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지 않아도, 소원하지 않아도 될 마음
요즘은 일상이 단순한 편이지만, 지루하지 않다. 이 시절의 면면을 누리기에, 시간이 모자란 것 같다. 영어 단어에 ‘monotonous’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우리말로, ‘단조로운’이라고 외웠지만, 그 단어를 영어로 발음할 때, 악센트 안에 있는 리듬감이 맘에 든다. 단순하지만, 그 안에 음표가 통통 살아 연주하는 것 같은 그런 활기참이 숨은 것 같은 단어.
지난해까지는 그토록 멀리, 떠나고 싶은 욕망이 내 안에 가득했는데. 마흔을 넘긴 지 두 해가 되어 그런 것일까 ‘기필코 어딘가로 떠나고야 말겠다!’는 전투력이 쉽게 사라져버렸다. 이런 마음이 이상하고 낯설다. 육아하며, 집에만 있어야 했던 시절이 숨막히게 힘들었기에, 1박 2일 서울 시내 호캉스라도 가보겠다며, 열을 올렸었는데! 뿐만 아니라, 동조해주지 않는 남편에게 서운함도 컸는데! 요즘은 남편이, ‘엇 부인이 어디 가자 소릴 안 하네!’ 하고, 말은 안 하나, 꽤나 흡족한 동시에 의아한 눈치다.
단 하루 집을 떠나는데도, 지구상의 모든 육아템을 다 싸 담듯 힘들게 짐을 쌌는데. 아이 돌보며, 짐 싸는 것도 보통 고역이 아니었음에도, 기어코 어딘가로 떠나려 했던 나였는데, 지금은 그랬던 내가 번잡스럽게만 느껴진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필사적이었단 말인가!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연이어 세 번 제주로 떠났던 얼마전까지의 에너지며, 갈망도 남의 일 보듯 낯설다. 날이 더워져서 그런 걸까. 나라는 한사람의 심연도 이처럼 종잡을 수 없다니, 놀랍다.
짐을 싸서 멀리 떠나고 싶은 마음보다는, 오늘 배울 만큼의 책을 책보에 잘 담아, 서당으로 가서 글공부를 하고싶은 그런 여름 앞에 나는 서있다. 시원한 수박 몇 조각에, 선선한 선풍기 아래, 집 근처 서점이나 도서관에 왔다갔다 하며, 이 여름을 다 보내도, 괜찮을 것 같다.
최근들어 나는 이렇게 ‘잔잔한 일상’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져서인지, 떠나기 보다 ‘남고 싶은 자’가 된 것 같다. 책 읽고, 내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다른 사람들의 살이와 조금은 멀찍이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의 좋음을 누리는 최근의 일상의 만족감!이 내 마음을 이리 잠재웠나 보다. 더 어릴 때는, 혹은 새 아파트에 입주를 할 때면, 그것도 아니면, 1학년을 처음 맞이하는 자녀가 있다면, 열린 마음으로 나를 한껏 보여주고, 상대도 알아가고 싶은 상태가 됐었는데, 이제 중년이라는 나이로 나아가게 되면서, 나와 결이 잘 맞는 사람들 몇몇만으로도 삶이 충분히 만족하는 수준에 이른 것 같기도 하다.
