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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패션 해방기

by Joy Kim


1.

태어나서 열 한 살 무렵까지 시골에서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미혼인 이모들, 외삼촌과 외갓집 근방에서 살아온 나는 대가족의 온기를 그대로 받으며 자랐다. 아침이면, 출근하기 전에 잠시라도 조카가 보고 싶어, 덜 마른 머리가 꽁꽁 얼 것 같은 한겨울에도, 나를 등에 업고, 외갓집에 데려다 놓고 즐거워하던 셋째 이모. 세상의 온갖 말들을 가르치며, 배운 말들을 내가 뱉어낼 때마다 신이 나서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짝짝 쳐주었던 넷째 이모. 본인의 주머니 사정과 상관없이 장난감부터, 티셔츠, 머리 장신구들을 나에게 선물로 자주 안겨주었던 막내이모. 강원도 철원에서 이미 골백번 눈을 치우고, 긴 군복무 가운데 나온 말년 휴가에서, 복귀날 눈이 펑펑 쏟아지자 어려운 발길을 때려는 외삼촌에게, “눈 치우고 복귀해야지! 이 집 눈을 누가 다 치우노!”하며, 너스레를 떨만큼 형제처럼 정을 쌓아온 외삼촌까지. 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어린시절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였다. 뉴욕, 파리에서 온 어떤 멋쟁이에게도 주눅 들지 않을 만큼, 기세등등한 시절을 보냈던 것은, 나라는 인간이 어떠하든 간에, 덮어놓고 나를 ‘옳다구나!’ 받아주었던 그 시절 그 어른들의 그 사랑 덕분이었을 터.


그럼에도 내 깊은 곳에는 꽤 불편한 이야기가 오랫동안 문고리를 잡고 나오지 않은 채 꽁하게 살고 있었다. 나를 부끄러움에 활활 타오르게한, 삶의 몇 장면들이 그 안에 있었고. 그 첫 번째 기억은, 아홉 살 무렵이었을 테다.


“안녕하셨습니까예?” 도시에서 온 큰이모부는 나의 사투리가 그저 신기하고 귀여웠는지, 내 말을 따라하며 즐거워했다. 그런데, 내겐 그 ‘따라하심’이 꽤 수치심을 유발했던 것 같다. 국어학 시간에 배운 바, 방언이 발음의 경제성에서는 탁월함에도,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에 비해 자기 방언에 대한 비하도가 높아, 서울에 오면 재빨리 자기 방언과 작별한다는 통계치가 이를 설명해주었다. 아무튼, 엄마의 피붙이 육남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큰이모와 그녀의 남편인 큰이모부의 진하고 입체적인 이목구비와 길쭉길쭉한 팔다리는 세 자녀의 유전자로 발현되었고, 그들은 언제나 압도적인 패션감각까지 자랑해 왔던 지라, 명절에 그들의 외갓집으로의 등장은 내게 그때마다 꽤 큰 마음의 스크래치로 남곤 했다. 특히나, 큰이모부의 사투리 따라하기는 그런 마음에 더 대못을 박는 것 같았다. 누가 봐도 멋지고 예쁜 사람들이었다. 나는 평소 이모, 삼촌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것을 그때만은 하릴없이 나눠야 하는 데서 더 심통이 나곤 했던 것 같다.


그에 비해 나는, 신체적인 조건이나, 패션감각 그 어떤 것도, 그 삼남매에게는 역부족이었다. 물론, 나의 어머니는 무남독녀 외딸인 나를 인형놀이 하는 재미로 사셨다. 패션의 도시 대구로 가서, 예쁘다는 옷들을 분기별로 사입히셨지만, 그저 아이다운 귀여운 알록달록 옷들이 아니었나 싶다. 어쨌든 그 세 남매의 등장은 언제나, 평소 서열 1위, 즉 가장 사랑받는 조카로서의 위상을 세차게 흔드는 것만은 확실했다. 물론, 그들의 외적인 탁월함은 지금 생각해도 인정할만 했다. 그렇지만, 그때 굳어진 나의 외모콤플렉스는 꽤 단단했다. 나아가, 내가 노력해도 안 되는 ‘타고남’이라는 건 극복이 어렵구나! 라는 좌절감으로까지 이어졌다.


