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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생학교 서울 Jan 02. 2019

우리는 왜 계속 성장해야 하는가

How We   Need to Keep Growing Up

현대 사회는 아이들이 어떻게 성장해나가는지 매우 관심을 가지고 추적한다. 스위스의 임상의학자 장 피아제의 연구로 시작한 20세기 심리학은 아동발달에 관한 접근법을 개척해, 보통 유아가 초기 몇 년 사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주요 발달 단계를 밝혀내고 이름을 붙였다. 이 연구 덕분에 우리는 이제 생후 6개월 정도의 아이는 혼자 앉을 수 있고, 엄지와 검지를 이용해 건포도 같은 조그만 물체를 집을 수 있으며,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알아보고, 여기서 3개월이 더 지나야 스스로 컵에 든 물을 마실 수 있고 간단한 요청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살이 되면 ‘나’와 ‘너’라는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스스로 모자를 쓸 수도 있게 된다. 네 살 무렵이 되면 몇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을 말할 수 있고, 상상의 친구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피아제는 이를 ‘상징적 기능’ 하위단계로 분류했다). 4세에서 7세 사이 아동은 피아제가 ‘직관적 사고’ 하위단계로 분류한 시기에 진입해 추상적 개념을 이해하기 시작하지만, 지속적인 구분에는 어려움을 느껴서 ‘-보다 적다’와 ‘-보다 많다’의 개념을 사용할 때 실수를 한다. 


아이의 부모와 삼촌, 이모, 조부모 등은 이러한 발달 이정표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가족끼리 전설의 소재로 삼고 사진과 즐거운 이야기의 재료로 만든다. 가족 테이블에 둘러앉으면 아이가 첫 걸음마를 뗐을 때나 처음 동사를 써서 문장을 만들었을 때, 처음 학교에 들어갔을 때의 고난과 승리에 대해 온갖 이야기들이 오간다. 가족은 이러한 이정표들을 축하하는 게 아이가 성숙이라는 힘든 여정을 계속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하는 격려가 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이상한 침묵이 시작된다. 사회가 개인의 성숙에 기울였던 관심은 점차 집중도가 떨어진다. 몇 년 동안의 심리적이고 정서적인 성장 단계에 대해 대강의 그림을 가지고는 있지만 이에 관해 정확히 알려지거나 확인되거나 이름이 붙여진 경우는 많지 않다. 우리는 14세와 17세는 심리적으로 다를 거라 막연하게는 생각하고 있지만 정확히 어떻게 다른지, 왜 다른지 밝혀내기란 쉽지 않다. 


스무 살이 지나면 그 애매모호함은 더욱 압도적이 된다. 아동기 이후의 발달에 대해서는 어떤 대본이 있든지 상관없이 사람들은 대체로 외적이고 물질적인 문제에 집중한다. 그들이 어떤 대학 학위를 받았는지, 어떤 직업을 확보했는지, 기업의 위계질서에서 어느 정도 승진했는지를 추적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결코 성장을 멈추지 않는다. 정서 발달의 가능성은 평생에 걸쳐 존재한다. 우리가 변화를 추적하지 않더라도 변화는 일어날 수 있다. 성대한 생일잔치를 치르지 않아도, 승진을 하지 않아도, 경영학 학위가 없어도 변화는 가능하다.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도, 어쩌면 27세와 29세 사이에 우리는 부모님의 단점을 어떻게 해결할지 우리의 관점을 극적으로 재고해볼지도 모른다. 또는 36세 한복판에 질투에 대한 관점에서 큰 도약을 이룰 수도 있다. 혹은 45세에 이르러 어느 이른 아침 호텔 침대에 누워 부부간의 갈등에서 과연 누가 책임이 있는지 인식을 새롭게 고칠 수도 있다. 겉모습은 대체로 달라진 게 없어 보일지 몰라도 내면은 천천히,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정서적인 변화를 잉태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정서적 발달을 이룰 수 있지만, 아기들과 어린 아이들의 발달 단계에 붙이는 명백하고 상세한 용어는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 역시 발달 단계를 지칭하는 용어가 주어진다면 성장의 단계들에 주목하고 육성하기 위해 필요한 격려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친구들에게 또 자기 자신에게 외적이고 물질적인 면을 강조하며 삶을 진술하는 데 익숙해진 바람에 정서적인 성장에 대해서는 대체로 생각을 잘 하지 않는 증상에 빠졌다. 오래 전 알고 지낸 사람이 지난 몇 년간 어떻게 지냈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근심걱정에 대한 새로운 접근법을 얻었다거나 죄책감에 대해 새로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타이베이에 잠깐 머물렀다가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왔다거나, 온라인 판매 분야에서 새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고 설명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다시 말해 우리는 평생에 걸친 정서적 발달에 대해 별로 생각하지 않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정서적 발달에 대한 대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도 그것에 대한 글쓰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모든 어른의 삶에는 잠재적인 형태로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습득할 수 있는 일련의 기술이 포함되어 있고, 이 각각의 단계는 어린 아이가 언어의 변덕스러운 성질을 습득하거나(영어를 예로 들자면, ‘think’의 과거형이 ‘thinked’가 아니라 ‘thought’임을 배우는 것) 자전거 타기를 배울 때만큼이나 어른들에게도 중요하다. 


