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하고 굵은 목소리. 그를 만나면 목소리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아니나 다를까 강규원 씨는 올해로 3년째 성우 공채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철학과를 졸업해 직업훈련을 통해 정보보안회사에 취직했다. 평일에는 직장을 다니고 주말마다 학원에서 성우가 될 준비를 한다. 일주일을 빼곡히 채운 일정에도 그는 피곤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꿈을 향한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그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는 대학에 철학과로 입학했지만, 학문에 흥미가 없었다. 그저 성적에 맞춰 입학한 곳이었다. 아무런 목표 없이 도착한 대학에서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때 그에게 게임 ‘스타크래프트 2’의 예고편 영상이 그에게 다가왔다. 영상 말미에 한 캐릭터가 “내 목숨을 아이어에…”라고 외치는 장면이 있다. 그 묵직한 목소리가 마음을 움직였다. 영상을 본 그는 성우가 멋진 직업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성우를 꿈으로 삼지 않았다. 성우는 미래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성우는 인턴채용도, 공모전도 없다. 경력을 쌓을 방법은 공채 시험에 붙는 길뿐이다. 공채는 한 번에 많아야 2~3명밖에 뽑지 않는다. 그나마 공채 시험에 붙어 성우가 된다고 바로 자리잡는 것이 아니다. 회사에 소속돼 활동하는 ‘전속 기간’은 약 2년이다. 그 이후는 프리랜서와 다를 바 없다. 업계에서 인정받아 여러 작품에 캐스팅 돼야 하는 불안정한 직업이다. 선뜻 선택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는 성우의 현실을 알았기에 그길을 진지하게 생각지 않았다.
변화는 전역 이후 찾아왔다. 군 생활을 마친 후 갑작스레 다가온 현실의 무게에 생각이 많아졌다.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먹고살 수 있을지 막연했다. “막막한 마음에 가장 눈에 밟히는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때 성우가 제일 먼저 떠올랐어요. 이번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이도저도 아닌 채로 끝날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정말 해봐야겠다 싶었죠.”
확고한 의지만으로 현실을 이겨내기는 어려웠다. 2년 넘게 공채에 응시했지만, 단 한 번도 1차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아르바이트 비용으로 학원비를 충당하는 일도 서서히 한계에 다다랐다. 묵묵히 지켜보던 아버지는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보라고 말했다.. 꿈을 포기할 수 없던 그는 아버지와 크게 다퉜다. 지난한 싸움 끝에 취직 이후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가 시작한 일은 보안 설루션 엔지니어다. 회사에서 판매한 보안 프로그램을 관리하는 직업이다. 전공도, 흥미도 아무런 관련이 없는 밥벌이였다. 낯선 환경과 업무에 적응하기는 힘들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일이었고, 첫 직장이라 인간관계에 적응하는 일마저도 버거웠어요. 직장도 감당하기 힘든데 쉬는 시간을 쪼개서 주말마다 성우 준비를 하려니 너무 피곤했죠.” 그는 여기까지가 도전의 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이상하게 ‘성우’라는 말이 눈에 밟혔다.
“출장을 마치고 회사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뒷좌석에 앉아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데 길가에 ‘성우빌딩’이라는 건물이 있더군요. 사실 별 의미 없는 이름인데 ‘성우’라고 쓰인 것만 보여도 머릿속에 오래 남았습니다.” ‘성우’라는 글자만 보여도 그는 의미를 부여했다. 어쩌면 이 길이 운명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렇게 억지로나마 이유를 만들며 그는 버텼다.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처럼 힘든 시간이 지나자 그의 마음은 굳건해졌다. 그는 포기를 잊은 지 오래다. “저는 뭐 하나 제대로 끝낸 적이 없을 만큼 끈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우 시험은 4년 넘게 도전하고 있어요. 이것마저 포기한다면 앞으로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 같아요. 성우는 꼭 한 번 해내고 싶습니다.”
그의 목표는 사람들 마음에 길이남을 연기다. “저를 설레게 만든 게임 영상처럼, 제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울림을 주길 바랍니다. 누군가 마음에 길이 남을 연기를 하면 좋겠습니다. 유명한 성우가 되고 싶은 바람은 없어요.” 단 한 번 화려하게 빛날 그날을 꿈꾸며 그는 오늘도 피나는 노력을 이어간다.
강규원 씨에게 꿈이 지닌 의미를 물었다. 그는 “꿈은 하늘의 별 같다”고 말했다.
“우리는 현실이라는 땅을 딛고 살지만, 하늘을 바라보며 살죠. 현실은 중요하지만 땅만 보며 산다면 같은 자리에만 머물지 몰라요.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별이지만 그 빛을 따라가다 보면 제가 알지 못했던 곳까지 닿게 되지 않을까요? 그래서 꿈을 포기하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는 며칠 전 치른 시험 결과가 19일에 나온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시험에서 수도없이 떨어졌음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피나는 노력 끝에 꿈에 닿을 수 있을까? 미래는 알 수 없지만 확고한 의지는 목소리만큼이나 묵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