어른들에게 더더 관심받기 위해, 머리를 짜내, 온갖 예쁜 말들을 해보았지만, 그 마음을 회복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됐다. 아이다운 귀여운 말은 차치하고라도, 인사도 잘 하지 않는 무뚝뚝하지만, 화려한 그들의 등장 앞에서, 나는 그만 시들어진 풀같이 돼버리곤 했다. 사실 그들은 이모들이나 외삼촌을 자주 만나는 편이 아니라 어색했겠지만, 본래 말수가 적은 이들이다. 그럼에도 내 내면에는 “예쁘면 다 용서돼! ” 같은 말에 괜스레 화가 난다거나, 간혹 예쁜 사람들 가운데 무뚝뚝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필요이상 불친절하잖아!”와 같이 반응하거나, 약속을 자주 취소하는 친구가 우연히 외양적으로 탁월하면, “뭐야? 날 무시하는 거야?”와 같은 나만의 이상하고 뾰족한 잣대를 들이대거나, 자존감에 스스로 스크레치를 내기도 했다.


물론 ‘타고난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분명 있다. 그런 것을 보통 ‘Gifted’라고 부른다. 큰이모네 삼 남매 중, 첫째 언니는, 지금도 40대 중반을 넘겼지만, 바쁜 직장생활 가운데서도, 지속적인 운동과 식단관리를 통해 바디프로필을 언제 찍어도 무방할 건강한 아름다움을 유지함은 물론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프로그램의 셰프들처럼 냉장고 재료들을 훌훌 털어서, 비주얼마저도 완벽한 요리를 순식간에 만들어 내, 인스타그래머들의 큰 사랑을 받는 인플로언서다.


어쨌거나 나는, 태생적으로 ‘시골 출신이라 세련되지 못하다’는 어떤 관념에서 시작된 부끄러움과 소심함에 더해, 압도적 외모의 아름다움을 가진 이들에 대해, 나도 모르게 비겁해질 만큼 무릎이 꿇어지는 소심함이나 선을 긋고 토라지는 마음을 언젠가는 극복하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화려한 사람들 앞에서 풀이 죽는 일들이 그 뒤에도 종종 있었다. 아마도 내게 어떤 근원적인 소심함으로 뿌리내린 어린시절의 그 기억 때문이었을 것이다.


2.

제제가 네 살 무렵,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마음이 한없이 작아지던 시절, 제제나 나나 남들 보기에, 옷이라도 깔끔히 입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집 근처 아웃렛에 자주 갔다. 스트레스로 인해, 함부로 먹고 과체중이던 그 시절, 나의 울퉁불퉁한 몸을 조금이나마 축소시켜주는 컬러인 검정색 옷에 자연히 손이 많이 갔고, 아이를 돌보느라 오랜 시간 옷을 고를 수도 없었기에, 브랜드를 하나로 정해놓고, 나의 취약점을 잘 가려줄 풍덩한 스타일이나, 화려한 색상이나 문양으로 시선을 분산시킬 옷을 주로 구매했다.

코로나가 모두의 발목을 묶어놓은 시기였고, 늘 아이 둘을 혼자 데리고 있는 편이었으며, 사회적 관계가 극히 없던, 우울했던 시기였다. 나 역시도 제제에 대해 처음 알게된 당혹스러운 수용의 시절이었음에도, 제제에 대해 불편을 호소하는 타인들과 매일 맞딱들여야 했고, 늘 눈물자국이 있던 시절이었다. “제제로 인해, 다른 학부모들이나 교사에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라며, 나를 아끼는 주변 사람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위로를 건네왔지만, 나는 “당신이 그 처지가 돼보고 그런 말을 해!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인지!”라고 금세 대드는 마음이 돼버리곤 했다. 그러다 보니 그 시절 나의 옷 쇼핑은, 나의 모남과 둥근 몸을 잘 숨기는 ‘가면의 쇼핑’, ‘도피의 쇼핑’이었을 것이다.


3.