여행을 꼭 간다면, 이미 다녀온 곳을 가고 싶기는 하다. 교환학생으로 10개월간 가서 살았던 나가사키. 하얀 짬뽕과 설탕이 씹히는 카스테라, 도시를 가로지르는 오래된 전차를 타고, 모퉁이를 돌때마다 ‘모퉁이를 돈다’는 안내방송을 꼭 해주는, 그 버스 기사의 마이크 음성을 듣고 싶다. 올라가면, 어떤 풍경이 있을지 뻔히 알 것 같은 구라바엔(글로벌 정원), 그 언덕에 오르고 싶다. 친구가 살았던 베트남 하노이에서의 일주일간 가보았던 식당들을 그때와 같이 차례대로 가보고 싶다. 세상 어디에도 없던 현지 쌀국수를 먹고 싶다. 새벽녘 호텔 앞 자그마한 카페에 쌔근쌔근 단잠에 든 아이를 두고 나와 노트북에 그 여행의 충만한 기쁨을 기록하던 그 의자와 테이블로 돌아가고 싶기는 하다. 출장으로 갔던 밀라노, ‘최후의 만찬’ 그림이 있던 근방의 부띠끄 호텔과 메트로를 타러가는 길에 있던 레스토랑이 그 모퉁이에 아직 그대로 있는지, 그때처럼 야외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즐길 수 있는지 가보고 싶고. 젤라또도 먹는다면 더 좋을 일이다. 파리 13구역의 중국 시장과 향긋한 햇볕 냄새가 고르게 묻어있던 예의 한인 민박과, 어린이들이 가득하던 파리 현대미술관에 어린이들 사이에 앉아 가만히 그림을 보고싶다. 몽마르뜨 언덕을 오르는 길에 나를 그려줄, 가장 인기가 없는, 거리의 화가에게도 가서 나를 그려달라고 하고 싶다. 세계 어느 나라에 9월 여름방학인 곳이 있을까. 일본 대학생 신분으로 9월 여름에 떠났던 유럽 배낭여행을 추억하며, 일본인 대학생이 가장 많은 9월, 그 초가을의 유럽에 가고 싶다. 산마르코 대성당 앞에서 건물을 스케치 하는 일본인 건축학도들의 그 섬세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그 스케치북들을 눈으로 실컷 훔치고 싶다.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는 것 같던, 호주의 골드코스트를 맨발로 걷고 싶다. ‘서퍼들의 천국’에서 가만히 누워서, 카뮈의 <결혼 여름>에서의 ‘삶과의 이혼’이 아닌, 삶과의 결혼, 그 젊음을 지켜보고 싶다. 나열하고 보니, 자칫 꽤나 갈망하는 일인가 싶지만, 이 모든것들 역시, 안해도 내 마음에 그만인 일들이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려는 마음보다, 갔다왔던 익숙한 곳들이, 거기 그대로 있었으면 하는 확인의 마음, 그저 그뿐이다. 모두 열망의 시절에 다녔던 낯선 여행지였다. 처음 사귄 남자친구를 군대에 보내고 혼자 떠난 여행지, 열렬한 첫 연애 끝에 어찌할 바 모르던 마음을 움켜쥐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던 어떤 절망과 새로운 직장에 들어가기 전의 긴장감과 첫 휴가를 얻어 떠난 삶의 이런저런 열망이 거기 있었지,하며 죽은 자가 삶을 다시 돌이켜보듯, 그렇게 돌아보고 싶다. 그렇지만 그리움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이들과 함께 일상에서 벗어나는데 엄청난 에너지를 썼다가, 일상으로 복귀하는 데도 그만큼의 에너지를 다시 써야하는 여행을 감행해도 좋을 만큼의, 에너지를 쏟을 마음이, 그 갈망하는 마음이 이제는 없는 것에 가까워진 것이다. 그게 한동안이 될지, 앞으로 계속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신입사원 시절, 주말 근무나 야근을 하던 저녁, 꽤나 맛있는 집에서 밥을 사주시던 부장님은 내가 맛있게 먹으면, “맛있냐? 많이 먹어! 나는, 그다지 맛있는 것도, 좋아 죽겠는 것도 이제 없어!” 하던 부장님에게 속으로 “뭐야? 내가 힘껏 맛있어 하는데, 굳이 맛없이 받을 일이야?” 하는 마음이 들었는데, 마흔을 넘어서니, 그때 그의 표정과 말투를 조금 알겠는 것이다.
수수가 요즘 영어 에세이 숙제로, 구조가 명확한 글쓰기를 배우는 중인데, 너어무 긴 시간 씨름하며 힘들어하는데 이런 아이를 두고 보자니, 나는 어른이라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이런 이상한 대결을 아이와 하고있는 것인가 마음이 퍽 힘들다. 이건 수수만의 완벽주의 때문에 생긴 일이긴 하지만, 마음이 쓰여 결국, AI의 도움을 받아, 매끈하게 완성된 작문을 건네며, “1학년이 완성도있게 글쓰는 거 쉽지 않고, 괴로운 일이야. 엄마가 지름길을 알려주는 거야. 어서 이렇게 쓰고 자러 가!”라고 했다. 글로 써놓고 보니, 아이에게 이런 폭력이 어디 있는가! 싶긴 하다.
