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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니모 Feb 16. 2022

구멍 난 팬티

하루하루

오랜만에 한 아침운동 덕에 변기에서 몸을 일으킬 때마다 온몸이 비명을 질러댔다.

한번 앉고 일어설 때면 슬로 카메라에 걸린 피사체처럼 느리게 몸을 움직여야 했다. 그 느려진 시간 동안 허벅지 사이로 내려놓았던 팬티로 시선이 향했다. 연보라 색의 고무줄 팬티는 낡아보지는 않았지만 연필 한 자루는 통과할 것 같은 구멍이 두 개나 생겨있었다. 오늘 입은 바지는 새것이었고, 상의는 신경 써서 입고 온 꽤 맘에 드는 예쁜 옷이었는데 안쪽에 감춰둔 구멍 난 팬티의 초라함이 기분 나쁜 괴리를 느끼게 했다.


어제 퇴근길, 나랑 열 살 차이 나는 어린 친구를 잠깐 만났었다. 그 친구는 나의 책을 읽고 나의 스펙이 평범해서 그 책의 내용이 더 와닿았다고 했다. 거리감 느껴지는, 먼 곳의 사람이 아닌 그저 평범한 이의 이야기 같았다는 뜻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기 앞서 자신이 하찮다는 말을 했었다. 앞선 이야기와 나의 책 이야기를 연결 짓자 그 어린 친구의 눈에 나는 '기준 미달자'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구의 눈에 나는 하찮음 그 이하. 어쩌면 패배자처럼 보였을까 싶었다.


남의 눈, 남의 평가에 휘둘리는 일은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럴싸한 겉옷 속가려진 구멍 난 팬티처럼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이었나 보다. 나의 구멍 난 팬티를 볼 때마다 어린 친구 앞에 앉아있던 어제의 내 모습이 계속 떠올랐다. 분노도 좌절도 아닌 그저 조금 초라해진 나 자신의 모습을 뱉고 싶은 마음뿐이다.



+

참고로 나는 나를 포함한 모두의 삶이 귀하다고 생각한다. 하찮은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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