서초구로 이사하고 나서, 수수 영어유치원 엄마들의 공식적인 첫 모임이 청담동에서 있었다.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물론 모임이 있기 며칠 전부터, 나는 머릿속으로 원피스를 입었다가, 캐주얼한 청바지 차림을 입었다가 해보았다. 아웃렛을 드나들며, 사모은 옷들이 제법 많았던 나는, 그중에 가장 나를 생기롭게 보이게 하는 의상을 입기로 결정했다. 모임 당일에도, 약속시간에 임박해서까지 이 옷 저 옷을 다시 입어보며, 나는 왜 이리도 어둡거나 현란한 색깔의 옷이 많으며, 꽃이며, 프릴이며, 화려하고 센캐 옷들만 가득한 것인지! 돌아보며, 외출할라치면, 그 많던 옷이 싹 없어진 것 같은 마음이 돼버리곤 했다. 그렇게 입고 벗고를 거듭하다가, 급히 모임 장소로 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도착하고 보니, 나는 앉을 수도,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가 되었다. 열 다섯 명 정도의 엄마들이 도착해 있었는데, 그들이 나를 향해 눈을 크게 뜨고 “혹시 코알라반 어머님? 아 그럼 저기서 음료 주문하고 오세요! 우리도 다 그렇게 했어요”라고 말하고는 있었지만, 무언가 나의 착장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긴가민가한 얼굴들이었다.


내가 그날 입은 옷은, 밑단 끝에 아기자기한 손뜨개질 수술이 달린 청바지에, 반짝반짝 펄감이 있는 실로 장식된 체크무늬가 요란한, 크롭 기장의 조끼였다. 굽 높은 꽃이 많이 달린 샌들도 신었던 것 같다. 그 자리에 모인 클래식한 세미정장을 입은 일행들과 섞이기엔 너무 다른 옷차림이었던 것이다. 아니, 모임 공지에 드레스 코드라도 적혀있었나 싶게, 하나같이 아이보리, 베이지톤의 깔끔하고 단출한 차림의 그들. 나 잘 못 왔?나? 순간 아찔했던 그 시간은 지금도 실소를 금치 못할 추억이 됐다. 그저 내 보기에 괜찮고, 육아하기 편하면 되었던 이전의 나의 옷들은 대부분 귀엽고 아방한 스타일이었으며, 아주 현란한 무늬나 반짝이는 펄사가 섞여있었다. 원피스마저도 죄다 놀랍게도 모자가 달려있어 단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튼, 그날 나는 모임의 목적과 격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나타난 유일한 사람이 되었다.


강남으로 이사한 지,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주변 사람들이 입는 옷에도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튀지 않는 색상에, 언제 입어도 깔끔하고 베이직한 스타일의 옷, 그러나 어딘가 모르게 원단이 좋아 보이거나 체형을 잘 커버해주는 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대단히 차려입지 않아도, 꾸민 건지 안 꾸민 건지 알기 어려운, ‘꾸안꾸 스타일’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막상 그걸 나에게 적용해 보는 건 또 다른 과제였다.


이때였다. 나의 오래된 열패감에 종지부를 찍어야할 때가 온 것 같았다. “이참에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자!”는 결심이 섰고, 내 여생동안 계속 입어도 좋을 만큼의 평생 입을 아이템들을 하나씩 구매해보자 마음먹었다.


이번에는 아웃렛이 아니라, 백화점으로 향했다. 옷을 깔끔하게 잘 입으면서도, 과한 소비나 나에게 어울리지 않을 만한 구매를 단칼에 말려줄 이웃을 동반해서. 주부가 되고 난 다음에는 가정 경제를 생각해, 백화점에서 옷을 산 일이 없었고, 부담되는 일이었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투자해 보기로 했다.


