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밀리킴 Mar 05. 2022

서핑과 삶의 균형을 찾아서

파도만 타다가 인생 끝나면 안되잖아.

2018 3 말이었나, 아니면 4 초였나, 아직 겨울이기는   같은데 약간 날씨는 풀렸고, 아무래도 너무 분하고 더이상 못참겠는 그런 마음으로 엄마와 함께 강원도로 향했다.


서핑을 처음 배워보겠답시고 도착했던 곳은 하조대 해변. 해변가에 있는 서핑샵에 물어보니 지금은 시즌이 아니고 너무 추워서 강습을 하지 않는다며, 기사문에 가보면 혹시 열은 서핑샵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직원의 말에, 그쪽으로 차를 돌려 기사문에 도착. 마침 문을 열었던 서핑샵에, 잔잔하게 발목 정도로 치던 파도, 무슨 가건물 같은 샤워실에서 두꺼운 5미리 수트로 갈아입고, 꼴뚜기 같은 몰골로 엄마랑 둘이 재밌다고 밀어주는 파도에 일어나니 넘어지니 하며 그렇게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왔다.


사실 진짜 처음으로 바다에 서핑보드를 들고 들어갔던 것은 부산 송정 바다였다. 마침 로맨틱한 관계가 되려고 했던, 결국 나중에는 1년이나 사귀게 되었던, 부산에서 일하던 어느 지인 (헤어지고 나니 이제 어느 지인) 따라 같이 서핑보드를 빌려 바다에 들어가기는 했는데, 아니 무슨 파도가 이렇게 치고, 정신이 하나도 없고, 그 외에는 기억도 흐릿했던, '첫 서핑 경험'으로만 남아 있는게 내가 처음 알게 됐던 서핑이었다. 그 직후 마침 회사에서 처음으로 긴 휴가를 낼 수 있게 되어 발리에 열흘 정도 서핑캠프를 다녀오게 되면서, 그렇게 나는 매일매일 이번 주의 파도를 신경쓰는 사람이 되었다.


돌아보니 그 이후 2년 조금 넘는 시간동안 서핑이라는 게 내 삶에 점점 더 깊이 자리잡아, 이제는 그냥 자연스럽게 나는 비는 시간에는 바다로 향하게 되고, 앞으로의 인생 계획에 서핑을 필수로 생각하게 되고, 파도의 좋고 나쁨과 함께 기분이 왔다갔다 하는, 그냥 여느 서퍼가 되었더라.


서핑은 절대로 쉽지 않은 레저다 (레저 카테고리로 구분해 보자면). 일단 무조건 바다가 필요하고 (웨이브 파크 서핑/웨이크 서핑/플로우라이더 등은 몸을 움직이는 방법만 비슷하지 바다 서핑이랑은 전혀 다른 것이다...), 잔잔한 바다는 안된다. 파도가 좋아야 진정 재미있고, 파도가 좋으려면 또 영향을 미치는 건 뭐 그리 많은지. 그리고 일단 바다로 가야 하는데, 그냥 가면 안되고, 서핑보드와 바닷속에서 체온을 유지할 수 있게 하는 웻수트가 있어야 한다. 거기에다가 보드 위에 바르는 왁스에, 보드에는 핀도 달아야 하고, 핀을 달려면 스크류와 핀키가 있어야 하고.... 또 이 모든 장비를 제대로 갖추려면 리서치도 필수다. 좋은 파도를 타려고 하면 차가 없으면 힘들고, 비행기를 타야 되는 적도 많다. 비행기를 타고 가려면 또 보드를 보드백에 넣어서 포장해서 가야 하는데... 지금 언급한 내용은 빙산의 일각이다. 서퍼들이 좋은 파도를 타려고 감수하는 시간과 노력을 관찰해 보면, 정말 서핑에 미치지 않고서는 서핑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는 걸 알 수 있다.


서핑을 하며 얻은 것들이라고 하면, 내게 가장 큰 것은 "불확실성과 살아가는 법"이다. 처음 서핑을 시작하고 내가 가장 괴로웠던 점은 파도를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현실이었다. 항상 기회비용을 고려해 계획과 목표를 세우고, 목표 달성을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그 리스트를 하나하나 격파해가는 원리에 따라 살던 나에게, 막상 서핑을 하러 갔는데 (아니면 가려고 했는데) 파도가 별로여서 투자한 시간과 노력(계획)이 허사가 됐다? 그 현실은 나에게 상당히 큰 충격과 아픔으로 다가왔다. 첫 일년은 그렇게 괴로워하며 결국 직장을 싱가폴로 옮겨 파도가 훨씬 좋은 발리로 서핑을 다니게 되었지만, 파도의 예측 불가능성은 그 어디를 가던 마찬가지였기에, 그냥 불확실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법을 터득하게 됐다. 이제는 굳이 서핑이 아니더라도, 계획이 틀어지거나 실수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주어진 상태에서 최대한 행복하려고 하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 외에도 많다. 자연스레 건강하고 단단해지는 몸과 마음, 점점 사라지는 소유욕/물욕, 큰 파도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심호흡 할 수 있는 침착함, 바다에 대해 넓어지는 이해, 서핑을 하며 만나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 파도가 좋은 곳으로 여행을 다니며 넓어지는 견문 등. 하나하나 별도로 글을 쓸 수 있을 정도의 큰 지점들이다.