정서 발달의 이상적인 지도에는 일련의 핵심적인 통찰력을 습득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단계들이 존재할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자신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거나, 자신이 늘 옳아야 한다고 느껴지더라도 자신이 늘 옳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혹은 부루퉁하게 삐치지 않고 차분한 언어로 상대방에게 자신의 짜증스러움을 설명해야 함을 인정할 때, 각각을 매우 중요한 발달 상 이정표라고 알려줄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마흔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법은 알고 있지만, 더욱 현명한 세상에서는 그 사람이 마침내 제대로 사과하는 기술을 습득했을 때, 혹은 상대방이 보이는 나쁜 행동이 그 사람의 못된 성정 때문이라기보다는 불안과 공포와 더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인정하는 기술을 개발했을 때, 그 순간을 축하하는 법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삶의 다른 영역들은 명확한 발전의 기준을 가지고 있을 때 이점이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비행 분야에서는 처음 이론 시험부터 시작해 직접 제트기를 몰고 대양을 횡단하는 능력에 이르기까지 비행에 대한 지식이 늘고 있는지 추적할 수 있다. 골프 분야를 보면 페어웨이 곳곳에 강점을 등록하기 위해 필요한 정확한 핸디캡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내면의 삶에 대해서는 여전히 발달에 관한 이야기를 식별하고 말하는 것이 가혹하리만큼 어렵다. 우리는 누군가 아직 성장해야 할 일이 있다고 애매한 용어로 말하거나 자신에 대해 약간 더 배울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고 소망을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정표에 대한 우리의 장악력은 여전히 약하고 불완전하다.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현재 우리가 경력이나 연령 발달의 이정표에 관심을 가지듯이 정서 발달의 이정표에도 같은 관심과 명성을 쏟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직업상 승진을 했거나 새로운 10년이 시작되었거나, 새집으로 이사를 했을 때 축하파티를 연다. 앞으로는 성적인 문제에 관해 새로 자기연민이나 평온함을 습득했을 때 이를 축하하는 파티를 열지도 모른다.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어린아이들만 학교에 다니지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어른들도 지속적인 교육, 즉 정서적인 교육의 필요성을 느낄 것이다. 계속해서 심리학 교육과정을 적극적으로 밟아야 한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감정지능에 헌신하는 학교가 생길 것이고, 어린 아이들도 평생에 걸친 교육 과정의 초기 단계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7세와 50대가 분노나 언짢은 감정이나 비난, 배려 등에 관한 수업을 함께 듣게 될 것이고, 이 두 집단은 해당 영역에서 동등한 성숙도를 체득하게 될 것이다. 유토피아에서는 ‘나는 학업을 마쳤다.’라는 표현이 몹시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현재 우리는 사람이 내적으로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고 평생에 걸쳐 심리적 발달을 이룰 수 있으며 그래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발달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발달을 독려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하게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다. 우리는 홀로 분투할 뿐이다. 그러므로 더 좋은 세상에서는 어렸을 때 알았던 학교와는 아주 다른 학교에 다니게 될 것이다. 즉, 한눈에 파악하기 어려운 진정한 어른이 되는 길, 힘들기도 하고 평생 끝나지도 않을 그 과정을 도와줄 인생학교에 다니게 될 것이다. 


번역: 이주혜

편집: 인생학교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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