일단 나는 모자 달린 옷과 특유의 화려함이 있는 그 브랜드와는 결별했다. (의문의 1패가 된 그 브랜드에는 죄송한 마음이지만) 나의 친절한 이옷은 나에게 잘 맞을 만한 두 세 개 정도의 브랜드를 소개해 주었다. 그전에 나는 내 얼굴이 쿨톤인지 웜톤인지도 알지 못했는데, 그날 알게 된 바로 나는 웜톤이었다. 실로 집에 있는 쿨톤의 옷들은 먼지만 쌓여 있었다. 거기에 더해, 나의 옷장에는 검정색 옷이 가득했는데, 나는 검정이 아닌, 흰색이나 아이보리 같이 밝은색을 입어야 얼굴이 화사해졌다. 조명을 얼굴 위에 탁 켜주는 것 같은 효과가 밝은색 옷을 입었을 때 확연했다. 그리고 원단이나 디자인이 훌륭한 옷을 입으니, 나의 체형의 약점 또한 어느 정도 잘 보완이 되었다.


백화점 매장에 들어서자, 전투태세를 한 나를 알아본 것인지, 직원들이 나에게 어울리는 옷들을 내 앞에 가져다가 매칭해 주었다. 아웃렛에서는 없었던 풍경이다. 아웃렛은 보통 매장에 있는 품목 중, 손님이 맞는 사이즈가 있으면 가져가 결제를 하는 식이다. 그렇다! 모든 일에는 수강료가 필요했다. 옷을 전혀 구매하지 않을 것 같은 고객에게 충성을 다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한 브랜드를 정했고, 1년 작정을 하고, 그 브랜드에서 사계절의 중심이 될만한 옷들을 하나씩 구매했다. 구매가 누적되자,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옷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는 그곳의 직원들이 나의 체형을 고려해서, 척척 매칭을 도와주었다. 또한, 해당 브랜드의 어플에 접속하니, 내가 그동안 구매했던 옷들이 옷장처럼 정리돼 있었다. 혼자 옷을 차려입으려 할 때에도 큰 참고가 되었다. 그리고 같은 옷을 구매한 다른 센스있는 구매자들의 후기를 통해 배우는 부분도 컸다. 같은 옷을 이렇게 활용하는구나! 배우는 것이다.


그렇게 1년을 하다보니, 그동안 나와 맞지 않은 옷들을 많이 구매했음을 더 잘 알게 됐다. 가격대는 물론 아웃렛보다 비싸긴 했지만, 나에게 최적화된 양질의 스테디셀러들을 사계절 내내 경험해 보고 나니, 오히려 버릴 옷이 없이 장기간 쓸 수 있는 구매를 했다고 느껴졌고, 김장김치를 마치고 겨울을 맞은 주부의 마음처럼 든든해졌다.


물론, 아웃렛의 장점은 너무 많다. 40~70%의 훌륭한 할인율이 일단 그렇다. 하지만, 할인율의 혜택으로 덥썩 충동 구매해온 옷들은, (그 당시 나의 경우) 구매 후에 거의 입지 않은 채 옷장에서 잠자고 있었다. 내가 무슨 옷이든 잘 소화해내는 훌륭한 옷걸이를 가졌다면 상관없었을 텐데. 울퉁불퉁한 몸에, 전문가적? 소양이 없이 고른 옷들이었고, 아웃렛 매장에 남아있는 옷들은, 대체로 백화점에서 팔고 남은 상품들인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찰떡처럼 어울리는 옷들은 수량이 얼마 없고, 나오자마자 팔리고 없었던 터였다. 그마저도 지난해 해당 브랜드의 옷들을 잘 섭렵하고 있는 고객들 가운데, 할인된 가격에 나오면 바로 겟하겠다고 기다리던 쇼핑러들에게 뺏기기 일쑤였다. 아무튼 그 시절 아웃렛에서 충동구매한 옷들은 나에게는 낭비 아닌 낭비가 되어버렸는데, 백화점에서 사계절동안 경험해본 옷들은 앞으로 10년은 거뜬히 입어도 괜찮을 클래식한 색상과 디자인의 것들이었으며, 내 체형에도 딱인 옷들이라, 가격은 비싸도, 지속성이라는 가치로 봤을 때, 말그대로 똑똑한 소비가 돼주었다.


4.

