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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Aug 21. 2023

[새벽의 방문자들] 낯선 남자가 벨을 누른다면

새벽의 방문자들 - 장류진

혼자 사는 여자라면 낯선 이가 현관문 벨을 누르는 상황을 겪은 적이 있거나 누군가의 경험을 전해 듣고 미리 문단속을 단단히 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새벽의 방문자들>은 이런 상상력에서 출발한 소설이다.


포털 사이트의 관계사에 근무하는 여자는 최근에 댓글 모니터링 업무를 맡게 되었다. 게시물 규정에 어긋하는 글이나 신고가 들어온 댓글들을 확인해서 블라인드 처리하는 게 그녀의 일이다. 여자의 눈은 ‘섹스’ ‘하룻밤’’원나잇’’모텔’ 등과 관련된 문장과 문맥을 찾아서 지우지만 댓글은 하루 밤 사이에 증식에 증식을 거듭해서 여자가 한 일을 언제나 제자리로 돌려놓곤 했다. 바퀴벌레는 야행성이다. 어둠 속에서만 활동한다. 불을 키는 순간 순식간에 사라져서 박멸이 어려울 뿐 아니라 아무리 약을 치고 애를 써도 인간의 노력을 비웃듯 개체수는 오히려 증가한다. 올려놓으면 다시 굴러 내려오는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여자의 일은 무의미의 연속이었다. 어둠 속에서 무한 번식하는 바퀴벌레는 여자가 매일 지우는 음성적인 댓글과도, 음지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성매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여자는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지은 지 오래된 허름한 오피스텔로 이사 온 지 한 달이 됐다. 헤어진 남자 친구는 나이가 조금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흠잡을 데 없는 스펙을 갖춘 남자였다. 하지만 사귀는 동안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한 갑갑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는 여자는 이런 ‘모호한 이유’로 남자와 헤어졌다. 주변에서는 ‘굴러 들어온 복’을 차 버린 ‘주제도 모르는 여자’로 낙인찍혔고 그녀 역시 자신의 선택이 합당한 지에 대해 판단을 쉽게 내리지 못한 상태였기에 사람들의 말을 흘려듣는 것 또한 어려웠다.


천장의 얼룩을 바라보며 누워있던 어느 날 새벽 3시, 갑자기 벨이 울린다. 새벽에 벨을 누를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기에 여자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고 불안은 점차 공포로 바뀌어갔다. 벨 소리에 이어 비밀 번호를 누르는 소리까지 나자 여자의 공포에 극에 달한다. 겨우 용기를 내어 현관 쪽으로 가서 렌즈를 통해 바깥을 확인한다. 복도에는 처음 보는 남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여자의 상상과 달리 남자는 ‘멀쩡’했다. 누가 봐도 성실한 회사원의 행색을 한 남자가 휴대폰을 확인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문을 열어주지 않자 남자는 결국 여자의 시야 바깥으로 사라진다.





며칠 후 또다시 초인종이 울렸고 비슷한 행색의 남자가 복도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전처럼 놀라지 않았다. 길에서 주운 전단지에서 오피스텔이 성매매업소로 이용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여자는 낯선 남자들의 방문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합리적 의심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을 착각한 남자들이 여자의 집으로 새벽마다 찾아와 벨을 누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이 두렵지 않았다. 이후에도 남자들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왔다. 이제 여자는 비디오 폰 카메라에 잡히는 얼굴을 휴대폰으로 촬영한 뒤 그 사진을 프린트해서 침대와 옷장 사이 여백에 붙인다. 간략한 인상착의와 나름의 기준으로 점수까지 매겨서. 여자는 남자들을 관찰하면서 묘한 우월감을 느끼게 되고 두려움을 점차 사라진다.





한동안 뜸하던 초인종이 다시 울린 날 여자는 침착하게 모니터를 주시한다. 그 속에는 헤어진 남자 친구의 얼굴이 있었다. 아는 사람이 찾아 올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지만 그 대상이 전 남친이라는 사실에 그녀는 경악했다. 이 사건 이후 여자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남자들이 착각했다고 생각한 옆 동의 같은 호수의 집으로 무작정 찾아간다. 야한 옷을 입고 가슴을 드러낸 여성이 나올 것이라는 여자의 상상과 달리 그 집의 여자 역시 자신과 비슷한 일로 새벽마다 잠을 설친다는 하소연을 듣고 돌아선다. 여자는 남자들의 사진을 그대로 붙여 둔 채 오피스텔을 떠난다.


장예모 감독의 <홍등>이 떠올랐다. 부인을 여럿 돈 돈 많은 늙은 남자의 대저택에는 날마다 홍등이 켜진다. 등이 켜진 곳이 그날 남자가 찾아가는 부인의 침실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여자들은 남편을 사이에 두고 시기와 질투를 일삼다가 누군가는 미쳐버리고 누군가는 죽음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가부장적인 성문화의 폐해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진짜 ‘적’이 누군지도 모른 채 여성들끼리 서로 적이 되어 할퀴고 물어뜯다가 결국 용도(?)가 다하게 되면 가차 없이 폐기 처분되고 그 자리는 또 다른 젊은 여성으로 대체된다. 힘없고 가진 거 없는 여성은 자신을 이런 처지로 몰아넣은 남편과 가부장적인 문화에 저항할 수 없었기에 자기들끼리 위태로운 줄다리기를 하다가 줄은 끊어지고 삶도 함께 무너졌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에 기반을 두지만 상상력은 결국 현실에서 나온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냥, 소설일 뿐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는 없었던 이유다. 성매매가 버젓이 이루어지는 현실에서 업소를 들락거리는 것을 마치 강한 남성성의 상징이라도 되는 듯 과시하며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공공연하게 떠벌이는 사람들이 있는 한 소설가의 상상력은 계속 업그레이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설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남성의 시선 속에서 늘 관찰당하고 대상화되는 존재였던 여성이 남성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입장이 되면서 존재의 역전이 일어나는 장면이다. 홍등가에서 남자들이 매춘부를 고르듯 소설 속에서 여자는 비디오 모니터를 통해 남자들을 구경하고 품평한 뒤 전시까지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묘한 쾌감을 안겨준다.





”야, 이거 설마 내 얘기야?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에이 나 소설가잖아요. 이것도 다 소설이에요 몰랐어요?”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응, 이거 네 얘기야. 이 글을 읽고 있는 너, 바로 당신.


마지막 작가노트에서는 가슴이 서늘해진다. 소설은 가상의 인물에게 일어난 사건이지만 현실을 미러링 하는 강력한 장치다. 남의 일이라고 밀어두기엔 너무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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