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너무 다른 역할 Aug 30. 2024

19년 만에 찾은 호스텔에서

#중국 쿤밍 호스텔 '더 험프(The Hump)'

늘 이렇지, 펄롱은 생각했다.

언제나 쉼 없이 자동으로 다음 단계로, 다음 해야 할 일로 넘어갔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 중, 클레어 키건




2024, The Hump, Kunming, China


다시 들른 쿤밍의 호스텔은 이름 빼고 다 변해 있었다.


라탄의자가 가득하던 실내 홀은 고급스러운 재즈바 형식의 인테리어로 마감돼 있었고, 투숙을 하는 게 아니기에 도미토리 내부를 볼 순 없었지만 문과 복도만 봐도 기본시설만 갖춘 오래 전의 투박한 호스텔로 보이진 않았다.

2층으로 올라오던 계단이 있던 자리엔 새로 생긴 야외 BAR가 있었고, 대신에 야외 테라스의 구석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돼 있었다. 도시의 중심가인 금벽루를 굽어보는 테라스 난간엔 눈부신 오렌지색 LED 조명이 켜져 있었고, '객잔'의 이름을 알리는 간판은 간접조명으로 빛나고 있었다.


시설만 새로운 게 아니었다. 2005년에는 종업원만 중국인이었고 동양인인 나와 친구가 특이해 보일 정도로 나머지는 모두 서양에서 온 여행객이었는데, 지금은 우리만 외국인이었다.


2005, The Hump, Kunming, China


19년 전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지 않은 채, 몇 달을 여행할지 정하지도 않고 중국으로 왔었다.


다행히 휴학 중이던 고등학교 친구가 며칠 뒤 합류해 우리는 두 달이 넘게 중국을 돌아다녔다. 나는 한국어로 된 가이드북, 친구는 영어로 된 론리플래닛 책 하나를 들고, 한 도시를 보고 난 후 다음 도시를 정해 떠나는 식의 여행이었다. 쿤밍으로 왔을 당시 '더 험프'는 한국 가이드북에는 소개조차 되지 않은 호스텔이었다. 론리플래닛을 보고 찾아온 우리는 6인실의 침대 하나씩을 잡고 꽤 오래 쿤밍에 머물렀었다.


2005, The Hump, Kunming, China


나와 친구는 살아온 시간보다 살아갈 시간을 생각하는 25살의 나이였고, 앞으로 밟아야 할 길이 기대될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친구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작은 감상에 쉽게 요동치고, 세상의 모든 측면을 과장되게 해석하곤 했다. 그래서 2005년 여행 중에 만난 사람들과, 본 것들은 그 뒤에도 빛이 바래지 않고 오래 기억되었다.


그때 있었던 일들을 다 적을 순 없겠지만, 1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호스텔이 중국 여행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숙소일 정도로 쿤밍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종종 여행사진을 보면서 이곳에 언제 한번 다시 가봐야지 했는데, 그게 이번 여행에서였다.


2024, The Hump, Kunming, China


홀과 야외 테라스를 둘러보며 사진을 찍는 나에게, 호스텔의 손님들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각자의 여행에 심취한 그들에게 어쩌면 나는 하나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풍경을 소환하던 나는, 많이 변한 이곳의 모습을 보며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긴 세월 동안 이곳이 변하지 않으리라고는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어느 구석에 스물다섯의 내가 기댔던 뭔가가 남아있길 바랐었나 보다.


하지만, 과연 변한 걸까 이 장소가?


예전의 나처럼 어린 여행자들이 여전히 공간을 채운 채, 제각기 글을 쓰고 맥주를 마시고 음악을 듣는다.

어두운 테라스를 서성대고 난간 너머 거리의 불빛을 응시한다. 낭만과 흥분의 중간 어느 지점에 있는 이곳의 공기도 그대로였다. 그렇다면 이곳의 나의 기억과 조금 달라졌을 뿐 그대로가 아니었을까.


2024, The Hump, Kunming, China

 

어쩌면 변한 건, 나 자신일 것이다.


수많은 시간의 파편들이 박히는 동안, 나는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에게 치일 때나, 균일하지 않는 세상의 단면들을 확인할 때마다 스스로에게 막(幕) 하나씩을 추가해 왔는지 모른다. 하루하루는 변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자신했지만, 긴 시간을 두고 보면 나는 여러 개의 막을 뒤집어쓴 채 불투명해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안에는 여전히, 대책 없이 감상적이었고 어떤 의미에선 오만했던 스물다섯의 내가 남아있다.


19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여전히 애정하고, 그때의 나는 종종 닫혀 있던 문을 열고 나와 치기 어린 말들을 지금의 나에게 던지곤 한다. 그게 나는 그립고 즐겁다.


2024, The Hump, Kunming, China


야외 바에 앉아 맥주를 시켰다.

스물다섯 때 보낸 호스텔에서의 기억은 몇 개의 장면으로만 남아있지만,

긴 시차를 두고 찾은 이곳에, 분명 그때의 나는 없는데 분명 그때의 나는 존재했다.


우리는 기억을 잃기 때문에 추억을 찾는 게 아닐까.  

하지만 기억이 휘발된다고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남아있는 기억을 위해 종종 뒤를 돌아보고, 그 기억을 현재로 불러들여 다시 정리하면 될 일 아닌가 싶다.


비가 그친 호스텔의 밤 풍경이 조금은 익숙해졌다.


2024, The Hump, Kunming, China


매거진의 이전글 절대 망하지 않는 시장구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