수수를 영어유치원에 보내며, 한해 수천억을 수출하는 CEO 엄마, 미국 물류의 중심에서 미국 동서남북의 달러를 다 벌어들이는 기업을 경영하는 엄마, 재벌가 로열패밀리인 엄마, 이름난 엔터테인회사 경영자, 투자하는 드라마마다 대박이 나는 엔터테인 투자자, 연예인 까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람들을 지근에서 보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이 이야기를 할 때 우리는 그냥 모두 똑같은 엄마였다. “수수 엄마, 우리 00는 어느 유치원이 더 잘 맞을까요?” 유튜브 채널이나 tv에서만 보던 그녀가 그런 개인적인 톡을 건네오면 생경하면서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그들과 동떨어지고 싶지 않은 ‘동질화’에 대한 마음도 컸으리라. (샤넬과 디올로 옷장이 가득한 그분들을) 따라하고 싶어 안달난 마음이 아닌, 딱 그 시기에만 만날 수 있었던 그 사람들과 튀지 않는 착장으로 잘 교류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명작 독서로 단단하게 내 인생의 토양을 쌓듯, 그 기회로 내 인생의 옷장을 마련하고 싶은 정도의 마음.



5.

무엇보다도 40대는 2030의 아름다움과는 견줄 수 없지만, 여성으로서 또 다른 아름다움의 정점을 찍는 때가 아닐까, 생각하며, 50대 60대에는 덜 어울릴지도 모를 착장에도 욕심이 났다. (물론, 5060에 더 잘 소화할 수 있을 수도 있지만.) 그로 인해 신체 나이를 다운시키고자, 건강한 다이어트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무엇을 입어야할까’에 대한 나의 욕망은 조금씩 나의 몸을 정돈하고, 단출한 차림을 잘 소화해내기 위한 다이어트나 좋은 피부, 운동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갔다. ‘관계가 개입된 소비’가 중점적이었던 시기였지만, 그와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된 시기였다. 그 시기를 지나며, 나는 (타인과 비교하는 데 진을 빼지 않으면서도) 나 자신을 사랑하는데 공을 들였고, 그렇게 사회적 맥락 속에 존재하는 (외모 외적인) 나의 여러 면모에 대한 자존감도 회복됐던 것 같다.



6.

내가 정말 그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극복했다고 생각한 부분은, 겨울이면 대부분의 엄마들이 압구정 학원가에 모피를 입고 나타나도, 모피를 힘들게 구매하는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저 내가 애정하는 겨울외투로 꿋꿋하게 버텼다. 나만의 안목이 생겨서인지, 내 눈에 예쁘다고 여겨지는 스타일의 모피코트는 죄다 고가였고, 백화점이나 아웃렛에 폭탄 세일로 나오는 모피 코트들은 내가 원하는 그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환경을 생각했을 때, 모피코트를 입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또한, 페이크모피가 아주 예쁘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더구나 나는 바스트가 웅장한 편이라, 모피코트가 오히려 몸을 부하게 보이곤 했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내 성격대로, 마음껏 입어보고, 마음껏 나 자신에 대해 수긍하는 시간을 가진 뒤에 내 안에 토라진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니, 이제는 백화점에서 수업료를 내듯, 옷을 사러 가지는 않는다. 아웃렛에 나온 아주 필요한 템만 기다렸다가 사거나, 오프라인 매장은 없지만, 온라인에서 스스로 디자인해 판매하는 디자이너들의 훌륭한 디자인에 관심을 가졌다가 구매한다. 마케팅 비용을 제외한 그 옷들은 가격도 합리적이다. 그 옷들을 사는 재미도 쏠쏠하거니와, 기본템들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다보니, 옷을 열심히 사지는 않는다. 어쩌다 예쁜 스커트를 힘주어 구매하거나 포인트가 될만한 악세서리 정도를 구매하며 쇼핑의 빈도를 완전히 줄였다. 구경하는 즐거움으로도 충분히 재미있기도 하고.


7.

