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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인 마음여행자 Sep 25. 2023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창의적인(?)갑질에서 살아 남는 법


창의적인(?) 갑질에서 살아 남는 법


일의 기쁨과 슬픔(장류진, 창비, 2019)


20년차 직장인이지만 마음 한 구석의 꿈을 버리지 못한 채 엉거주춤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던 건 어쩔 수 없는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새로운 일에 도전해서 실패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충분했기에 사표는 언제나 마음속에만 간직하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판교에 갈 때 마다 빽빽 하게 들어선 테크노한 빌딩들을 보고 있노라면 금속성의 서늘한 냉기에 압도당하곤 했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실리콘벨리처럼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창의적인 일을 하고 있을까? 한국의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를 꿈꾸며 천재적인 두뇌를 풀가동하고 있을까?


판교 테크노 밸리의 현실을 제대로 알려주는 <일의 기쁨과 슬픔>은 2018년 창비 신인 소설상으로 등단한 장류진 작가의 등단작이다. 소문으로만 떠돌던 판교의 실상을, 화려한 외관에 가려진 IT 업계의 현실을 리얼하게 그려낸 작가의 솜씨 덕분에 이 작품은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고 직장인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실제로 판교 IT회사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는 작가답게 스크럼, 애자일, 영어 이름 등 어설프게 실리콘밸리를 흉내 내는 스타트업의 현실을 폭로하고 직장 동료와의 마찰, 경영자의 갑질 등 직장인이라면 쉽게 공감할 만한 내용으로 독자들의 갈채를 받았다.





‘괘씸죄’라는 철 지난 죄명이 씌워진 ‘거북이알’의 사연은 날로 진화하는 창의적인 갑질(?)의 정수를 보여준다. 인간은 언제나 배운 것 이상으로 성취를 이루어낸다. 타고난 인지능력과 뛰어난 발달한 학습능력 덕분이다. 갑질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십만 팔로워를 거느린 인스타 꿈나무인 셀럽 회장의 체면을 구긴 대가는 가혹했고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죄인(?)을 응징하기 위해 그는 기상천외한 갑질을 고안한다. ‘갑질 창의력 대회’라는 게 있다면 대상 감이었다. 소설가의 상상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실제 우리 회사대표와 다르지 않다’ ‘그보다 더하다’ 는 수많은 독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소설가의 상상력만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생각했던 것 만큼 ‘창의적’인 일도 아닌 모양이었다. 갑질이 일상인 그 곳에서는 각종 창의적인 갑질이 횡행하는 치열한 경합장이었던 것이다.


그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 같은 일반 회사원들과 사고구조가 아예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논리나 행동에 의문을 갖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이었다. "이상하다는 생각을 안 해야 돼요.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이상해져요." (P.50)





회사 대표의 만행에 대해 의문 자체를 갖지 않아야 제정신으로 지낼 수 있다는 말은 얼마나 서글픈가. 모멸감 속에서도 직장에 계속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일은 얼마나 잔혹한가? “직장에서 울어 본 적 있어요?” 극 중 인물들이 나누는 대화에서 울컥했던 오래전 어느 출근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끝없이 펼쳐진 선로는 아득했고 멍하니 바라보다가 그만 전철을 놓치고 말았다. 상사와의 갈등으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었던 그때 직장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겉도는 업무와 인간관계 등으로 속이 허옇게 타들어갔지만 때가 되면 꼬박꼬박 입금되는 월급의 위력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작가는 갑의 횡포와 을의 무력감을 대조시켜 부조리한 직장 현실을 고발 함으로써 수많은 직장인들의 공감을 얻었다. MZ 세대나, 직장인의 애환을 다룬 기존의 작품들이 시종일관 무거운 톤으로 각박한 세상을 탓하거나 살기 힘든 현실을 비판했다면 장류진 작가의 작품은 조금 다른 선택을 한 것도 돋보인다. 가엾은 을들의 이야기를 명랑한 톤으로 풀어내며 일의 슬픔 이면에 숨은 반짝이는 삶의 순간, 일과 삶의 공생에 대해서 모색한다. 무조건 직장을 뛰쳐나온다거나, 창업을 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거나 하는 드라마틱한 반전은 없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숨 쉴 곳을 찾아낸다. 


안나는 ‘고독한 조성진’ 모임에서 덕질을 하고, 개발자 케빈은 레고를 모은다. 듣도 보도 못한 갑질을 당한 거북이알은 반려 거북이에게 ‘람보’ ‘라티’ ’ 페라’라는 자본주의적인 이름을 붙이며 욕망을 다스린다. 슬픔에 침잠되지 않고, 힘에 부치지만 나름의 길을 모색하는 청년들의 모습을 작가만의 스타일로 담아낸 소설은 정이현 작가의 말처럼 ‘오늘의 한국사회를 설명해 줄 타임캡슐을 만든다면 넣지 않을 수 없는 책’ 임에 틀림없다.


남에게 들킬까 봐 혼자 몰래 화장실에서 울어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책 한권이 건네는 위로 속으로 들어가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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