서핑을 하며 얻은 것들도 참 많지만, 잃은 것들도 참 많다. 20대 초반까지는 창백하고 투명했던 피부가 이제는 주근깨에 까무잡잡해져 다시는 그시절로 돌아갈 수 없게 됐고, 서핑을 점점 더 열심히 할 수록 어깨는 넓고 허리는 얇은 남자같은 몸매가 된다. 종아리에는 여기 저기 부딫히고 리프에 긁혀 생긴 상처가 드문드문하다. 서핑을 한답시고 생긴 인연만큼이나 파도를 따라 살면서 멀어지거나 끊어진 인연이 더 많고, 이렇게까지 서핑을 하려고 하냐는 비서핑 지인들, 회사사람들의 시선도 알게모르게 느낀다. 좋은 파도를 재밌게 타겠다고 내가 투자하는 시간과 돈은, 가만히 앉아서 기회비용 따져보면 이해해주기 어려운 수준이다. 뭐 그렇게 서핑보드랑 비키니는 여러개 갖고 싶은지.


나는 무엇보다도, 서핑에 투자하는 시간과 빼앗기는 정신이 참 걱정이다. 서핑을 하기 전에는 남는 시간에 잠깐잠깐 내 삶을 돌아보는 일기를 쓰고, 다음 목표를 세우고, 해답을 찾기 위해 독서를 하고,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이해하기 위해 신문과 잡지를 읽었다. 이제는 삶의 자투리 시간도 별로 없을 뿐더러, 그런 시간에는 다음 서핑을 어디로 가면 좋을지 파도 차트를 보고, 잘 타는 서퍼들의 영상을 감상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문득 오늘같은 날이 온다. "파도만 타다가 인생 끝나면 안되잖아"


나는 서핑만으로 만족스러운 삶을 살지는 못할 것 같다. 서핑을 하다보면 하던 일을 다 접고 서핑만을 위해 서핑 관련된 일을 하면서 서핑 위주로 사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서핑 카페나 음식점을 하거나, 서핑샵에서 알바를 하거나, 서핑장비/도구를 만들거나 유통하는 일을 하거나... 그도 그럴 것이, 일반 직장인으로서는 서핑을 만족스럽게 할 수 없기 때문. 나도 그렇게 서핑만을 위한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번 그 길을 가기 시작하면 되돌리기 매우 힘들고, 내가 서핑만으로 완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자신이 들지 않아서 자꾸 다른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고 있다. 내 재능을 발휘해 다른 사람의 삶과 이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인정을 받아 내 삶을 지속할 수 있게 수입이 창출되는 그 무엇.


나는 지금은 사모시장 데이터제공사에서 운용사 및 펀드 리서처로 일하고 있다. 서핑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나는 내 일을 좋아한다. 나는 팀에서 내가 맡은 일을 곧잘 해내고, 회사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도전할 때는 짜릿함을 느낀다. 현재(이 글을 쓸 당시는 2020년 7월즈음으로, 제주 생활은 3개월 반정도 했습니다)는 재택근무를 하고 있어 제주에서 지내며 서핑과 일이 공존하는 내가 꿈꿔왔던 삶을 누리고 있고, 앞으로는 이 커리어를 조금 더 가꾸고 발전시켜 볼 생각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영역에서 내 재능을 모두 끌어모아 발휘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


글을 쓸때 나는 가장 몰입하는 사람이 된다. 일을 하다가는, 영화를 보다가는 오늘 장볼 거리가 생각나고, 엄마한테 연락하려고 했던 게 생각나고, 친구한테 카톡 답장 안해준게 생각나지만, 글 쓰다가는 그렇지 않다. 그냥 어느 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는 걸 보면서, 종류는 모르겠지만 일단 글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매일매일 다른 내 미래를 상상하지만,

오늘은 문득 발리에서 글을 쓰며 서핑이 있는 삶을 사는 내 자신을 생각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