무엇보다 수수가 영어유치원을 졸업하니 ‘나의 패션 준거집단’이 사라졌다. 예전의 그 니즈들이 한순간에 싹 사라진 것이다. 그저 나의 동선은 집 앞 학교 정도 이다보니, 동네룩으로 편안한 차림이면 충분하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도, 이미 가지고 있는 든든한 기본템들이 있으니, 갑자기 정장을 마련할 필요도 잘은 없다. 이제는 내 자신의 몸에 맞는 ‘나는 이런 독특한 옷도 소화해!’ 같은 ‘타자화’의 쇼핑을 즐기는 편이다. 나의 몸과 나에게 맞는 옷을 찾고 나니, 나의 착장으로 인해,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이제 옷으로 인해 자유를 누리는 행복한 자유인이 된 것 같다.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 청담동의 첫 모임에 모인 사람들은 사는 곳이 다양했다. 삼성동, 압구정, 청담으로 대표되는 강남구부터, 서울숲, 옥수동, 금호동의 성동구민들, 반포동, 잠원동을 아우르는 서초구 사람들까지, 상대가 어떤 옷을 입고올 지 서로 가늠이 안 되는 상황이다보니, 엄마들이 일단 튀지 않으면서도, 베이직하면서도 격조있는 의상을 입었던 것 같다. 가방이나 주얼리로 포인트를 준 것은, 기본적으로는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아니다 보니, 00엄마의 인상을 확실하게 각인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상대에게 자신의 매력을 한껏 전달하고 싶었던, 조금의 과시가 허용된 욕망의 공간이 아니었나 싶다. 무엇보다 코로나로 하늘길이 막히면서, 명품 쇼핑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으며, 그 가방을 들고 도무지 갈 곳이 없었던 엄마들의 첫 해방구였던 시기이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니, ‘강남 엄마들은 이렇게 입는다!’ 라는 공식같은 것이 애초에 있었다기 보다, 결국은 내가 나 자신을 내보이는 데 있어서, 사회적 맥락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가 컸던 것 같다.



8.

요즘 제제와 수수를 집 앞 학교에 보내고 만나는 사람들은 이제 그야말로 동네 사람들이다. 일단 공립 초등학교는, 반이 10개 가까이 되다 보니, 6학년 졸업할 때까지 서로 누가 누구인지 잘 모른 채 동네를 왔다갔다 하며 지내는 편이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 또한 각자 힘주는 과목에 따라, 모였다 흩어졌다 한다. 물론 서초에서는 (영어 학원 탑투에 해당하는) 피아이, 엠아이 다니는 애들이 황소수학도 대체로 다닌다고 하니, 선행을 성실히 시키는 학부모들은 그 학원들에서 서로간에 만나는 빈도가 높은 편이긴 하겠지만, 그들은 아이들 공부에 더 진심이다. 반대로 선행으로부터 자유로운 엄마들은, 아이들과의 여행이나 체험을 자주 기획하거나, 아이의 행복한 삶을 위한 음미체 교육에 집중하는 등, 아이와 할 수 있는 다른 어떤 가치들에 돈과 시간을 쓰는 경우도 많아서, 화려한 패션피플로서의 시전은 그닥 없는 것 같다.


아이들이 동네 학교를 다닌다는 건, 보다 자연스러운 모습이 노출되는 일이다. 운동을 하다가 샤워를 채 하지 못하고, 화장끼 없는 얼굴로 학교 앞에서 아이를 데려올 일도 허다하다, 그러다 보니, 운동복 차림의 엄마들도 많다. 물론, 원가 8만원이라는 400만원대 패브릭 소재의 디올백이며, 지푸라기 가방 아닌가 싶은 프라다의 여름 시즌에만 들고 다닐 라탄백이 2백만원을 훌쩍 넘어서지만 자주 보이긴 한다. 써보면 아주 편하고 좋다는 평 때문인 것 같다. 에르메스의 경우도, 내 입장에서보면, 단 하나의 에르메스를 가진다면, 사지 않을 법한 디자인인, 아주 실용적인 가방이 동네에서는 가장 많이 보이긴 한다. 하지만, 모두가 너무나 편안한 차림이다. 사고 싶으면 언제라도 살 수 있는 물건에 그다지 마음을 두지 않는 것 같다.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야 무슨 백을 들건 그닥 관심도 없는 것 같다. 누군가의 착장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는 일이 이제 없고, 나 역시도 그런 일로 주눅드는 일이 없어졌다.