아이는 Daily report로 평균 정도의 평가만 받는 것이 못내 신경에 쓰이는 눈치였다. 그래, 엄마인 나는 아이에게 다소 모범답안 같은 것을 준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배울텐데, 애를 태우는 게 안된 마음이었다. 그런데, 수수는 그것을 바닥에 휙 집어던졌다. “이거 맘에 안 들어! 내가 학원에서 브레인스토밍 했던 내용이 반영이 안 돼 있잖아. 싹 바꾸면 어떡해 엄마?” “아냐, 그렇게까지 멀리 가지 않았어!” 나는 아이가 애써 만들어낸 쉬운 해결책을, 바닥에 던진 게 마음에 쓰였다.
졸린 눈을 비벼가며, 아이가 해놓고 잠든 글의 구조를 살피는데, 나보다도 낫고, AI가 제시한 것보다 낫다. 이유는, 수수의 첫 의도대로, 본인이 처음 낸 아이디어에서 가장 근접하게 썼기 때문이다. 맞고, 안 맞고의 문제와는 다른, 글쓴이의 고유한 영역으로서의 잘쓴 글이었다. 역시, 엄마는 엄마대로의 삶가운데 수수를 기다리고, 수수는 수수대로 스스로 부딫히며 자라는 것이 좋은 일이구나. 그렇게 받아들인 밤이었다.
7세 고시를 통과해서 어렵게 간 학원이고 뭐고, 다 놓아 줘버리고, 수수 원대로, 실컷 책이나 읽게 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해진 밤이었다. 다 그만둔다면, 이제 수수의 영어교육을 어떻게 시켜야할 지, 혼자 몇가지 플랜을 그려본 사이, “일단 방학동안 쓰는 것보다 말을 더 많이 하는 학원에 양다리 걸쳐보고, 그때 결정할게! 아깝잖아. 어제 힘들게 한 편 써냈는데. 한달만 더 끙끙대 볼게”라며 어제 언제 그랬나 싶게, 아침부터 툴툴대며 엄마에게 어깃장을 놓는 수수와 만났다. 이런들 어떠하고, 저런들 어떠하겠나 하는 마음에 다시 정확히 이르렀다. 물론, 그날 써낸 에세이가 아주 좋은 평가를 받은 날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무더위에 엄마인 나는 늘 냉수부터 들이 밀지만, “이거 지금 마시면, 배탈나 엄마!” 하고 신경질을 부리고는, “나는 더 뛸꺼야!” 하고 휙 돌아서 버리는 수수. 수수는 땀이 흐를 때, 바람이 느껴지면서, 몸이 시원해지는 상태를 더 좋아하는 아이다. 비로소 나는 나의 성급함을 돌아본다. 7세 고시를 추앙하거나 비방하는 마음도, 열심히 자신을 바라보며 한 걸음 앞으로 더 나가 보려는 아이에게, 내 마음의 계획을 칼처럼 들이대는 일도, 내가 할 일이 아니라는 마음이 든다. 아이는 엄마와는 다른, 지금 어떤 열망의 시간 안에 있는 것 같기에.
나도 마음속에 몇가지 선명한 소원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내가 좋다여긴 그 모든 게 이뤄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함께 있다. 부모라는 이유로 “내가 더 살아보니, 내가 더 답을 잘 아는 것 같다”는 식의 호언장담으로 자녀 인생을 이겨먹을 재간이 없어졌다. ‘나’라는 근시안적인 존재가 소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약간 예기치 않은 길로 빠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가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그곳에, 훨씬 나에게는 찰떡같이 잘맞는 최적화 인생회로가 거기 있을 수 있으니. 아니면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