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6.25 전쟁 참전용사 몇 분을 인터뷰하게 됐다. 95세의 나이에도 늠름하고 정정하신 그분은 8년 전 부인이 돌아가시면서 털어놓은 속사정에 또 한 번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고 한다. 그동안 입 밖으로 차마 말하지 못하고 속울음처럼 삼켰던 말인데 둘째 아들에 관한 것이었다. "여보, 우리 아들이 우리보다 앞서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하면서 흐느껴 울더라는 거였다.
대기업에 취업하고 동남아의 대표 자리에 올라 서울과 동남아를 오가던 아들의 비보에 관한 이야기였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녀들로 꾸려진 단란한 가정에다 대기업 동남아 담당 대표 자리에 올라 더 이상 바랄 게 없던 아들이었다고 한다. 그날도 출장길에 안부 전화를 걸어 "아버지, 김해공항에 도착해서 바로 울산으로 갈 테니 기다려 주세요. 잘 다녀오겠습니다"며 여느 때처럼 동남아 출장길에 올랐다. 그런데 아들의 사망 통보를 듣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46세 밖에 되지 않은 아들이 부모 앞서 떠난 것이다. 소식을 듣고 급거 현지에 도착했는데 현지에서 아들은 시신으로 부모님께 인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연을 여태 가슴에 안고 살아왔던 것이었다.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힌다`는 옛말이 있다. 육체적으로는 늙어가지만 감정은 세월이 흘러도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까닭은 자꾸 그 일을 반추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한 분은 장교와 사병들의 가교역할을 하는 부사관이다. 적의 기습 침투에 소대가 전투에 나서게 되었는데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살고 죽게 되는 전투의 최일선, 아무리 지휘관의 말에 잘 따른다고 해도 사상자는 생길 수밖에 없다. 그날 부대에 전입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김 이병이 같이 전투에 참여했는데 적의 총알에 맞아 그 자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6.25 전쟁 당시 방탄모는 지금처럼 정교한 재질의 것이 아니라 총알이 빗맞으면 팽이처럼 팽그르르 몇 바퀴를 돌다가 멈추는데 총알을 정통으로 맞으면 바로 관통되는 허술한 장비였다. 극한 공방전이 끝나고 부대원을 살펴보니 김 이병은 선혈이 낭자한 채로 주검이 돼 있었다고 한다. 건장한 병사들이 부상병을 부축하며 부대로 돌아왔지만 아침까지 생존했던 전우들이 이승을 떠나 불귀의 객이 됐다는 소식에 부대원들은 침울해했다. 그분은 김 이병의 가족에게 시간과 장소가 정확히 적시된 사망통지서를 군사우편으로 부쳤다. 그날에 죽은 남편의 혼이라도 위로하는 제사를 지내도록 알려주는 게 선임의 마지막 도리였기 때문이었다. 김 이병은 늦게 군에 입대했는데 아내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여보, 군 생활에 너무 고생이 많으시죠? 저는 사랑하는 당신이 무사히 돌아오기만 빌고 또 빌고 기도하고 있어요. 여보, 기쁜 소식이 있어요. 태중에 당신의 아이가 자라고 있어요"하면서 자녀의 임신 소식까지 듣고 김 이병은 무척이나 기뻐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도 아랑곳없이 떠난 자는 말이 없었다.
약속은 지켜지라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일평생 함께한다고 해서 반려자(伴侶者)라 고 한다. 그런데 연줄이 뚝 끊어지듯 생명의 골든 타임이 허무하게 날아가 버리면 그보다 큰 슬픔이 없다. 그래서 죽은 망자를 위로하는 김소월의 `초혼`에는 님을 향한 애끓는 절절함이 구슬프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끝까지 살아남아 사랑하는 사람과 약속을 깨지 말고 약속을 잘 지킨다면 좋을 것이다. 전쟁의 끝에서는 살아남은 자가 용감했던 전우들의 삶의 기록을 증언해 줄 수 있다. 그 증언은 함께한 자의 것이므로 힘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