이렇게 수수를 영어유치원을 졸업시키고 나니, 관계가 개입된 소비를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큰 자유를 얻은 것만 같다. 수수의 졸업, 입학을 기념해 나도 번쩍번쩍한 검정 가방을 큰 맘 먹고 하나 구입하기는 했다. 그런데 정작 수수의 입학식날은 폭설이 내렸다. 우산을 쓰고, 가로 세로로 내리는 눈을 피해가며, 굳이 번쩍이는 명품백을 메고 가는 것은 어딘가 격에는 안 맞는 일 같았다. 그렇지만, ‘명품가방이란 무엇인가’를 논하려면, 나는 그게 무엇인지 해보고 말해야 한다는 생각인지라, 사보기는 했으나, 이제는 그 ‘가방=나’ 라는 시절로부터 완전히 졸업한 상태라, 큰 감흥이 없어, 좋은 값에 팔아도 좋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재밌는 사실은, 수수가 간절하게 부탁하는 말이다. 엄마가 늙으면, 그 가방은 꼭 자기한테 물려달라는 것이다. 엄마의 모든 물건 중에 가장 빛나고 예쁘다는 것이다.


어제도 동네에서 만난 대학동기들이 우스갯 소리로 “요즘 은행 입사동기들이 부지점장으로 많이 승진하는데, 롤렉스 시계를 모두가 산다”는 것이다. 대기업 수석 변호사로 승진한 친구 역시, “다 똑같구나! 우리는 쥬얼리 쪽으로 힘주는 경우도 많아!”하며 무릎을 쳤지만, “나는 답답해서 목걸이 안해!”, “시계는 대학시절부터 차던 000 브랜드가 짱이지! 고장도 안 나!” 하며, 관계적 쇼핑에서 자유로운 서로를 두둔해주며 빵 터져 웃었다.


9.

요즘 내가 애정하는 착장은, 레오파드 롱 스커트. 몸을 따라 유연하게 흐르는 실루엣과 과하지 않은 광택감이 매력인 폴리 소재의 시원한 하의. 거기에 깊이감 있는 넥라인으로 목이 길어 보이고 키도 크게 보이게 하는, 딥넥의 블라우스를 더해준다. 자켓의 무거움을 덜어내고 블라우스의 가벼움을 곁들인 트위드 블라우스인데, 크롭 기장이라 허리가 업돼 보여서, 다리까지 길어 보인다. 무엇보다 블라우스가 위아래로 뚫려있어 무더위에도 시원하다.


그밖에도, 코로나 시절 구입해 뒀던, 알록달록 꽃문양이 수놓아진 검정 시스루 나시 원피스 안에, 검정 원피스를 이너처럼 입어보니, 새로운 조합이 되어, 한 톤 다운된 예쁜 검정 드레스가 탄생했다. 레이어드의 힘! 새 옷을 득템한 듯 기쁘다.


나만 아는, 나만의 즐거움으로의 행복감은 이처럼 특별하다. 나도 모르게 어깨에 자신감이 뽕을 더한다. 이건 반짝이 명품 가방을 구매할 때의 그 짜릿한 구매의 순간을 통과할 때보다 덜 고통-결제금액을 확인하는 순간의 고통-스러우며 더 뭉근하고도 오래가는 사랑이다. 콧노래가 나오며, 거울 앞에 자꾸 서게되는 즐거움이다. ‘저 스커트는 어디서 샀을까?’ ‘저 블라우스는 어디서 발견했을까?’ 궁금했으면 좋겠다. 누가봐도 와! 할만한 단아한 옷을 백화점에서 고가의 원단으로 구입한 덕에, 정돈돼 보이는 당연한 멋짐하고는 또 다른 멋짐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무리해서 다이어트를 하지는 않거나 못하고 있지만, 어떤 착장으로 인해, 나에게는 아주 딱인 그런 스타일링을 계속 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오늘은 무엇을 입을까, 라는 설렘과 기쁨으로 하루내내 행복하여, 다른 이들에게도 그 기분좋음을 전해주는 사람이 되면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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