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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랑 May 18. 2020

생명

2020.05.18

새를 본 건 해 질 녘이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 벽과 에어컨 실외기 사이로 다시금 작아지는 틈에 둥지가 있었다.

 

새의 갓 태어난 새끼들이었다. 깨어진 알의 잔해 사이, 작은 손짓에도 상처 입을 듯한 연약한 몸뚱아리.

그 덩어리들은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꿈틀거렸다.

 

데미안의 새와 알이 생각났다.

알은 새의 세계이고, 새는 태어나기 위해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려야만 한다는 글.


헤세의 새는 예찬받는 곳에 있다. 세상이 읽고 회자하는 고전 속에서 주목받는다.

그것은 잊히지 않으며, 생명의 태동은 '자신의 세계를 파괴한다'는 철학이 된다.


다만,

생명은 종종, 현실이 아니라 관념 속에서 존재하며, 그 본질이 아니라 단어 자체로 여겨진다.


생명은 예찬의 대상이며, 그러니 온전하고, 완전하고 완성 되어야 마땅한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선망하는 곳, 아직 닿지 않은 곳에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극히 현실적인 결핍에서,

삶이 주는 불안에서,

외로움과, 고립과,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아있음을 알지 못한다.


언젠가 '온전해질' 그날을 기다리면서.

기다린다고  믿으면서.


  




눈 앞의 작은 생명들은 좁고 지저분한 곳에서 겨우 숨 쉬고 있었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초라한 탄생이었다.


고전 속 새의 태동은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이었으나, 눈 앞의 작은 덩어리들은 제 몸을 가누지도 못했다.


저 작은 덩어리들의 움직임이, 아니 전 생애라고 해봐야 이 세상에서 얼마나 의미를 가질 것인가?

누가 그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억해줄까?






그러나 그 순간 나에겐 저 작은 것들이야말로 생명 그 자체였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아도, 예찬하지 않아도, 화려하지 않아도, 초라한 존재여도

그저 그 자체로 완전한 생명이었다. 여느 삶에 관한 담론보다도 더 실감 나는 본질이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뭐라도 되긴 할까?'라는 불안함에 잠 못 드는 밤.

상실에 아파하고 외로움에 방황하는 생활.

'왜 나는 가지지 못한 걸까?'라는 결핍에 슬퍼하는 나날.

이겨내지 못해서 무너지는 순간.

결국은 포기해야 하는 것들.

미련에 뒤를 향하는 시선.

주목받지 못하는 초라함.

거절을 두려워하는 마음.


이것들이야 말로 살아있는 존재의 가장 생생한 증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느 노래 가사마냥, 젊음은 청춘에게 낭비일 수밖에 없듯이.

가장 살아있는 것들은 정작 그 찬란한 생명력을 느끼며 살지 못하는 것이 필연일까 싶다.






사실 우리의 생명은


언젠가 있을 그 꿈의 성취가 아니라, 결핍이 채워질 언젠가의 그날이 아니라,

꿈을 열망하는 지금 이 순간이지 않을까. 결핍에 슬퍼하는 지금 이 순간이지 않을까.


우리는 완성을 되기 위해 살아가는 미완의 존재라기보다는, 결코 완전하지 않아서 완전한 존재이지 않을까.





사람에게 생명은 '삶의 의미'이다.


권태, 방황, 무기력과 게으름, 불안에 대해 의미를 찾는 시간이 4월 그리고 5월의 절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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