한 괴물', 폴 오스터





책 모양 LED 조명


-재질 : 종이표지 + 백색 아크릴 + LED 전구

-구입 시기 :  (아마) 2015~2016년 언젠가.

-구입처 : 예스24 (책 구매 사은품)




백색 형광등을 꺼리는 편이다. 조금 과장하면, 혐오한다.


세상의 모든 사물에게 침묵을 허락하지 않는 듯한 오만함이 싫고, 드러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지 않는 무감함이 싫다. 그래서 집 안에서 웬만하면 형광등을 켜지 않는다. 종종 집에 들르는 부모님이 왜 이렇게 어둡게 하고 사냐고 타박하시지만 어쩔 수 없다. 백색 공간에선 오감이 잘 작동하지 않는다. 뭔가를 해치워야 할 것 같은 조급함 때문에.


그래서, 집 구석 구석 노란 전구를 끼운 조명을 켜놓는다.  플로어 스탠드 두 개와, 책상용 스탠드들을 요소요소에 놓아, 낮은 조도 유지한다.



밀도가 적은 전구색 빛에는 묘한 힘이 있다.


폴 오스터의 표현처럼, 사실을 은유로 바꾸는 듯하다. 빛 속에서 몽상을 하다 보면, 별 거 아닌 사실은 매력적인 은유로 변한다. 그런 은유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유영하다 보면, 마음이 먼저 가라앉고 뒤이어 몸이 차분해진다. 높고 위압적인 스카이라인을 가진 건물들을 지나, 단층 짜리 오래된 집들이 있는 동네에 들어선 것처럼.



몇 년 전, 책을 주문하고 사은품으로 받은 이 조명은, 집에 켜놓은 다른 조명들보다 더 어둡다. 조명이 어둡다는 말이 조금 역설적이긴 하지만, 실제로 그렇다. 불투명 아크릴 안에 전구가 있어서, 전구를 떠나 공간으로 나오는 빛의 양이 적다.



그래서 가끔은 조심스럽거나 수줍어한다는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전원도 USB 타입으로 큰 전압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걸 디자인한 사람은 이 조명 아래에서 책을 읽거나 조도가 필요한 여타 일을 하는 걸 원하지 않은 듯하다. 도무지 눈이 아파서 글자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조명은 태생부터 일보다는 쉼을 독려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인 셈이다.



처음에 이걸 배송받고, 어디에 둘지 고민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다른 전구 조명들의 밝기에 익숙했던 나로서는 이 조명이 단독으로 발하는 밝기가 어색했고, 앞서 말했듯이 독서나 작업용으로 사용하기에도 부적절했다.


그런 이유로 꽤 오랫동안 집 구석에 방치했다. 그러다가 대청소하는 날 이 조명이 눈에 띄었고, 이 자리 저 자리에 옮겨가며 켜본 후, 부엌에 있는 책장에 두었더니 나쁘지 않았다. 잘 안 꺼내보던 책들이 조명 덕에 눈에 들어왔다. 책들 사이에서 스스로 빛을 내는 건 자기 하나란 걸 아는 듯, 처음 봤을 때보다 더 밝은 듯 느껴졌다.





얼마 뒤 다시 자리를 잡은 곳은 부엌에 있는 작은 책장 위였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 자리에 있다. 책 모양이라고 해서 늘 세워두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있었는데, 어쩌다가 뉘었더니 그 나름의 안정감이 있었다. 조명을 켜고 보다가, 뭔가 허허로워서 유리잔 하나를 옆에 두고 그 안에, 여행 다닐 때 주워왔던 돌 하나를 넣어두었다. (새로운 걸 추구하기보다, 가지고 있는 물건으로 이리저리 고민하는 건 내 안의 잉여적 기질이 아닌가 싶기도...)



밝기에 한계가 있었기에, 애초에 주방에 있는 다른 조명의 보조 조명 정도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이 조명만 켤 때가 많아졌다. 부엌으로 옮긴 소파에서 책을 읽을 때는 스탠드를 켜지만, 그렇지 않고 누워서 미적댈 때는 이것만 켜게 됐고 결국 원래 있던 조명을 다른 곳으로 치워버렸다. 조금 어둡다고 생각했던 조도에 눈이 적응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어쩌면,



(적어도) 빛에 관해서는,
충분하다와 충분하지 않다는 구분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지 모른다.



지금은 표지를 열어 밖으로 나오는 빛의 양을 늘리고, 그 위로 유리잔을 옮겨놓았다. 안에는 작년 여행 때 사하라 사막에서 가져온 (가져왔다기보다는 그때 신었던 신발에서 털어낸) 모래를 병에 담아 넣어두었다. 아마 다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저 안에는 또 다른 뭔가가 들어가 한시적인 기념을 도모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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